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9)에 이어 계속...>
◆2015년4월27일 월요일-여섯째 날[폴란드- 비엘리츠카, 크라코프-오슈비엥칭(아우슈비츠)수용소/체코-프라하(천문시계,
카를교, 구시청사와 구시가지, 바츨라프 광장, 화약탑, 틴성당 관광 등 -(6)]
오늘은, 어제 폴란드에서의 유네스코 자연 및 문화유산인 소금광산관광에 연이어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최대의 강제수용소 인류역사에 비극적인 현장이며 영화 ‘쉰들러리스트’와 ‘안네의 일기’의 무대가 된 죽음의 유태인위주 수용소, 폴란드어로 ‘오슈비엥칭(Oswiecim)’보다 독일어 지명인 ‘아우슈비츠(Auschwitz)'로 더 잘 알려진 수용소를 보고자 이곳 비엘리츠카에 있는 호텔에서 종전과 같이 AM07시에 아침식사(*양식; 뷔페)를 일찍 한 다음 호텔 밖에 나와 보니 쾌청한 날씨에 파란 하늘이 드높고 주차장 옆에는 어제 소금광산에서 보았던 체리나무가 꽃이 만발해있어 파란하늘과 체리 꽃을 카메라에 담고 각자 호텔로 올라가 짐을 챙긴 다음 AM08시 정각에 전용관광버스를 타고 ’오슈비엥칭‘으로 출발하였다.
시내를 나와 폴란드의 기간(基幹) 고속도로를 거치면서 도로좌우에 눈에 익은 자작나무 및 소나무 숲이 있어 반가움에 물끄러미 밖을 쳐다보고 감상도하면서 반 무 의식 상태로 가는데 버스는 좁은 국도로 들고 거치는 가 했더니 그간 약 1시간 30분 달려오던 버스가 어느덧 AM09:30분에 수용소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주차장에서 내려서 수용소가 있다는 쪽을 보니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붉은 벽돌로 지은 긴 가로로 일자형 1층에 가운데는 감시초소 같은 약 3층 높이의 제2수용소인 위병소 건물이 보인다.
아우슈비츠에는 3개의 수용소가 있는데 제1수용소(오슈비엥칭)가 포화상태가 됨에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와 제3수용소를 추가로 만들었다고 하며 제3수용소는 규모가 제일 컷으나 패전 직전 철저하게 파괴해 흔적만 남아 관람이 불가능하고 나머지는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소련군이 진입하면서 급히 퇴각한 독일군이 미쳐 모두 파괴하지 못해 상당한 시설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단다.
↓위병소 탑에서 내려다 본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전경일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1940년 4월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나치 친위대(Schutzstaffel)와 독일 경찰국에서 최초, 건설했다. 그 후 나치의 소련침공 이후 폴란드 인 뿐 아니라 소련군 전쟁포로 등도 수감되다가 1941년 여름,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이 진행되면서 아우슈비츠는 이를 위한 대량 학살 장소로 이용되었다. 1940년 수용소가 생긴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략 150만 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그 가운데는 100만 가량이 유럽 전역에서 끌려온 유대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사람 가운데 노동력 여부를 판가름해 노동력이 없는 약 75%는 가스실로 나머지 노동 이용 가치가 있는 약 25% 되는 자들은 노동력실로 구분 배치하는데 희생된 자 약150만 명 가운데 약90만 명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가스실 행을 모면한 노동력 있는 자 약 20만 명은 제대로 먹을 것도, 씻을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전염병, 영양실조, 굶주림 등으로, 그 외 수십만이 잔인한 생체실험, 교수형, 총살 등으로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가스실에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나면 시신에서 금니, 머리카락 등을 수집했고 시체는 가스실 옆에 설치되어 있는 소각장에서 화장된 후 인근 강 등에 아무렇게나 뿌려졌다. 대량학살 후의 뒤처리는 물론 수감되어 있는 유대인의 몫이었다. 그렇게 수집된 머리카락은 수용소 인근 혹은 독일에 있던 섬유회사에 팔려 카펫 재료로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머리카락에 함유된 성분을 분석한 결과 대량학살에 쓰여 진 화학물질이 독일에서 만들어진 '사이클론B'라는 독가스로 밝혀졌다.
유대인 수감자들 중에서 수감자들의 작업 상황, 생활 등을 관리하기 위해 젊고 건장한 자들 가운데 뽑힌 '블록엘터스터(Blockältester; 한 구역에서의 고참)'라고 불리던 그들은 나치 친위대보다 더 악랄하고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학대했다고 전해진다. 한 블록엘터스터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다른 유대인을 잔인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던 시간의 기억들을 제2차 세계대전 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늘어나는 수감자를 더 조직적으로 관리, 학살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에서 3km 가량 떨어진 비르케나우라는 지역에 그 크기가 무려 53만여 평에 달해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진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를 탐방하였다.
제2수용소인 위병소 탑에 올라가서 수용소를 내려다 봐도 비록 수용시설을 대부분 파괴하여 아직 복구가 안 돼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황량한 벌판으로 넓게 퍼져있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고, 입구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우측에 사방 고압전기 철조망으로 주위를 높게 에워 싸여있는 당시 일부 수용시설이 있었다.
수용시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생활시설 중 남은 건, 한쪽에 많은 수감자들이 한 번에 다수가 사용하던 인류 최대 비극의 현장 집단화장실이 마치 가축우리 돼지나 새장에 새들이 변을 보도록 얽기 설기 칸과 망을 치듯 사람을 짐승이하 취급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는 제2수용소인 정문(이곳의 입구로 한번 들어오면 살아나올 수 없다고 하여 일명, 죽음의 문이라고 불렸답니다)으로 들어서면...↓
↓정문 안으로 철로따라 상당들어와 정문쪽을 바라본 풍경↓
...바로 그 앞에는 당시 정문을 통과해 길게 철로가 뻗어 있는데 그 철로따라 가다보면 당시 수용소로 안으로 바로 수감자를 실어 오던 기차 화물칸이 전시돼 있는데, 칸 사방이 보이지 않게 철판 칸막이로 싸여 있고 유일한 철 출입문이 굳게 잠긴 채 있는 그 자체로 공포스론 느낌을 자아 낼뿐 아니라 좀 더 철로 옆길로 따라 내려가면, 좌측에 있는 수용시설 입구에 독일군 수용소 관리 사무실이 있다. 이곳으로 실려 온 수감자들은 캄캄한 기차 화물칸 안에서 내리면 바로 수용소 의사의 '심사'를 거쳐 일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된 자는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노동 능력이 없는 병자, 노약자, 어린이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유럽 각지에서 실려 온 수감자 가운데 노동 가능자를 추려 강제노역 인력을 필요로 하는 다른 도시로 다시 보내는 중간집합소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다.
↑정문 안으로 철로따라 상당들어와 수용소쪽을 바라본 풍경↑
↑수감자를 실어 오던 '기차 화물칸'↑
↑수용시설 입구에 독일군 '수용소 관리 사무실'↓
↑화물칸 안에서 내리면 바로 수용소 의사의 즉석 '심사'↑
↑일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된 자는 수용소로 즉시인솔 '수감'↑
※여행기<---(11)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