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뒤에 가서 하는 말이다. 행복한 자는 막대기를 심어도 레몬나무로 자란다.
- 키케로 -
키케로(라틴어: Marcus Tullius Cicero)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 이탈리아 아르피눔에서 태어나 기원전 43년 12월 7일(율리우스력) 포르미아에서 사망한 로마의 정치인, 변호사이자 라틴어 작가이다.
이탈리아 유산 계급 출신의 로마 시민이던 키케로는 귀족 계층에 속하지는 않았는데, 귀족들은 원칙적으로 그에게 주요 정치적 역할을 주지 않고자 했다.
동시대인 폼페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는 달리 키케로는 군인 경력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수사학과 법학을 건실히 다지고 나서 그는 변호사로서의 소질을 충실히 발휘하여 기원전 63년에는 최고 행정직, 집정관이 되어 출세하는데 성공했다.
야망가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던 위기의 공화정에서 키케로는 세 치 혀로 카틸리나 음모를 막았는데, 이 연설이 바로 카틸리나 반박문이다. 허나 본인도 자랑스럽게 여긴 이 성공은 기원전 58년 음모가들을 재판 없이 처형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망명길로 몰아넣었다.
기원전 57년 로마로 돌아온 키케로는 폼페이와 카이사르가 주름잡은 정계에서 더이상 주요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발발한 내전 와중, 키케로는 망설이며 폼페이파에 합류했으나, 결국 카이사르의 권력을 달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로는 안토니우스에 대항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게 된다. 안토니우스를 향한 키케로의 거침없는 반대는 결국 기원전 43년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훌륭한 연설가이던 키케로는 고전 라틴어 표현의 전형으로 평가받은 풍부한 작품들을 집필하였으며, 이 중 대부분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키케로는 정계에서 활동을 멈춘 시기 동안 수사학 저서 집필과 희랍 철학 이론의 라틴어 수용에 헌신했다. 중세 동안 부분적으로 잊혀졌던 키케로의 작품들은 카롤링거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고전 시기에 다시 조명받았다. 허나 19세기와 20세기 전반 동안, 키케로는 그저 희랍 철학자들을 집대성한 인물로만 평가받았다.
피에르 그리말은 더 긍정적으로 키케로가 희랍 철학의 일부를 우리에게 전해준 귀중한 중개인이었다고 평가한다. 정치 생활에서의 평가는 보통 박하다. 난투장의 중심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으로, 로마로 온 출세한 이탈리아인으로, 다재다능한 기회주의자로 평가받으며, 테오도어 몸젠과 제롬 카르코피노에 따르면 폼페이의, 이후 카이사르의 "잠복한 군주정의 수동적인 도구"로 평가받기도 한다.[출처:나무위키]
첫댓글 키케로의 명언을 봅니다.^^
긍정의 명언을 배웁니다~^^
로마정 한때의 한축을 담당했던 키케로를 봅니다~
고맙습니다
키케로의 일생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