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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떠나보내고, 떠나가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평생토록 자녀를 꼭 붙들고 놓지 못하는 부모들을 만납니다. 정말이지 답이 없습니다. 물론 자녀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극진한 사랑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사랑을 넘어 과도한 집착의 결과는 비참함입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십분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자녀가 무럭무럭 성장해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오로지 그 자녀만 바라보며, 그 자녀에게 올인하다보니 그 모습이 너무나 어색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상호 성장입니다.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부모의 마음 또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진리 한 가지,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 안아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때가 되어 떠나보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 사랑이 각별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공들여 교육시켜왔던 애제자들,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여겨왔던 제자들이었지만,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자, 칼같이 떠나보냅니다.
그때에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참으로 많은 의미가 함축된 세례자 요한의 선언입니다. ‘제자들아! 드디어 때가 왔다. 내가 너희들을 내 제자로 양성시킨 최종 목표가 이루어질 순간이다. 바로 저분이다. 따라가거라. 나는 괜찮으니 내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저분을 따라가라. 앞으로 저분을 스승으로 모시거라.’
애써 양성시킨 자신의 제자들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제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모든 사명을 120% 완수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아무런 미련도 아쉬움도 없습니다. 구세사의 주인공으로 점점 떠오르시는 예수님을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자신을 스스로 쇠락시키는 세례자 요한의 뒷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5년 다해 1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 미사
<누군가와의 만남이 천국이나 지옥이 되는 이유는?>
복음: 루카 1,26-3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모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겸손히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라고 응답하신 장면을 묵상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때 준비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깊은 교훈을 줍니다. 이를 통해 모든 관계가 계약에 기반하며, 그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상 그 만남이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의 뜻을 잘 따를 때, 부모를 만날 용기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자녀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부모를 만나는 것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고 느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는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이는 마치 우리가 하느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아 그분께 나아갈 용기를 잃는 것과 비슷합니다. 성경에서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는 장면이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후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고된 삶을 살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에사우의 은총을 빼앗은 것에 대한 부채를 갚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일하며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후 야곱은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에게 돌려주기 위해 수많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야뽁 강가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 씨름하며 축복을 구했습니다(창세 32,24-31).
야곱은 이러한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낮추고 에사우에게 나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에사우는 야곱을 용서하며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여기서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고, 야곱은 우리 자신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의 은총을 자신의 힘으로 얻으려 하지만, 결국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자비를 구해야만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에사우가 야곱에게 준 용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막상 그분을 만나는 상황이 되면 ‘양심’상 우리는 그분을 만나는 게 지옥처럼 느껴지기에 진짜 지옥을 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역시 성사와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 거룩한 계약입니다. 그러나 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은 평화를 잃고 만남은 지옥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의 무게로 인해 진정한 평화를 찾을 수 없다.”
야곱과 에사우의 만남은 단순히 형제간의 화해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양심을 깨끗이 하고 평화를 되찾는 여정을 상징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모든 것을 에사우 덕분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낮췄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총을 감사히 여기고, 겸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매년 1월 1일에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을 모시고 미사를 드리며 떡국을 대접합니다. 하지만 매년 그날이 다가오면 부담을 느낍니다. 주교님은 저에게 유학의 기회를 주셨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 저를 보호해 주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항상 그 은혜에 충분히 보답하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한 마음이 오히려 불안과 긴장을 낳아 실수하게 만듭니다.
올해가 지난해보다 조금 덜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본당에서 1년 동안 좋은 성과를 내고 그 결과를 주교님께 보여드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깨닫습니다. 주교님을 맞이할 준비는 그날 하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요. 이는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의 삶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언젠가 나아가야 할 빚진 자들입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그 빚을 갚아나가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날을 맞이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우리를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그분의 빛 앞에서 어둠이 된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겸손히 순종하며 매일 충실히 살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오늘부터 하느님의 은혜를 갚아나가는 삶을 시작합시다. 이는 하느님을 만나는 날, 그 만남이 지옥이 아니라 기쁨이 되게 할 것입니다. 아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35-42: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36절). 요한 세례자는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하면서,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메시아를 따르는(참조: 1,31.47-49) 참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표하고, 하느님께서 메시아에게 주신 공동체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된다(참조: 3,27.29). 두 제자가 따른다는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향한 첫걸음이며, 여기에 함께 지내는 일이 이어지는데, 단지 그날만이 아니라(39절), 그분과의 계속된 친교 안에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 “무엇을 찾느냐?”(38절). 우리는 여기서 그분께 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주님을 따르고 찾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찾아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여튼 그 제자들의 대답에는 예수님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의도가 담겨있다.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알기를 원한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와서 보아라.”(39절) 하셨고, 제자들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함께 지내면서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단지 오후, 네 시쯤이라고 상징적인 의미를 말한다. 이 시간은 제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음을, 예수님과의 친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제자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40절). 안드레아는 형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41절) 하면서 시몬을 예수께 데려간다. 예수께서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41-42절). 시몬도 그 친교로 들어가게 된다. 하느님께는 한 사람을 부르시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과 요한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만남이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이렇게 진정한 만남은 그것이 짧은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줄 수 있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체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사건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는 체험이다. 그렇게 주님을 만남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분 안에 함께 머무르는 삶이 되고 그분을 구체적으로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작년 8월, 동창 신부들과 은경축을 맞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사제 생활 25년을 피정하는 마음으로 함께하자고 해서 결코 빠질 수 없었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 기간 중의 본당 미사를 다른 신부들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월요일 새벽(새벽 출발 비행기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출국 수속 중인데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미사에 오시기로 했던 신부님께서 새벽 미사에 아직 도착하시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얼른 그 신부에게 전화하니, 죄송하다면서 곧 도착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날 오후에 부고를 받았습니다. 새벽 미사에 늦은 신부의 아버지께서 선종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미사 때문에 그 곁을 떠나 성당에 온 것이었습니다. 약간 늦었지만 말이지요. 그 신부에게 미안하기도(미사 부탁해서), 또 동시에 감사했습니다.
사제에게 미사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때로는 급한 일, 불가피한 일이 생겨도 미사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자리이고 힘든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위로와 힘을 받지만, 세상 기준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요즘 사제 부족으로 참 어렵습니다. 신학교 지원자도 줄고,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중간에 그만두는 학생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교구장 주교님께서 “지금 보좌신부가 부족한 것을 넘어서, 이제 나이 70을 넘어도 2~3개 본당을 맡아야 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없으면 주님의 큰 은총을 얻는 미사도 없지요. 세상 끝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면 당연히 사제가 필요합니다.
사제 부족은 우리의 신앙심과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자기를 기다리는 목자가 있으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과로로 돌아가셨습니다. 신자들이 열심히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때, 열심한 사제도 늘어나고 사제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많아질 것입니다.
이 모든 부족을 하느님께 채워달라고만 기도해야 할까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고, 해결해 주시면 우리로서는 너무나 편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먼저 직접 마음을 먹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면서, 모든 것을 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시급한 사제 부족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심에 대해 다시금 묵상할 수 있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오늘의 명언: 견소왈명(見小曰明) 작은 것의 의미를 볼 줄 알면 밝아진다(노자).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요한 1,41)
우리가 만난
메시아는
때로는
첫서리처럼
때로는
비처럼
때로는
천둥이나 번개처럼
때로는
첫눈처럼 다가왔네.
그분께서는
언제나 변함없이
큰나무처럼 든든하였고
침묵 속에서도
스치는 바람처럼
우리를 깨닫게 해주었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우리가 삶의 멘토를 찾고 스승을 찾는 이유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가서 직접 보기 위해서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자세
아주 작은 것에서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
하느님과 관계 맺는 법
일하고 먹고 쉬는 법
가난하고 아파하는 이웃들과 어떻게 연대하고 있는지
어떻게 웃고 어떻게 함께 아파하고 있는지
그 사람 안에 담긴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곧 삶의 지혜를 구하는 참된 자세입니다.
거기에 배움이 있고
거기에 삶의 지혜가 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곁에서 그 사람의 삶을 바라볼 때
우리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
생각으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배우려면 가서 직접 봐야 합니다.
한마음에 와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계신 아픈 그 곳
어둡지만 빛이 있는 그 곳으로 저도 가겠습니다.
*와서 보아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