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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영어 해석이 더 정확한것 같아요. 아래 한국어 해석은 너무 엉터리 같네요
절대 진리인가? 상대적 진리인가? 에 따라 진제 속제가 결정된것 같아요.
영어로는 supreme self-consciousness [최고의 (자기) 본성 의식?], 또는
absolute consciousness (절대적 의식) 이라 했는데
어느 종교나 종교 자체가 상대적이지 절대는 아니거든요.
의식으로 알게된 태양은 절대 존재 입니다. 접근 할수 없고 수억만년 존재하고 , ,
목성, 지구, 수성, 모두 절대적이라 할수 있지요.
의식으로 느낀 태양 존재 자체는 절대 이지만
태양에서 오는 빛을 쪼이는데 사람마다 강도가 다르니 상대적이지요.
태양의 존재는 진제이나
빛의 강도는 지구위치, 사람, 시간에 따라 속제라 할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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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osociety.org/pasadena/etgloss/pa-peq.htm
절대적 개념 Paramartha (Sanskrit) [from parama highest, sublime + artha comprehension, aim]
절대적 개념에다 –satya 를 추가해야 진제가됨, 아래 참조,
True or supreme self-consciousness; also a great mystic work, which according to legend is said to have been delivered to Nagarjuna by ancient initiates.
Paramartha, in the view of Buddhist initiates, is that final or ultimate goal possible of attainment in the present sevenfold planetary manvantara by the striving and advancing adept. When he has overcome, subdued, and transform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lower quaternary of his sevenfold constitution so that he lives in the highest part of the upper triad -- when he has attained self-conscious living in his own monadic essence -- he thereupon attains paramartha or that absolute consciousness which, because of its freedom from all human qualifications or characteristics, can equally be called absolute unconsciousness. Expressed in another way, it is conscious existence as a nirvani. It is the state into which the upper triad of the buddha passes, once the buddha state has been reached. This entrance of the buddha's higher triad into nirvana by no means inhibits his lower quaternary from active service in the world, for his lower quaternary, being washed of all the characteristics of ordinary personality and overshadowed by the buddha's higher triad, is a nirmanakaya of high degree.
진제(眞諦) Paramartha-satya (Sanskrit) [from paramartha sublime comprehension + satya truth, reality] Absolute or sublime truth or reality; from another standpoint, the path of pure wisdom-knowledge, bringing individual freedom to the adept, in contrast with samvriti-satya (relative truth). When the adept has reached the first stages of paramartha-satya he becomes a jivanmukta (freed monad), delivered thenceforward from the unceasing round of peregrinating reimbodiments until the end of the kalpa. The Tibetan equivalent is dondampaiden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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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osociety.org/pasadena/etgloss/sam-saq.htm
Samvriti (Sanskrit) False conception {SD 1:44&n, 48&n}
Samvritisatya (Sanskrit) Relative truth. {SD 1:48&n; BCW 14: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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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제(俗諦) http://www.encyclopedia.com/doc/1O108-TwoTruths.html
이제 Two Truths (Skt., satya-dvaya). The two levels of truth or reality in Madhyamaka philosophy, known as relative truth (속제 saṃvṛti-satya) and absolute truth (진제 paramārtha-satya). In many forms of Buddhism, the concept of two levels of truth concerned the validity of epistemological experience but in some forms of Mahāyāna it was also applied to matters of ontology. This is especially so in later Madhyamaka where saṃvṛti-satya applies to the mundane reality of saṃsāra and paramārtha-satya to the transcendental reality of enlightenment and nirvāṇa. The apparent hiatus between these two levels of reality or truth led to serious soteriological difficulties which generated much debate in later Mahāyāna concern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se two forms of truth or reality. The relation between the two is discussed in treatises such as Jñānagarbha's Satyadvaya-vibhāga, where there is a tendency to identify them as two facets of the same phenomenon, neither identical nor different.
속제(俗諦) ; saṃvṛti-satya, (Sanskrit: “the empirical truth” 경험적 진리), in Buddhist thought, the truth based on the common understanding of ordinary people. It refers to the empirical reality usually accepted in everyday life and can be admitted for practical purposes of communication. It is distinct from the ultimate truth (paramārtha-satya), which lies beneath empirical phenomena and is beyond verbal expression. This ultimate truth is that of universal emptiness (sunyata), regarded as the true nature of the phenomenal world, which has no independent substantiality.
To assert the truth of sunyata, Nāgārjuna, the 2nd/3rd-century founder of the Mādhyamika (Middle View) school, expounded the two aspects ... (100 of 222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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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lossary.buddhistdoor.com/search
진제(眞諦) ; paramārtha-satya, paramārtha, paramārtha-sat, satya, ārya-satya*.
Paramartha-satya (Sanskrit) 중국어와 Sanskrit 로만 나옴.
속제(俗諦) ; [解釋] 梵語 sajvrti-satya。隨順世俗而說生滅等有之諦理。即指世間之事實與俗知之理。又作世俗諦、世諦、有諦。「真諦」之對稱。世俗諦之「世」字,在梵文有壞滅之義,即諸有為法都有壞滅之相。「俗」字之義有:(一)不知或不明之義,即不知或不明了諸法真實之義。(二)障覆之義,由無明力障覆諸法真實之義。(三)互依之義,即有為諸法皆為彼此相依而存在者。(四)詮表之義,指世間之名言能詮諸法性相。「諦」字,即真實之義,凡夫由染污無明執著諸法為真實之有。「世俗」乃指增益無明,因其對於本非「由自性有」之色聲等法而增益執為「由自性有」,即對於非實有之諸法而執為實有。而諸已斷染污無明之聖者由於無「實執世俗」,故諸有為法不現為真實而屬虛妄。依南海寄歸內法傳卷四注(大五四‧二二八中):「覆俗諦者,舊云世俗諦,義不盡也。意道俗事覆他真理,色本非瓶,妄為瓶解;聲無歌曲,漫作歌心。又復識相生時,體無分別,無明所蔽,妄起眾形,不了自心,謂境居外。蛇繩並謬,正智斯淪。由此蓋真,名為覆俗矣!此據覆即是俗,名為覆俗,或可但云真諦覆諦。」由此可知其義。〔成實論卷十一、俱舍論卷二十二、大毘婆沙論卷七十七〕(參閱「二諦」244)
頁數: p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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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web 는 엉터리 해석 같아요.
1. 진제란 출가, 속제는 속인이라 하는데
진제는 진리의 세계, 속제는 윤회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답 ; 츨가와 재가를 말하는건가요? 윤회와 비윤회를 말하는건가요?
아래 보면 너무 멋대로 해석을 했어요, 사실 출가진리도 상대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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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교에는 진리의 세계(眞諦)와 세속의 세계(俗諦)의 가르침이 있다.
가령 참선, 독경, 주력 등은 진제의 세계이고,
밥 먹고 일하는 세간인들의 일상사는 속제의 세계이다.
답 ; 불교의 일과 세상일의 구별이라 했는데 이건 좀 이해 됩니다.
결국 불교적인가 세상적인가로 구분을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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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ttp://cafe.daum.net/mahabuddhism
아래는 말을 이상하게 복잡하게 번역 했는데,, 한국어 이해불가.
아마 3D 한국어라서 안경을 끼고 읽어야 이해가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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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파악하는 주체의 언어활동과 언어를 통해 개념적으로 인식된 세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역사현실은 바로 '서로 연기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영역' 곧 속제俗諦에 해당된다.
인연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없지 않은 모습을 속제??
아래 이게 무슨 소리인지
-> 진제는 속제에 내재한 어떤 것이거나 속제를 초월한 그 무엇이 아니라,
속제의 있음이 '있되 있음 아닌 있음'을 뜻하니 진제와 속제는 서로 둘이 아니다.
답 ; 여기에 언어가 왜 들어가며 (언어 유무에 따라 결정 ??)
‘연기로 일어나서 없지 않은모습’ 이라는게 무슨 소리인지 ?
있다는건지 없다는건지 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복잡하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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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와 속제, 이게 그래도 학문적이고 나은것 같네요
http://blog.daum.net/habdo/146
문 : 그런데 스님, 진제와 속제는 대승불교에서도 익히 알려진 개념이죠.
아비담마에서는 진제와 속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속제부터 말씀해주시지요.
답 : 속제를 빠알리로는 삼무띠 삿짜(sammuti-sacca)라 합니다.
[ 산스크리트어는 Samvritisatya (Sanskrit) ]
먼저 諦로 한역되고 있는 삿짜(sacca)란 단어부터 살펴보면, 삿짜란 √as(to be)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입니다. √as는 ‘있다, ~이다’를 뜻하는 영어의 be동사와 꼭 같이 범어 일반에서 쓰이는 너무나 많이 등장하는 동사원형입니다.
이것의 현재능동분사가 sat이고 여기에다가 가능분사를 만드는 어미 ‘-ya'를 첨가하여 satya라는 형용사를 만들었는데 이것의 빠알리 형태가 sacca입니다. 그래서 형용사로 쓰이면 ‘있어야하는, 존재해야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진실한, 사실인’ 등의 형용사로 쓰이기도 하며 중성명사로 쓰여 ‘진실, 진리, 사실, 실제’란 의미로 쓰이지요. 불교에서는 고.집.멸.도를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 하여 사성제라 부르지요. 아무튼 이런 측면에서 sacca는 진행되어 가는 의미의 진리가 아닌 불변의 진리라는 측면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말이 너무 길어지니 이만 줄입니다.
그리고 sammuti 란 단어는 sam*(함께)+√man(to think, to consider)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로서 ‘함께 생각된 것, 서로 통용되는 의견’ 등의 의미에서 ‘세간에 널리 통용되는 이치나 견해’ 등을 뜻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을 8월 30일이라 하는 것이나 음력 7월 13일이라 하는 것, 자동차, 사람, 꽃 등등 세간에서 널리 사용되고 쓰이는 여러 개념, 규정, 약속, 법률, 관습, 등을 삼무띠 삿짜라 합니다.
분명히 해야할 점은 불교에서는 결코 속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간에서 통용되는 법규나 규정 약속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런 세속제에 의해서 세상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행위들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가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세간적 인습 등에 함몰되어버리면 진정한 해탈과 진정한 자유는 없게 됩니다.
속제와 빤냣띠
문 : 속제를 빤냣띠라 즉 명칭이라 한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답 : 빤냣띠(pan$n$atti)는 지혜(pan$n$aa)라는 용어가 파생된 동사 pra(앞으로)+√jn$aa(to know)의 사역형 동사 pan$n$aapeti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입니다. pan$n$aapeti는 사역형이니까 ‘[남들이] 잘 알게 하다’는 의미에서 ‘선언하다, 선포하다, 알리다, 지적하다, 지목하다’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빤냣띠는 ‘알게 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명칭, 개념, 서술, 술어, 용어’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중국에서는 ‘施設’로 번역되었는데 ‘假說, 方便設’이란 의미가 강합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두 가지 빤냣띠(개념)를 말하는데 세간에서 통용되는 모든 언어(sadda-pan$n$atti, 삿다 빤냣띠)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들(attha-pan$n$atti, 앗타 빤냣띠) 즉 사람, 나무, 돌, 컴퓨터 ... 등등을 말합니다.
이 들은 모두 아비담마에서는 개념(빤냣띠)의 카테고리에 포함되고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아비담마의 주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것은 실재가 아니고 모두 방편일 뿐이니까요.
아비담마에서 다루는 주제는 진제 혹은 승의제이고 그래서 아비담마를 빼어난(아비) 법(담마), 수승한 법이라 해석하고 그래서 중국에서 승법(勝法)이라 뜻풀이를 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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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자아(aatman, Paali. attaa)는 진제일까요 아니면 이 속제에 속할까요?
답 : 거창한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아비담마에서 본다면 분명 자아는 빤냣띠일 뿐입니다.
그런 기본 단위(dhamma)는 존재하지 않고 아비담마에서 설하고 있는 여러 기본 단위들이 뭉쳐서 만들어진 하나의 개념이고 존재일 뿐이라 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독립된 아이덴티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산냐일뿐이고 상카라일뿐이라고 위숫디막가[淸淨道論]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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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아뜨만을 그들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에서 최고 우위에 두는 힌두 제파에서 불교를 맹공격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그럼 진제를 설명해 주시지요.
진제, 승의제, 빠라맛타 삿짜
답 : 진제는 빠라맛타 삿짜(paramattha-sacca)라 합니다. paramattha는 parama(최고의, 최상의)+attha(이치, 뜻)로 분석됩니다. ‘최고의 이치’라 할 수 있겠는데 그래서 중국에서는 ‘勝義’라고 직역해서 勝義諦라고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비담마에서 제시하고 있는 여러 단위들이야말로 이 온갖 세상 즉 이 욕계에서부터 출세간의 경지에까지 항상 존재하는 최소의 단위라는 것입니다. 존재를 이런 최소의 단위, 궁극의 단위로 분해하고 해체하여(vibhajja)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가 없다고 설하는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빤냣띠 즉 속제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속에서 하는 여러 학문은 사실 대부분 이 빤냣띠를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비담마에서는 이 승의제인 구극의 단위들을 분석하여 제시하고 이들이 여러 다른 조건들 속에서 서로 어떤 관계 속에 존재하고 연연취산(因緣聚散)을 거듭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관심입니다. 승의제인 구극의 단위를 아비담마의 담마에서는 4가지 영역을 정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4개의 카테고리 안에 모든 것(dhamma)을 포함시켜 체계화하고 있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궁극입장인 무아를 분석적으로 증명하고 보여주려는 학문이 아비담마입니다.
무아의 최초요 최고의 변론자인 셈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비담마는 개념(빤냣띠)과 법(진제, 빠라맛타)을 정확히 구분하는데서 출발한다는 점입 니다. 존재와 인식의 구극의 단위인 이 법들을 빤냣띠와 구분하지 못하면 아비담마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니 아비담마 학도는 이 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사유해 봐야합니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최소단위인 법들은 인식하고 인식되는 최소단위라고 정의해야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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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 아비담마는 자칫 아주 무미 건조하고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답 :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승원에서 스님들이 하던 공부입니다. 신도들은 어렵다고 머리부터 저어버리지요. 지금도 아비담마의 나라라는 미얀마에 가보면 신도들은 거의 대부분 아비담마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아비담마란 말만 들어도 합장하고 공경하려하지 알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님들에게는 아비담마를 외우고 배우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비담마의 법수를 계속 외고 익히다보면 ‘나’를 분해하고 분석해서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힘을 자연스럽게 기르게 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위빠사나로 연결되고 그래서 어떤 수행의 경계가 와도 그기에 속지 않고 그 경계를 아비담마적으로 분석하고 분해하여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분석하고 분해하지 못하면 마음 경계에 속습니다. 철저하게 분해해서 그 뿌리를 보아야하지요.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사미때부터 그 분량이 엄청나고 최고로 어렵다는 빠타나(Pathaana)를 우리가 천수경 외듯이 줄줄 욉니다. 그 자체가 큰 수행인 셈이지요. 그렇게 외서 나중에 커서 아비담마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미세한 심리현상을 더욱더 정밀하게 관찰하게 되겠지요. 그래서 아마 미얀마에서는 소위 말하는 큰스님들이 많이 나오시는 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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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승의제 (빠라맛타삿짜)
문 : 이제 다시 승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아비담마에서는 네 가지로 카테고리를 정하여 설명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궁금해집니다. 물론 특별한 것은 아니겠지요.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아비담마란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쏟아난 게 아니고 부처님 가르침을 토대로 하여 그것을 수승한 안목으로 체계화하고 분석하여 설명한 것이겠는데 그러면 당연히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뿌리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답: 물론입니다. 먼저 네 가지를 말씀드리지요. 그것은 찟따(citta), 쩨따시까(cetasika), 루빠(ruupa), 닙바나(nibbaana)입니다. 한글과 한자로 옮기자면 마음(心), 마음부수(心所), 물질(色), 열반(涅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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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에 올린 글을 보면서.. 오히려 진제와 속제에 대해 애매해진 게 아닌가?.. 합니다..
농. 이구요.. 이런 자료를 찾아 올려 주신명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전에 이곳에서 진제와 속제에 대해 논쟁한 적이 있었지요?..
진속2제를 용수보살과 연결시켜 보게 되면..
용수보살님에게 진제란 空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속제란.. 아직 공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진리라 여겨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공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란.. 환멸문을 깨닫지 못한 유전문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곧 12연기법을 3세설로만 이해하는 게 그것이지요.
그리고 상대적 진리이니 절대적 진리이니 하는 말을 아무리 설명하고 들여다 보아야..
그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기는 매 한가지 입니다..^^
그것보다는..
유전문은 결국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이고..
환멸문은 어떻게 되는 건지를 잘 사유하는 게..
진제와 속제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봅니다..()..
사실 신도 사람이 만들었으므로 절대가 아닌 상대적 존재 이지요
기독교는 신은 절대라고 하는데
사람이 만든 그 많은 민족신들이 어째 절대적 존재가 될수 있나요?
명님 그런 게 아니라..
유전문은 무명이 있으면 6입처가 생겨 5온이 생긴다는 거지요.
이렇게 생긴 5온.. 우리는 5온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라 하는데.. 이 판단하고 살아가는 세계를
유전문 세계라 하며, 그 안에 존재하는 법(=진리)을 속제라 합니다.
그런데 12연기법에는 유전문만이 아닌 환멸문이 있지요.
환멸문이란 무명을 멸하니. 6입처가 멸해.. 5온이 실재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진제인 空이란 일반일들이 생각하는 그런 [절대]가 아닙니다.
명님이 말하는 절대는 속제에서 말하는 주장일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