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이나 동양의 자연 종교들은 수양을 중시하는데, 이들이 수양을 행하는 방법은 참선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시간에는 생각을 한다. 하루에 몇 번 생각할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1초에 1번 정도 생각한다나. 그럼 자는 시간 제외하고 하루에 거의 6만 번 정도 생각하는 거겠지. 생각은 인간의 의식 세계이다. 의식 밑에는 잠재의식이 있고, 그 밑에는 무의식 층이 있다. 참선은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생각들을 다 흘려보내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더 이상 생각에 지배되지 않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 ‘나’가 바로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된 소우주이다. 이게 자연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고, 구원이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된 사람의 내면에는 더이상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희노애락애오욕에 지배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 씻겨나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유로운 영혼인 이들에게 육체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은 영혼을 가두고 구속하는 거추장스러운 살덩어리일 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기꺼이 받을 수 있었다. 이 잔을 마시면 내 영혼이 곧 해방되기 때문이다. 죄의 몸을 벗으려고 하는 것은 영지주의와도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이다.
속죄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해주시는 것이다. 죄사함이 있어야 구원받는다. 죄사함이 뭐지? 불교, 유교, 도교 등 직간접적으로 동양사상과 자연 종교의 영향을 받은 동양인들은 속죄를 내면에 존재하는 죄를 씻어내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사함은 내면의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어 가리는 것이다.
(레 1: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Qapar)가 될 것이라
( Qapar )는 덮는다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cover가 나왔다. 내가 드리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면서 내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잡으면 나를 대신하여 죽는 희생제물의 피가 내 죄를 덮어 가리는 것이 바로 속죄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부흥사들이 말을 하는데, 그 의미는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자신을 완전히 담그라는 말이다. 믿는 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죄 위에 주님의 피가 덮이게 되는데, 누구는 죄를 간신히 가릴 정도로, 누구는 도저히 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의 피가 두텁게 덮일 것이다. 두텁게 덮일수록 우리는 그를 ‘충만’하다고 말한다.
죄가 그대로 있는데, 그걸 해결하지 않고 주님의 피로 덮으면 장땡인가?
당근! 이건 장땡을 넘어 38광땡이다.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죄는 내 본성 중 하나이기 때문에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죄라는 놈을 그대로 두면 끊임없이 마음에서부터 입과 눈으로 기어나와서 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죄의 소원이었잖아. 죄는 힘이 강하다. 그 위에 피가 얇게 덮이면 죄라는 놈이 힘을 써서 사람을 충동하여 피를 뚫고 올라와 버린다. 두텁게 덮이면 죄가 감히 올라오지 못하고 갇히게 되지.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더 이상 죄의 냄새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 냄새가 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덮힌 그리스도의 피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사도 바울은 이걸 [갈 5장]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이름붙였다.
덮으면 해결된다고? 하나님께서 그런 얄팍한 수에 속겠냐? 물론 참 얄팍한 수이긴 한데, 그 얄팍함을 구원의 방책으로 정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피를 두텁게 칠해도 그 밑에 있는 죄를 하나님께서 왜 못보시겠는가. 그렇지만 그 위를 자기 아들의 피가 덮혀 있으니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해주시는 거다.
얇다고 말하지 마라. 그런 얄팍한 것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해서 지옥 가는 인간들이 부지기수인 것이 참 거시기 한 현실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