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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묵상글 ( 성 마티아 사도 축일, - 부족을 메꾸는. 등 )
** 10:35 반영억 신부님, 김명겸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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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부족을 메꾸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유다 이스카리옷 자리를 꼭 메꿔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빈자리를 다시 채워야 하는가?
빈자리로 남겨두면 안 되는가?
이런 생각을 저는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에 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요즘 제 주변에서
곧 수도원이나 재속 프란치스코회나 이사회 등에서
자리가 비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입니다.
불가피한 이유로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불가피한 경우는 그가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만두게 된 것이고,
그러니 하느님의 뜻과 부르심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고 이 경우,
우리는 그 자리를 메꿔야 하는데 오늘 마티아 사도의 선출처럼
합의가 아니라 기도로 선출하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뽑으시는 것이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서로의 뜻이 맞지 않아서,
또는 서로 맘이 맞지 않아서 그만두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인간들이니 그럴 수 있고,
맞지 않는 자체를 그리 문제 삼을 것 없습니다.
맞추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고 맞추지 않으려는 것이 더 문제이겠지요.
왜 맞추지 못할까?
왜 맞추지 않을까?
너에게 맞추기 싫기 때문이겠지요.
나에게 맞추길 바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맞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특히 하느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맞추는 것은 싫습니다.
내게 맞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이고 강요입니다.
그러니 서로 맞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그것도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하느님 사랑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고,
역시 초대교회 사도들 공동체처럼 빈자리를 채워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혼자서는 누구나 부족합니다.
부족할 뿐 아니라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니 부족을 들추는 공동체이거나 부족을 메꾸는 공동체이거나이고,
잘못을 비판하는 공동체이거나
혼자서는 잘못하는 것을 같이함으로써 잘 해내는 공동체이거나입니다.
부족을 탓하지 않고 보완하고,
서로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는.
그런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이루는 초대교회 사도 공동체이고,
오늘 우리가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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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뇌세포가 줄어들어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최근의 뇌과학에 의하면 이 통설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경세포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언제 어디서든 신경세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고, 기억을 조절하는 부위인 해마(새로운 기억을 잠시 저장할 뿐)의 신경세포만 그렇다나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신경세포 증식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꾸준한 학습으로 뇌를 자극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적당한 운동, 사교 모임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 등입니다. 여기서 피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그래서 대인 관계에 우위를 가질수록 신경세포 증식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반대로 대인 관계에서 우위를 가지지 못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신경세포 증식력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트레스 전혀 없는 삶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어야 해마의 신경세포가 활발해집니다.
자기 뇌 건강을 위해서도 누군가에 의해서 휘둘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는 신경 쓰고 굽실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는 항상 우위에 있어야 합니다. 즉, 상대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는 ‘나’가 아닌, 고유한 ‘나’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고유한 ‘나’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나’ 역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 존재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건강한 나를, 계속 성장하는 나를, 지금을 기쁘게 사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나 역시 하느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절대로 흔들리지도 또 과대한 스트레스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런 사랑을 받기 위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시고, 또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나, 그러나 동시에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를 줄여나가고, 대신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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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을 용서하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세라핌 미칼렌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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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였듯이, 친교의 ‘깊은 관계’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으로 맺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의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는 동시에, 우리를 깊은 친교를 이끕니다. 곧 하느님과의 거룩한 관계는 우리들의 서로의 관계를 ‘거룩한 관계’로 이끌어 갑니다. 곧 영의 열매를 ‘우리들 안에서’ 맺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사랑’은 친교의 영이 맺는 열매입니다(갈라 5,22-23,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라는 열매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1코린 13,8.13.). 그러니 사랑하면서 죽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곧 ‘스스로 접어버리지 않는 한’,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이 영원한 까닭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우리가 사랑할 때 신비롭게 당신과의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친구라는 은총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이토록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은 경쟁자이이거나 적이거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헐뜯고 비난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서라도 위해 주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모습을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것은 바로,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당신의 벗, 당신 것으로 뽑으셨습니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애와 호의를 입히셨습니다.
당신 진리를 가르치시고, 당신을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양식을 먹이셨습니다.
저는 끝없이 빗나가지만, 당신은 끝없이 충실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사랑의 소명을 살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하소서.
저의 전 존재, 전 생애가 당신의 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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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두를 다 주어라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3-25).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뽑은 사람을 인정해 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구애 없이 주님께서 선택하셔서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선언하셨고,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를 벗으로 삼으시고 친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말은 그 전에 이미 바칠 수 있는 것을 모두 바쳤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기를 하느님께 모두 내어 바치는 행위입니다. 진실하게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두를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하느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하고 이웃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며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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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안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날 성가대 회식이 있어서 저녁을 먹었는데 나오면서 놓고 온 것 같기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형제님의 차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성당 집무실에 놓고 온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집에 없으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탁자 위에 안경을 놓았는데 없었습니다. 냉장고도 열어보고, 싱크대에도 가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분의 안경을 쓰고 산보를 다녀온 후에 다시 찾아보니 안경이 소파 위에 얌전히 있었습니다. 소파 위에 있는 안경을 차에서 찾으면, 회식 장소에서 찾으면, 집무실에 찾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깜빡깜빡하는 것은 신호등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전을 되찾으면 여인이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양을 되찾으면 목자는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잃어버린 안경을 찾으니 예수님 말씀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예전에 읽었던 ‘어느 환자의 기도’를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예전에 박도식 신부님께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를 하였고, 마티아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 할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면 마티아 사도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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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가슴 치며 깨닫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말한 것을 스스로 살아내기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쉽습니다. 말할 때는 그렇게 살아낼 요량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렇지 못한 삶의 이중성을 경험하고 견디는 것은 지독하고 혹독한 형벌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2천 년 전 이 땅을 거니셨던 주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 모두를 그대로 사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이 표면적으로만이 아니라 속 깊은 곳에서 우리 존재를 건드리고 울리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하시고,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그대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이게 압권입니다.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벗이라 불러주시고 는 벗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랑하라 하시곤 그 사랑의 길을 번잡한 변명 하나 없이, 군더더기 붙이지 않고 걸어 내셨습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렇게 걸어갈 차례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처럼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 닮으려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그분 닮아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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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주님께 두는 우리에게….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
-시편 31,25-
힘내세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천천히 그리고 힘차기 걸어보세요.
태산만큼 높아 보였던 산도 넘을 것이고
끝없는 바다로 보였던 물줄기도 건널 것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에게 드립니다.
힘내세요.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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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여정(旅程), 사랑의 사도(使徒)
-기도와 섬김-
“다산, 어른의 하루; 날마다 새기는 다산의 인생 문장”에 따른 말씀이 참 유익합니다. 5월의 주제는 천륜지락(天倫之樂), “인연을 즐거워하라”라는 뜻인데 우리로 하면 하루하루 주어진 하느님의 뜻에 즐거이 순응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대로 성령에 따른 사랑의 삶이겠습니다. 분명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티아 사도는 물론 모든 사도의 삶이 사랑에 따른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즐거운 삶이었겠습니다. 이어 5월14일 오늘에 주는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어른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은 당당함이 되어야지 방종함이 되어서는 안된다.”<다산>
“어른은 스스로를 바르게 함으로써 만물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다.”<맹자>
역시 기막히게 좋은 말씀입니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없다는 오늘의 현실에 어른의 참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어른이야 말로 성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야 말로 어른중의 어른입니다. 날마다 만나는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도 금과옥조의 교훈이 됩니다. 어느 카톨릭 분파 지도자에게 주신 짧막한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일치는 의무이다(Unity is a duty).”
“분파가 되지 마라(Don’t become a sect).”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이들 모두가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교육기관 학생들과의 만남에서는 “지식은 포용적이 되어야 함(Knowledge must be inclusive)”을 강조했습니다.
이어 이태리 남부 해발 4170피트 산정상에 자리잡은 900년 전통의 수도승들을 만난 자리에서 수도승의 두 중요한 요소, “기도와 섬김(prayer and service)”과 연관하여, 수도승들에게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선물(a gift to God)’이 되고, ‘하느님의 선물이 될 것을(to be a gift of God)” 촉구했습니다.
비단 수도승뿐 아니라, 믿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람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매일 강론도 기도와 섬김의 열매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평생 삶은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으로 요약되며 평생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 배웠을 사도들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사도만 제외하고 모든 사도가 기도와 사랑의 절정인 사랑의 순교로 생을 마감했음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마티아가 배반자 유다 자리에 사도로 선출되는 극적인 장면늘 보여줍니다. 선출 과정중에서 베드로 수제자의 리더십이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결같이, 항구히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정주했던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것이며, 사필귀정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부활의 증인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이겠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마티아가 제비뽑기로 뽑혔으니 이 또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신비로운 섭리입니다. 부활의 증인, 얼마나 영예로운 칭호인지요! 바로 오늘 복음은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제가 주어집니다. 사랑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이 종합된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아버지의 사랑을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바로 당신 계명을 지키라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평생 배워도 부족한 예수님의 우리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되 제 좋을 대로의 내 중심의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이타적 아가페 사랑을 살라는 것입니다. 집착없는 초연한, 깨끗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 나누고 섬기는 사랑, 부요하고 행복하게 하는 사랑,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이런 아가페 사랑입니다.
부단히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 끝까지 신뢰하는 사랑입니다. 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도가 있어 이런 지칠줄 모르는 섬김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부족한 우리 사랑인지 참 부끄러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절정이 바로 사랑의 순교이겠고, 이미 살아서 사랑의 순교자되어 사는 이들이 진정 예수님의 제자로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도 우리에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얼마나 멋지고 영예롭고 자랑스런 우리의 품위인지요! 주님께 뽑힌자로 주님의 친구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부단히 맺는 삶이 바로 영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라 연장되는 나날입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마지막 남은 아쉬움은 더 사랑하지 못했음에 대한 아쉬움 하나 뿐이겠습니다. 시간되시면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대헌장 1코린토 13장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남을, 하늘에 쌓아두는 보물이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부단한 사랑의 실천과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도 함께 감을 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사랑의 사도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다시 한 번 평생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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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 벗>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어가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어가니
벗이 되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니
벗이다
서로
사랑하여
벗이 되어가니
벗이요
벗이니
벗이 되어가다
서로
사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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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사랑이 모든 행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표시라면, 사랑이 없을 경우, 영광스러운 은총의 선물들 - 더없이 숭고한 권능들과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믿음 자체와 계명들-의 가장 효과적인 작용도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몹시 두려워해야 합니다. … 사랑이 없다면 (법규들을 지키고 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또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은총의 놀라운 표징을 행하더라도) 그 일들은 부정한 행위로 여겨질 것입니다 ... 그것을 행한 이들의 목적이 자신의 뜻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쉬르만은 엑카르트가 사용한 멘스라는 용어를 지성이나 이성으로 번역하기보다는 영(spirit)이라는 말로 번역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가장 적당한 역어로 상상력(imagination)이라는 단어를 제안하고 싶다. 엑카르트가 상상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중세의 심리학에서 이마지나시오(imaginatio)라는 말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엑카르트는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것에 이름을 붙이는 불가능한 과제를 시도하는 가운데 창조성과 낳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본질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창조의 자궁은 이미지를 낳기도 하고, 그것을 버리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 창조의 자궁을 일컬어 상상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력이야말로 엑카르트가 말하고자 한 것에 가장 가까운 용어일 것이다.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우리의 능력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력에 필적할 만한 능력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낳는 것이야말로 우리네 자유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지를 낳을 때 어떤 것은 선택하고, 어떤 것은 내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이미지들은 불을 일으켜 우리 자신과 사회를 환히 밝힌다.(169)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사도들에게 타볼산의 체험을 하게 하신 당신을 흠숭하며 찬미하나이다. 이 체험은 그들에게 기쁨은 물론 당신을 따르려는 깊은 열망을 심어주었으며 특히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당신은 여기 저희와 함께 계시나이다. 저는 마음과 영혼을 다해 당신의 현존을 믿나이다. 저는 여전히 당신께 외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마라나타! 오소서,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오소서, 마음을 다해 당신을 환영하며 당신의 오심을 기뻐하나이다. 오소서 제 영혼과 온 존재가 당신께 들어높여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생명을 다해 당신을 그리워하며 부르짖나이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듯 제 몸과 영혼도 당신을 그리며 부르짖나이다.
0 오소서, 주 예수님, 마라나타!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52)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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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
어떤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는 일, 그가 맡았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임자와 늘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고, 자기 능력보다는 전임자의 공석으로 인해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는 부정적인 시선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유다를 대신해 사도의 자리를 메우게 된 마티아에게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15,16)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커다란 위안과 더불어 마음의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사도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바로 사도들과 더불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부터 함께 동행했고,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수님 파스카의 여정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이 부활의 증인인 사도로 뽑힌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은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사도들과 공동체는 함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마티아를 사도로 뽑아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습니다.” (1,26)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22,14) 고 말씀하신 주님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마티아를 사도로 직접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서, 공생활 처음부터 주님께서 승천하신 날까지 함께 한 마티아가 제비로 뽑혀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부활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참으로 크나큰 위로와 위안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부활 후 부인하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다시 뽑아 내세우심을 통해서 제자들은 불림과 뽑힘이 제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은총이며 호의라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다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처음 부르심과 같으면서 전혀 다른 부르심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표현처럼, 부르심의 외적인 면에서 같지만, 내적인 깨달음의 차원에서 전혀 다른 부르심입니다. 성령강림 이전의 사도들은 하느님의 일 보다 사람의 일을 중요시했으며, 이로 인한 부인과 배반을 통해 자신들의 나약함과 무력함의 체험을 하게 되고 부활하신 주님의 용서로 하느님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거듭남의 여정을 통해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사도 바오로가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1코1, 26~29) 라는 말씀을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부름을 받고 선택받은 사람은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1코31) 라는 사도 바로로의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은 목적이란 바로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파견된 존재이시듯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되는 조건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5.12) 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이 모든 것 보다 우선하고, 모든 일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다와 마티아의 차이는 바로 마티아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지만’ (15,10) 유다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았음에 있었습니다. 벗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하기보다 하느님 안에서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라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원하시는 것은 단지 아버지와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입니다. 부르신 분도 주님이시고 부르심의 궁극적인 근거도 바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아버지에게서 시작되었고 아버지 안에서 마침 되는 근원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이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려고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길 바라는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초대이며 부르심입니까?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달라는 주님의 이 당부가 그렇게도 부담스럽고 무리한 요구입니까?
이 사랑 안에 머물고 이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가르침(=계명)을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 머물고 이 사랑을 실천할 때 자연스럽게 사랑의 기쁨이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 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굳이 우리를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당부하신 까닭은 이 사랑의 실천이 우리 삶의 부활과 같고, 이 부활의 삶은 우리를 기쁨으로 넘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쁨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기에 솟아나는 존재적인 기쁨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살아갈 때 기쁨은 자연스럽게 넘치고 또 넘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듭 부활의 생명을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 무엇보다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마치 저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주춧돌처럼 항구하게 굳건하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갑시다. 주님의 선택 받음이 기쁘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받음이 기쁘지 아니합니까? 오늘 하루 이 기쁨을 만끽하고 기쁨을 전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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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제자들을 뽑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그것은 열매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혼자의 힘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열매를 목표로 제자들을 부르셨기에
열매를 맺어주시는 것도
예수님의 역할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예수님 혼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예수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
예를 들면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도
제자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고 이해하며 그 일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하는 역할들과
교회 안에서 하는 역할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그 일 역시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어주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힘으로
가능하지 않게 보이는 것들도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여기에서는 능력의 부족함이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이
어려움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내가 내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게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공동체가 살아갑니다.
높고 낮음의 관계가 아니라
모두가 형제자매로
서로 함께 만들어 갑니다.
각자의 역할을 하다보면
자신이 드러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일부러 드러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은
그 열매를 나만 가지려고 하면서
높고 낮음의 관계로 가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구가 됨을 의미합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기에
제자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감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스승님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스승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물면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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