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
"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로 내쫓고 이이첨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조선의 3대 반정(쿠데타)의 하나로,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2일 서인 반역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계유정난이 숙부가 조카를 몰아냈다면, 인조반정은 조카가 백부를 몰아냈다
성공 가능성도 절대적으로 낮았고 한 붕당의 씨를 말려버렸지만, 나름 명분이 있었고 민생만은 일시적이나마 안정을 찾았던 쿠데타. 하지만 이괄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이 이어진다면 어떨까? 광해군의 착취냐 아니면 외세의 착취냐?
진짜로 막장을 달린 연산군을 내버려뒀다가는 나라가 망할 거라고 대신들이 확신하고 일으킨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능양군의 개인적 원한과 당리당략적인 이해 요소도 있었다. 능양군은 중종처럼 반정 후 대신들의 추대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적극적으로 복수의 칼을 갈며 반정을 주도했다. 아버지가 책봉의사가 있기도 했던 신성군의 동생이였기에 정치적으로 반정의 명분을 얻기 쉬웠던 것.
연산군 때는 내각을 구성하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정파도 이를 선선히 응낙했다. 반면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지지기반인 대북 전체가 타 정파의 공공의 적이 된 판이라 이들 전부를 타겟으로 삼았고, 대북과 상당수 북인들을 전부 제거했다. 물론 100% 전멸한 것은 아니지만 대북계열은 '학맥'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제거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파로써는 완전히 소멸. 적어도 기축옥사와 계축옥사는 물론이고 후대 숙종 대의 환국이 한쪽 붕당이 실각하는 수준에서 끝난데 비해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대북, 더 나아가서 북인 자체를 역적 취급해 씨를 말렸기에 인조반정이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된다.
반정의 시작
광해군은 분명 민생에 있어서는 혼군이었다. 궁궐공사를 위해 뇌물 상남액의 많고 적음 징세관인 조도사들에 대한 협조 여부로 지방관과 변방장수들의 근무성적을 평가하는등 한나라의 국왕이 수탈을 부추기는 막장짓을 하였다. 지나친 궁궐공사와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 여름을 기점으로 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아예 백성들은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궁궐공사 재원마련을 위해 전국에 영건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는데 영건도감 자체가 왕의 지대한 비호 아래 부패, 권력기구화하여 정해진 수량(1개도에서 50~100필 가량)에다 방납가를 적용,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기에 관료들이 광해군에게 조도사들의 불법행위를 고발하자 조도사들이 취한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게 아니라는 궤변으로 지방수령들의 탄원을 무시하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하는등 막장짓을 했던 것이다.
반정이 일어나기 3년전인 1620년 광해군의 옥사에 대한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불만을 품은 세력이 조금씩 등장한다. 이중에서 능양군의 외삼촌이기도 했던 구굉은 친구 이서와 친척인 구인후, 신경진, 최명길 등을 은밀히 포섭해 거사 준비를 모의했다. 구굉은 그 후 많은 병력을 수하에 둔 장만을 끌어들여 거사를 행하려 했으나 장만은 위험하다 여겨 구굉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비록 시작은 구굉,이서 등이 주도했으나 반정 시 실질적인 공을 세운 주도자에 해당되는 인물은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으로 이들은 반정 성공 후 모두 반정공신에 올랐다.
반정 직전 평산부사였던 이귀는 호랑이 한마리를 잡아 그 가죽을 광해군에게 진상한 뒤, 호환으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나 경계지역을 넘어서도 쫓을 수 없다. 그러니 착호갑사(호랑이 사냥을 위한 특수부대)들을 경기,황해 일대에도 파견 가능하게끔 주청을 올린다. 광해가 이를 허락하자 사전에 모의한 장단부사 이서의 군대와 합류해 이 병력이 반정 당일 주력이 된다. 이와중에 이귀가 작당해 역모를 꾀한다는 고변이 들어오자 이귀는 무고하다는 상소를 올리며 역으로 고변자와 대질심문하자고 버텼다. 대북 일당이 이귀의 탄핵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사했다.
반정은 실행 직전 이이반이 배신해 김신국과 박승종에게 반정 사실을 일러바쳤다. 하지만 연이은 고변으로 감각이 무뎌진 광해군은 후궁들과 연회에 빠져 그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 하였고, 또 박승종 등 다른 관원들도 뒤늦게 대책을 강구하는 중에 반정군이 궁중에 들어와 인조반정이 성공하였다.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은 1623년 음력 3월 12일 밤, 홍제원에서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이귀를 호위대장으로 삼았다.
반정의 진행
능양군의 600∼700명의 병력을 필두로 장단의 이서군, 이천의 이중로군이 속속들이 합류했다. 그러나 반정 직전 포섭한 이이반이라는 인물이 어찌된 셈인지 내막을 고변해 반정 세력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고 특히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는 집에 틀어막혀 두문불출하자 이에 급한대로 무관인 이괄을 대장으로 창의문으로 진군했다. 게다가 이미 이들과 내통한 훈련대장 이흥립이(박승종의 사돈이다) 창의문을 내어주어 별다른 저항 없이 궁궐을 접수했다.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 갔고 반정이 성공했다고 느낄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반정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들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래도 광해군이 복구해 놓은 궁궐을 불태워서 또 백성들 피땀을 또 흘리게 해야 했다. 척준경이 이것 때문에 반역자 취급을 당하는데 역시나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반정이 성공하자 서궁에 유폐중이던 인목대비는 혹시나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가 아닌가 싶어 궐문을 걸어잠그고 반정의 수뇌부들이 와서 "광해군 개xx를 폐했으니 문 좀 열어주세염." 하고 청했음에도 씹었으나 능양군이 직접 와서 설명을 하고 나서야 믿고 "내가 이 날을 보기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나갔구나!"라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반정 세력을 지지하여 명분을 실어주었다. 광해군은 야밤의 기습에 제대로 대처해 볼 겨를조차 없이 궁궐을 탈출해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으나, 얼마안가 밀고자 때문에 붙잡혔고, 결국 폐위된 뒤 유배되었다.
옥새를 내리기 전에 인목대비가 '이혼(광해군)과 이지(세자)의 목을 베어 살점을 씹기 전에는 책봉이고 나발이고 없다!'라고 버텨서 잠시 소동이 있었으나 애시당초 능양군 일행은 인목대비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반정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하들이 임금을 폐한 예는 있어도 주륙한 예는 없다고 잘라 말했고 '그러면 이이첨, 유희분 그 새끼들이라도 내 손으로 조져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했으나 즉위 후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권력이 없던 인목대비는 결국 옥새를 그냥 내려준다.
반정의 영향
일단 반정 이후 조치 자체는 좀 과격할지언정 상식 선에서 진행되긴 했다. 그 다음 처리가 개판이라 그렇지.
일단 그 당시 수순이 의례 그러했듯이 타겟인 정인홍, 이이첨, 이위경, 한찬남, 백대형 등 폐모론에 적극적이였던 대북의 핵심 요인들 대부분이 사형당했고 200여명에 달하는 그 추종자들도 유배에 처해졌다. 소북의 경우에는 이귀 등이 폐모론에도 반대하거나 소극적으로 동의한 상황들을 참작하여 가벼이 처분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가 강경하게 처형할 것을 주장하여 유희분과 그의 아우 유희발을 비롯하여 소북의 수장들이 처형당했고 소북은 대북과 사이좋게 역사에서 퇴장하고 만다.
한편 광해군의 부인 유씨와 세자 이지 부부 등 가족들 또한 폐서인시켜 유배에 처해졌으며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 와중에도 명분 따져서 광해군은 죽이지 않으려고 인조가 나름 노력을 한 덕택에 천수를 누리긴 했다.
또한 반정의 주역인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을 위시로 한 사대장과 최명길,장유,심기원,이시백,이시방, 김자점 등 33명은 정사공신으로 신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고 마침내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반정을 방조했던 남인들도 은근히 떡고물을 얻어먹게 되었다.(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초기 명나라는 이를 그닥 환영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뭘 잘못했길래 폐위됐냐라는 비난과 왜군을 끌어들여 광해군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고. 나중에 모문룡의 추천으로 22개월만에 명의 승인을 얻었고, 때문에 이후 모문룡이 가도에 눌러앉아 깽판치는 걸 제대로 억제하지 못해 고생했다. 청의 침공의 주요 대의명분 중 하나가 가도의 모문룡이다. 이괄의 난 당시 이괄에게 더 호의적이어서 조정에서 모문룡을 설득하는 데 비상이 걸렸던 적도 있다. 정충신이 이괄이 가도와 손을 잡으면 필승이라고 추정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괄은 전격전을 선호했다.
민생도 획기적으로 나아진 것이 아니란 점에서는 중종반정때와 다르지 않았다. 거대한 궁궐공사는 중단되고, 세금이 덜어지면서 민생은 분명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모든 것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 역시 북인정권 실세들 재물분배문제로 서로 다투었으며, "북인들이 타던 말(가마)을 타고 북인 살던 집에서 떵떵거린다. 니들도 그들과 다른게 뭐냐"라는 식의 비방들이 많이 나올 정도였다.또한 기찰(감시와 검문)을 자주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졸지에 반역자로 몰려 죽는 일이 많아 이괄의 난때 반란군이 쉽게 한양을 접수할 정도로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인조반정의 핵심공신들 중에는 후에 몰락한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반역을 저지른 경우(이흥립, 이괄, 심기원)이 있었다. 기세등등했던 이귀는 이후 10년동안 왕의 총애를 못 입다가, 그나마 막판에 왕의 정원대원군의 추숭에 찬성해 신임을 얻었지만 그 1년뒤 사망하고 김류는 처음엔 이귀와 대비되어 일찍이 정승에도 올랐지만 추숭에 잔대하고 강빈 사사에 반대해 왕의 노여움을 샀고 결정적으로 본인의 아들이 김경징이라서 아들의 사형을 청하는 신하들의 행보에 합류해야했다. 김자점은 병자호란 때의 막장 행보에도 불구하고 인조 말년에 효종이 세자가 되는 것과 강빈 사사에 찬성해 권세를 누리나 효종때 산당에 의해 힘을 잃고 결국 '김자점의 옥사'로 인해 아들들과 함께 역률이 적용되어 거열형을 받는다. 심기원 또한 인조때 왕이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잘못 돌아간다며 세자를 옹립하려다가 포기하고 회은군을 세우려다가 걸려서 복주된다. 최명길 또한 두번의 호란으로 척화파에게 공격받고 횡의 문제로 인해 청나라의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구굉, 구인후, 이서, 신경진은 무신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권세가 덜했던 이들이다. 하지만 두드러지지만 않았을 뿐 반정 이후 서인계 무장들은 훗날 5군영이 되는 군벌들을 조직해 실권을 행사했다. . 실세는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다 특히 구씨 일가는 이후로도 정조 대 구선복의 몰락까지 계속 무신 명문가로 대대로 영화를 누렸다. 구굉은 능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판의금부사, 오위도총관, 5군영의 대장을 역임했다. 구인후는 구굉 생전에는 반정 현장에 있던 구굉만 못했지만 심기원의 옥사 이후로 능천부원군에 좌의정까지 오른다. (시호는 충무공(!)으로, 강빈을 두둔했음에도 효종에게 잠깐 짤렸다가 복권된게 함정.) 신경진은 훈련대장과 각 판서에 삼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효령대군의 후손 이서 역시 완풍군에 봉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