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맞서 결기를 드러냈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결국 '독박'을 쓸 처지로 몰렸다. 백악관 충돌 이후 나흘 만인 4일(미국 시간, 시차 감안하면 우크라이나 등 유럽은 5일) 젤렌스키 대통령도 미국의 힘과 트럼프 대통령의 분노 앞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유럽 언론에서는 '젤렌스키 대통령 백기 투항'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예상했던 바다.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하려면 미국의 지원이 필수적인데, 믿을 만한 구석(일부 유럽 국가)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미국과 '손절'한다는 것은 애당초 상상하기 어렵다.
BBC 등 유럽 언론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달(2월) 28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 밴스 부통령과 말다툼한 뒤 유럽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 왔을 때만해도 여전히 낙관적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유럽 정상회의에서 그를 구원할 구체적인 방안 도출에 실패하고, 미국이 3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 등 군사 지원을 중단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유럽 긴급 정상회의에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상석(?)에 앉았다/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결정적인 한방은 역시 미국의 군사 정보 공유 중단 조치였다. 미국이 무기와 탄약, 군사 장비의 지원을 중단하더라도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그 효과를 실감하기까지는 적어도 몇달이 걸릴 수 있으나, 각종 위성 및 군사 정찰정보는 그렇지 않다. 즉각적으로 실전에 타격을 준다. 러시아군 후방 지휘부나 병참 기지 등에 대한 공격뿐만아니라 적의 공중 표적을 탐지하기 위한 방공 시스템을 가동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치명적 타격은 역시 미국의 정보공유 차단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미국 정보 파트와의 협력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군사 목표를 파악하고 공격하는데 필수적"이었다고 밝혔다.
위성 기반의 (군사) 감시·정찰(ISR)과 항공·전자(AEW), 정보 수집및 통신 분야의 능력은 미국이 단연 세계 최강이다. 민간 위성 기업들의 사진 자료도 쏠쏠하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트럼프 행정부의 정부효율화 위원회·도지 위원장)가 소유하는 위성 인터넷 통신망 '스타링크'는 우크라이나 최전선에서는 생명줄과 같다. 스타링크가 끊어지면 우크라이나군은 현대전의 핵심인 드론의 운용이 불가능하고, 포병과의 공격 조율도 물건너 간다. 유럽 국가의 지원으로 이 모든 것을 대체하기는 사실상 어렵다는 게 영국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판단이다.
그런 면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냉정한 현실 판단 하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항복 문서'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 타이밍은 시의적절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상/캡처, 우크라 대통령실
◇현실적인 판단 하에 손을 든 젤렌스키 대통령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5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 기사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공급을 중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전에는 거부했던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며 "백악관 충돌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후 '가능한 한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평화 협상에서 미국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취지의 글을 엑스(X)에 올리고, 영상 메시지도 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언제든지, 어떤 형식으로든 미국과 '광물 협정'에 서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영국 인디펜던트 등 유럽 언론들은 그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갈등을 수습하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굴욕을 감수했다' '백기 투항했다'고 평가했다. 영국 텔레그라프지는 꼭 집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유명 표명을 권고했고, 그가 이를 받아들였다"고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의회 연설을 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언행(유감 표명, SNS 포스팅등)은 미국의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킨 것으로 보인다는 게 스트라나.ua의 분석이다. 그가 미국 측의 공개 사과 요구에 따르지는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그의 유감 표명을 '중요한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세계 무대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평화 정착으로 가는 길에서 미국과 함께 일할 의지를 공손하게 표현한 행위 자체를 사과로 인정했을 수도 있다.
백악관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언쟁을 벌이는 젤렌스키-트럼프 대통령/러시아 매체 rbc 영상 캡처
하지만 미국이 아직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의 재개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두 차례 성명(엑스 포스팅과 동영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게 분명해졌다고 스트라나.ua는 짚었다.
뉴욕 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미국은 평화 협상과 광물 협정에 대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전향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이나 기타 주요 자원의 제공 금지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WSJ은 "우크라이나 측의 조치가 아직 부족하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평화 협상에 응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은 후에야 미국이 군사 지원을 재개할 것"으로 내다봤다.
◇우크라이나의 양보를 더 압박하는 미국의 의도는?
이같은 관측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과의 군사 정보 공유가 차단되자 서둘러 유감 표명에 나섰다는 미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Axios) 보도를 더하면 신빙성이 더욱 높아진다. 단순히 무기의 지원 중단만으로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악시오스에 따르면 마이크 왈츠 미 백악관국가안보 보좌관은 4일 "우크라이나 당국이 러시아와 협상에 동의하고 협상 날짜를 정할 때까지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과 정보 교환을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은 5일(현지 시간)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우리는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더 가까이 가져오기 위한 첫 번째 단계에 대한 계획을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첫 번째 계획이 이미 공개된 '국가 인프라에 대한 공습과 해상 공격을 우선 중단하자'는 휴전안과 동일한 것인지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 휴전안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계획이라면 미국과 러시아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달 간) 지상을 제외한 공중과 해상에서의 휴전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일 런던에서 열린 긴급 유렵 정상회담을 전후해 내놓은 구상이다. 스타머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 젤렌스키 대통령과 함께 내주 중 미국으로 날아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 휴전안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을 계획으로 알려졌다.
관건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 안을 수락할 지 여부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이 안에 대해 구체적인 평가를 내놓지 않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함께 만난 트럼프-마크롱-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여전히 대우크라 군사 지원및 정보 공유 중단 조치를 해제하지 않는 걸 보면, 마크롱-젤렌스키 대통령의 구상에 관심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우크라이나 측의 적극적인 자세다. 휴전한 뒤 선거(대선)를 치르고, 당선자로 하여금 평화 협정을 매듭짓게 하는 게 지금까지 드러난 미국의 평화 정착 시나리오다.
◇한달간 부분 휴전에 반대하는 러시아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5일 젤렌스키 대통령의 언행을 "긍정적으로 본다"면서 "문제는 누구와 (휴전 협상 테이블에) 앉느냐는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동안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1대1 협상을 거부했다. 먼저 미국-유럽과 협의한 뒤 '평화 원칙' 단일안을 만들어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낼 때에야 푸틴 대통령과 마주 않겠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가 전쟁 첫해(2022년)부터 푸틴 대통령과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법안을 마련한 이유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SNS를 통해 이 법안을 취소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뿐, 실제로 취소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또 있다.
뉴스루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젤렌스키 대통령의 첫 휴전안은 일방적으로 불리하니, 동의할 이유가 없다는 러시아 측의 여론이다. 러시아 유명 종군 기자 게르만 쿨리코프스키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안한 '평화를 향한 첫 걸음'은 미사일과 장거리 드론 공격, 공습을 중단하자는 것"이라며 "러시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를 바보로 보는 것 같다"고 불평한 뒤 "그가 휴전을 원하는 방식으로 공격을 계속해야 (항복) 문서에 서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왈츠 미 국가안보보좌관이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실장과 통화하고 러시아와의 협상 장소및 날짜를 논의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와 협상하기로 결정했다고 100% 확신하기는 너무 이르다. 협상 자체가 또 미국이 요구하는 휴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3년 전(2022년 3월) 튀르키예(터키) 러-우크라 이스탄불 협상도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
다만, 예르마크 실장이 5일 텔레그램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미국 협상팀이 곧 만나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향한 추가 단계를 논의하기로 했다는 발표에 기대를 걸 수 있다. 미-러가 수락하기 힘든 '첫 단계'를 넘어선 '다음 단계'를 논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도 시의 적절하게 푸틴과 젤렌스키, 트럼프 대통령 3자 회담의 장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푸틴-젤렌스키 대통령이 (벨라루스) 민스크든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든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있을까? 러시아와의 직접 협상을 금지한 우크라이나의 법령이 협상과 휴전으로 가는 길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워싱턴의 압박의 강도를 감안하면 이 정도는 금방 해결될 것이다.
진짜 문제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실직적인 선택이다. 어떤 희생도 감수하면서 러시아와의 협상에 응할지, 끝내 미국의 압박을 뿌리치고 기존의 방어선을 유지하려고 나설지 선택이다.
◇우크라이나의 또다른 고민 '광물 협정'
우크라이나는 미국과의 광물 협정에서도 양보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사진출처:gov.ua
키예프(키이우)의 고민은 이게 끝이 아니다. 백악관 충돌로 서명하지 못한 미-우크라 광물협정도 더 가혹한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미 CBS 뉴스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충돌 이후 우크라이나 '희토류' 거래의 조건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이 "워싱턴이 아직 우크라이나와 '광물 협정'에 서명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최근 며칠간 광물 문서에 서명할 준비가 되었다고 거듭 천명한 우크라이나 측의 '러브 콜'(구애)을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문구 수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베센트 장관을 통해 우크라이나에 제안한 첫 번째 합의안은 '우크라이나를 식민지 혹은 노예화하는' 내용(서방 언론 평가)이었다. 미국이 운영하는 기금이 5천억 달러에 이를 때까지 앞으로 개발할 우크라이나 광물자원의 수익 50%를 내놓도록 했다.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큰소리로 반발하며 서명을 거부했다. 그리고 수정된 문안으로 백악관에서 합의, 체결하고자 했다.
설전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광물 협정'을 재개할 뜻이 없다고 백악관 참모들에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난 4일 연방의회 연설에서는 입장을 바꿨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으로부터 광물 협정에 서명할 준비가 됐다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고 자랑했다. 또 러시아 쪽에서도 '평화를 위한 준비가 됐다'는 취지의 신호를 받았다면서 "이 상황이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당초 미국이 제시한 문안대로 광물협정에 서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스트라나.ua가 전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백악관 충돌이후 일부 전문가들이 우려한 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평화 협상과 광물 협정에서 이전보다 더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하는 '독박'에 '피박'까지 쓸 판이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