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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기사단 [聖殿騎士團, Templar]
- 정식 이름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
Poor Knight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
* 창설
성전 기사단의 역사는 제1차 십자군의 파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1차 십자군은 성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슬람 세력을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서 중동 지역에서 기독교의 세력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에 1119년 말(또는 1120년 초)에 성지 수호를 제창한 프랑스의 귀족 위그 드 파엥(Hugues de Payens) 아래 아홉 명의 기사들이 모였다. 그들은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여 이미 활동하고 있던 성 요한 기사단의 예를 모방하여 아우구스티누스회의 회칙을 지키며 생활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보두앵 2세는 그들에게 솔로몬의 성전터에 있던 알 악사 사원을 그들의 본부로 내주었다. 이로서 '그리스도의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Poor Knight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 즉 템플러라는 전투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성전(템플) 기사들은 백색 튜닉의 등에 크로아파테라고 불리는 끝이 넓어진 독특한 양식의 붉은 십자가를 달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했다.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와 성전 기사단 창립자들
현재의 예루살렘 성전 산의 모습이다. 왼쪽의 짙은 회색돔이 알 악사 사원,
오른쪽의 황금돔이 황금 사원 또는 바위 사원이다. 8각형의 건물 내부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바위라고 전해진다.
성전 기사단의 초기 본부 알 악사 사원. 바위 사원도 함께 관리했다.
성전 기사단의 이름은 이 성전 산의 성전에서 유래한다.
[알아보기] 알 악사 사원(Al-Aqsa Mosque)은 성전산 남쪽에 위치한 은색 둥근 지붕의 회교사원이다. 메디나, 메카와 더불어 이슬람교 3대 성지의 하나로 8세기 압델 말릭과 그의 아들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엘 악사 사원은 원래 비잔틴 시대의 교회를 모스크로 만든 것인데, 그 후 지진 등으로 훼손되어 수차례 수리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066년에 준공되었다. 사원 내부는 7개의 홀로 되어 있고 스테인글래스와 타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위키백과-
위그 드 파앵은 자신들의 단체도 성 요한 기사단처럼 공식적인 기사 수도회로 임명받고 싶어 했다. 그는 당대 카톨릭 세력가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에게 회칙 작성과 로마 교황청과의 중재를 요청했으며, 베르나르도의 후원에 힘입어 1128년 1월 13일 프랑스의 트루아에서 개최된 교회회의에서 교황 호노리오 2세는 성전 기사단을 기사 수도회로 정식 인가하였다. 당시
서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성지 수호를 위해 조금이라도 공헌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프랑스 국왕을 비롯하여 많은 귀족들이 성전 기사단에게 후원금을 전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사로 입회하였다.
1138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인노켄티우스 2세)는 성전 기사단에게 교황 이외의 다른 왕이나 귀족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해제했으며, 국경의 자유로운 출입, 과세금지 등의 특혜를 부여하였다. 이로서 더 이상 이들은 가난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성전 기사단은 1147년 제2차 십자군 전쟁 때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를 도와 고군분투한 공로로 제2차 십자군 전쟁이 종결된 후 파리 교외의 광대한 부지를 기증받았다. 이곳에 성전 기사단의 서구 거점이 세워지게 된다. 이 부지는 거대한 저택 주위에 높은 성채가 둘러싼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교황이나 외국의 왕들이 프랑스를 방문할 때 임시 숙소 역할을 수행하거나
왕실의 보물이나 자금 보관 등까지 맡게 되었다. 1163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선출되자 그는 성전 기사단에 보답하는
형태로 회칙 'Omne Datum Optium'을 반포하여 수도회의 재산 보호와 주교로부터의 독립 등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힘과 용맹스러움은 전 유럽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살라딘이 이끈 3만 명의 이슬람군을 무찌른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자극받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나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모두 치열하게 싸웠으며 에스파니아와 포르투칼 또한 대(對)이슬람 전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이들의 조직이 거대화되고 수많은 특권이 부여됨에 따라 지역의 교주들이나 다른 수도회로 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상업 활동과 금융업에까지 손을 뻗친 기사단은 상인이나 제조업자들에게 있어서 눈엣가시같은 존재로 변모해갔다.
* 거대 금융기관으로서의 발달
군사 조직으로서의 표면상의 모습에 가세하여 지녔던 기사단의 또 다른 모습은 금융기관으로서의 모습이었다. 본래 입회자들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모두 버리기 위해 개인의 사유재산을 수도회에 기증하였는데, 이 관습은 다른 수도회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처음 수도회의 활동 목적이 이교도와 싸우며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였지만, 실제로 전선에 나아가 싸우는 숫자는회원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군사 활동 그 자체보다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병참과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전 기사단이 순례자들의 예금증서를 작성하여 그들의 자산을 보관하는 서비스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축하고 수많은 기부금을 모으면서 성전 기사단은 12~13세기에 걸쳐 막대한 자산을 소유하였으며, 그에 따라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많은 토지를 보유하였다. 더불어 성당과 성채를 세우고 포도밭이나 농원을 만들었으며, 이윽고 기사단 소유의 함대까지 보유하여 최전성기에는 키프로스 섬 전체를 소유할 정도였다. 파리에 있던 성전 기사단의 지부는 프랑스 왕국의 비공식 재정경제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으며, 이따금씩 프랑스 왕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해주었다.
* 聖地의 상실
1187년 7월 하틴(Hattin) 전투.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빼앗기는 데 전환점이 되었다
기사단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짐에 비례하여 중동의 정세는 악화일로를 가다가 1187년 7월 4일 하틴의 뿔(Horns of Hattin) 지역에서 벌어진 살라흐 앗딘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군사력을 상실한 십자군은 결국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된다. 전투 장소는 이스라엘 갈릴리의 티베리아스 근처로 티베리아스와
아크레의 중간에 "하틴의 뿔"로 불리는 두 개의 산 중간의 지역이다.
아크레(Acre) 전투
성전 기사들은 그 후에도 성지의 몇몇 지역에 남아 있었으나 칼리프 쿨라완과 그의 아들 알 아시라프 칼릴이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아크레(아코)를 공격하여 포위한 1290년 봄 최후의 몰락이 찾아왔다. 아크레는 소위 십자군 기독교 국가들의 마지막 아성으로 간주되었다. 방어벽으로 둘러싸이고 뒷면이 바다였던 아크레는 십자군의 요새로서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1291년 봄, 십자군의 요새로 전설적인 명성을 지녔던 아크레(이스라엘 북부 항구도시)가 함락당하면서 유럽인들은 성지와 그 인근에 대한 발판을 잃고 말았다. 이로서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아랍인과의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군사 활동이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군사 활동이 없이는 존속할 필요가 없는 다른 기사단들은 자신들의 존망을 위해 새로운 목표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성전 기사단은 막대한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어 달리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 기사단의 괴멸(壞滅)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
기사단의 파멸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13세기가 끝나가면서 중앙집권화를 계획하고 있던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당시 세력이 막강한 두 개의 기사단, 즉 성전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합병해 자신이 그들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 성지를 재정복하려는 구상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후손들이 그 자리를 천년만년 영원히 계승하여 자신의 왕조가 전
유럽에 미치는 강대한 영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궁핍한
상태였으며 재정 분야에서 가끔 성전 기사단의 원조를 받는 처지였다. 필리프 4세는 심복인 기욤 드 노가레의 조언에 따라1296년에는 로마교황청으로 납부하던 봉헌금을 금지시키고 통화정책을 실시하였다. 1306년에는 프랑스 내 거주 유대인들을 일제히 체포하여 자산을 몰수한 다음 추방시켰다. 이리하여 상당한 재산을 손에 넣은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단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단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필리프 4세는 당시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를 만나 성 요한 기사단과 합병을 제안했지만 즉석에서 거절당했다. 필리프 4세는 어떻게 하면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자신이 차지할 수 있을까를 검토하였지만, 원래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체포해 재판에 회부시켜도 유죄를 입증하기란 어려웠다. 그는 익명의 증언을 채택할 수 있는 이단 심문 방식을 이용하는 것으로 기사단의 유죄를 입증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이단 심문(종교재판)을 실시하려면 교황의 인가가 필요하였지만, 당시 교황은 프랑스 왕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인 프랑스 출신의 클레멘스 5세였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리하여 성전 기사단은 입회 의식에서 남색 행위, 반기독교적 맹세, 악마 숭배 등등의 죄목으로 기소 당하게 되었다.
* 火刑에 처해지는 기사들
화형에 처해지는 기사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모든 곳을 샅샅이 뒤져 성전 기사단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이단 행위 등 100여 가지의 부당한 죄명을 덮어씌운 뒤, 죄를 자백할 때까지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당시 이단 심문에 참석한 심문관들은 모두 프랑스 왕과 결탁한 고위 성직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들은 특권을 누리던 성전 기사단에 한결같이 적의를 품고 있었다. 결국 기사단은 이단자들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한 채 재산은 성 요한 기사단에 넘어가고, 이후의 활동은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요청에 따라 빈 공의회를 열어 정식으로 성전 기사단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프랑스 이외의 나라들에도 명령이 하달되었지만 키스티야, 아라곤, 포루투칼, 스코틀랜드 등은 따르지 않았다. 특히 포루투칼은 명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게 하였다. 신성로마제국과 키프로스 섬에서는 재판이 행해지기는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던 스코틀랜드는 군사력의 감소를 가져올 기사단의 해체 따위에는 애초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던 기사들은 탄압을 모면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도 전쟁으로 교황의 명령을 시행하는 게 지체되었으며 그 사이 기사들은 탄압을 피해 스코틀랜드로 넘어갔다.
재산의 몰수를 끝낸 필리프 4세는 1314년 3월 투옥시켰던 네 명의 지도자들의 처형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자크 드 몰레
기사단장과 그의 참모들은 시테 섬의 형장에서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마지막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 1243~1314.03.19)'
* 명예 회복
성전 기사단은 19세기 까지만해도 이단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그들이 기소당한 죄목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1813년 프랑스의 레이누아르가 처음으로 이 사건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1907년 독일의 역사학자 하인리히 핀케에 의해 최종적으로 "그들의 죄상은 사실무근이며 필리프 4세가 돈을 목적으로 괴멸시킨 것이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전 기사단에 대한 재판은 프랑스 왕의 개입 등 불공정한 처사가 많았다고 시인하고 있으며, 빈 공의회에서 교황이 성전 기사단의 해체를 명령한 것도 당시 사회의 어쩔 수 없는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2007년 10월 12일 바티칸 비밀문서 보관소는 성전 기사단의 재판 기록인 'Processus Contra Templarios(성전 기사단의 탄핵 과정)'을 단행본으로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공개하였다. 그 자료를 보면 교황이 기사단 지도부의 부패는 인정하였으나 이단 혐의는 사면한 것으로 되어 있다.
* 자크 드 몰레의 저주
세느 강의 시테섬에서 화형 당하는 자크 드 몰레
7년간의 감옥생활 끝에 성전 기사단의 수장 자크 드 몰레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예수를 부인했다든지, 십자가에 침을 뱉은 행위에 대해서는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시인했으나, 남색에 대해서만큼은 끝까지 부인했다. 그는 1314년에 군중들 앞에서 그 자신과 성전 기사단의 죄를 모두 실토하도록 종용받았다. 그러나 그는 초기에 했던 고백을모두 취하하고 그의 유일한 죄는 고문에 못 이겨 그의 기사단 형제들을 기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결국엔 다시
이단으로 몰려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자크 드 몰레는 죽기 전에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손을 풀어 달라고 청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불에 타 죽기 전에 국왕과 교황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저주를 마구 퍼 부었다.
"교황 클레멘스, 국왕 필립! 나는 반드시 일 년 안에 정당한 징벌을 받도록 그대들을 신의 법정에 출두시킬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 그대들의 종족들은 13대까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의 저주는 주효했다.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한 달후인 4월에 질식사하였고, 필립 4세는 그해 11월 갑작스러운 뇌의 발작으로 "나는 저주 받았다"라는 헛소리를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그의 세 아들들도 12년 안에 남성 후계자 없이 모두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카페 왕조의 가계는 문을 닫았다.
* 성전 기사단의 인장 (Seal of Templar)
성전 기사단의 다양한 인장들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골라 보았다
* 두 명의 기사Two Rider
두 명의 기사가 한 마리의 말에 올라타 있는 모습은 '형제애'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맹세한 '청빈淸貧' 서약의 상징이다.
* 백합 문양과 십자가
백합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 바위 위의 돔 (Dome of the Rock)
성전 기사단의 본부가 있었던 예루살렘 성정 산의 바위 사원을 나타내는 인장이다
인장에 쓰여진 DE TEMPLO CRISTI는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는 의미.
사진의 인장은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본래의 인장에는 라틴어로 쓰여있다.
* 주의 어린 양
템플 마스터, 샌드포드의 로버트의 인장. 1241
SIGILLVM TEMPLI ' 신전의 인장'
'신의 어린양'을 나타내는 양과 십자가가 그려진 인장이다
(스크랩) * 템플 기사단의 명멸
유럽지방 중세 암흑시대 이후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템플 기사단이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의 배후 또는 전면에 출몰하며 다양한 양상을 보여 왔다. 템플 기사단은 서기 1119년에 예루살렘을 여행한 위그 드 파앵 등 프랑스 귀족 9명에 의해 결성되었다. 당시 예루살렘 왕이던 보드앵(Baldwin) 1세는 그들을 귀빈으로 영접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였던 알 아크사 사원을 본부로 사용하도록 허가하고, 인접한 솔로몬 신전도 같이 관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단원들은 그 후 7년간 거의 같은 곳에서만 생활했다고 한다. 위그 드 파앵은 10년 후에 프랑스로 돌아가1128년 1월에 기사단에 대한 교회의 공식 지원 확보를 위한 트루아 종교회의에 참여하여 막강한 실력자인 베르나르 드 끌레르보로부터 기사단의 공식 규약을 받았다. 교회의 공식 지원을 받은 기사단은 날로 번창했고 십자군의 운송과 재산관리 등을 떠맡다시피하면서 12세기 말엽에는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최초의 국제 금융체제라고 할만한 사업도 벌였고 유럽 각지의 토지와 성을 포함한 많은 부동산은 물론 수많은 자신들만의 요새도 소유했다.
약 백여 년 간 더욱 번창했던 성전 기사단은 1290년에 최후의 십자군 요새 아크레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자 10여 년에 걸쳐서 거의 모두 유럽에 복귀했고, 그 중 수천 명은 옥시타니아에 정착했다. 당시 프랑스 왕 필립4세의 권력은 내부의 적으로 인식된 카타리파를 숙청함으로써 유럽 제일의 실력자로 떠 올랐고, 그런 힘을 배경으로 1309년에는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 자신이 1305년에 리용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교황으로 만들어 준 클레멘스 5세를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있었다.
필립 4세는 십자군 전쟁에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거대한 권력을 장악한 대신 엄청난 전쟁비용 등을 빌린 성전 기사단에게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필립 4세는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성전 기사단을 박멸하기로 작정하고
교황을 꼬드겨서 그들을 이단으로 몰았다.
1307년에 필립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클레멘스는 템플 기사단이 이단이라고 선언하고 필립 4세에게 재판 권한을 맡겼다.
곧이어 10월 13일(금요일)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전격적으로 기사단을 습격하여 15,000명 이상을 체포하고 그들의 영지와 재산을 몰수해버렸다. 이 때 필립의 동태를 눈치 챈 다수의 단원들이 야간에 대서양 연안의 라로셸 항구를 통하여 엄청난
금은보화 등을 싣고 탈출하여 유럽 및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클레멘스는 11월 12일에 기독교세계 전역에서 기사단을 체포하라는 칙령까지 내렸으나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는 별다른 조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미 이단의 판정을 받은 성전 기사단의 지도급 인사들은 전국에서 졸지에 체포된 후 악랄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있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선택도 없었고, 자백할 때까지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어갔다. 체포된 지도자들은 그후로도 7년 가까이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세느강의 시테섬에서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54명의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화형당하고 말았다.
첫댓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진자' 와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등장하는 템플 기사단!
세고비아 알카사르의 창문에 서면 아담한 마을 뒷편 언덕에 있는 다각형의 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13세기 초, 템플 기사단이 세웠다는 베라 크로즈 성당이다.
오래 전에 내 블로그에 정리해두었던 템플 기사단 이야기를 꺼내어, 사진을 보충하며 다시 정리해 보았다.
아~템플기사단에 대한 이렇듯이 정밀한 취재를 처음 보네요~감동. 종교의 희생물. 시대적 산물...느낌이 많아요~짠하게
"성전 기사단'의 장장 200여 년에 이르는 기록을 이렇게 상세하고 정밀하게 분석해 주시니... 그 노고가 대단하십니다.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작업을 기쁘게 해주시는 이민혜선생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