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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에 이르는 길
창 17: 1-8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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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글자 그대로만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습니까?
학창시절에 운동장에서 달리기 경주를 위해서 선을 그어본 일이 있습니다. 횟가루를 담은 기구로 선을 그었습니다. 출발점에서 결승점까지 나름대로 똑바로 긋는다고 집중해서 선을 그었습니다.
도착해보니 선이 삐뚤빼뚤했습니다. 안되겠어서 긴 줄을 출발점에서 결승점까지 연결해 놓고 그 줄을 따라서 그었습니다. 제법 선이 바르게 그어졌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역시 선이 똑바르지는 않았습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마치 선을 똑바로 긋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선을 똑바로 그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힘만으로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도구를 사용해서 나름대로 똑바로 그을 수 있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면 똑바르지 않은 것처럼, 종교나 철학과 같은 것의 도움을 받으면 사람들이 볼 때 완전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고 그렇게 명령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도 무리하게 그렇게 명령하신 것일까요? 도대체 이 명령은 무슨 뜻일까요?
우선 문자적으로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완전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는 "타밈"(tamim)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결점이 없는”, “온전한”이란 뜻입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완전”이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소라는 예물이 완전하다고 할 때 그 소가 완벽한 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제물로서 결함이 없는 소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완전하다고 할 때 어떤 점에서 완전하다는 것을 말할까요?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에 완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는 완전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완전하라는 뜻입니다.
창 6:9은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를 완전한 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하다고 칭한 이유를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사실 노아는 윤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창 9:20 이하를 보면 노아가 술에 만취해서 실수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포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결실한 후에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대취했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고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뒷걸음칠 쳐서 들어가 하체를 덮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노아를 완전하다고 했을까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에 결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 6:22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방주를 지어라."라고 하실 때에 그대로 다 했다는 것입니다. 방주를 짓는데 무려 120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을 들어야 했습니다. 노아가 그 방주에 짐승들을 암수 종류대로 집어넣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먹어야 하는 양식을 골고루 싣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완전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결함없이 부족함 없이 그대로 다 준행한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명하신 것도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믿고 그대로 결함없이 부족함 없이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일찍이 그가 하란 땅에 있을 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나안 땅 헤브론에 들어왔을 때 다시 그 약속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런데 창 15:23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종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자 또 그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기 보다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아내의 여종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고 맙니다.
이제 또 13년의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시라고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결함없이 부족함없이 말씀하신 것 그대로 철저하게 완전하게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전은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지키는 말씀 순종에서의 완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에 있어서 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마음가짐의 완전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말의 완전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더구나 행함의 완전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지키는 말씀 순종의 완전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본문에 나오는 이 하나님과의 만남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행했습니다. 비록 인간관계 속에서 실수도 저지르고, 말의 실수도 있었고, 여러 가지 허물과 흠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지키는 일에는 흠도 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번부터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있었을까요?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기에 그토록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의식의 변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면서 과거와 다른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신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원래 아브람이라는 뜻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단지 한 가문의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달리 아브라함이라는 뜻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민족의 아버지요 여러 나라의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자기의 한 가문만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저 상속을 잘해서 가문의 대만을 이어가고자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종인 엘리에셀을 통해 상속하려 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몸종인 하갈의 몸에서 후손을 봐서 상속하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브라함은 민족을 생각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생각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단지 아들을 낳아 상속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요즘 아파트 이름을 보면 어렵고 또 깁니다. 타워팰리스, 미켈란쉐르빌, 하이페리온, 아카데미스위트, 캐슬모닝 등. 왜 이렇게 이름을 어렵고 길게 지었을까요? 주부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랍니다. 글쎄 시어머니들이 찾아오기 힘들게 하려고 그렇게 이름을 어렵고 길게 지었더니 분양이 잘 되더라나요.
웃자고 하는 소립니다. 이름을 어렵고 길게 지어서 나름대로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스럽고 품위있어 보이게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초등학교에 가보면 웃지 못할 장면이 벌어진답니다.
아이들이 어느 아파트 사냐고 묻는답니다. 그리고 좋은 아파트 사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논답니다. 그리고 어느 아파트는 주민들이 의기투합해서 아파트 이름을 바꿨답니다. 그랬더니 집값이 당장 뛰더라나요
그렇습니다. 이름이 중요합니다. 이름이 바뀌면 사람들의 의식이 바뀝니다. 한마디로 이름값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의식을 바꿔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름이 바뀌자 삶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살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브람처럼 나와 내 가족 내 가문만을 위해 살고자 하던 의식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처럼 민족과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중심의 삶 속에 머물러 있던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의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식을 바꿀 때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과거의 실패입니다. 그는 이미 두 차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었습니다. 과거의 두 차례의 실패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나 같은 것이 어떻게!”라는 생각 때문에 의식 변화를 이루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실패가 우리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나 같은 게 뭐!”라고 하며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이런 나이지만!”이라고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의식 변화를 가로막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나이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입니다.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너무도 늦은 나이입니다. 그저 과거를 회상하며 인생을 정리할 나이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나이 99세에 바꿔주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모세도 80에 새 삶을 시작했고, 아브라함은 99세이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해 지려면 우리의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어 새로운 의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듯이 새로운 의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삶의 변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면서 과거와 다른 또 하나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바로 할례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남성 성기의 포피를 베는 의식입니다. 이 포피를 베는 의식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하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 후손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구분되게 했던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이지만 이후로 태어나는 자손들은 구분된 약속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창 6: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존재들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이 된 인간들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완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영에 속한 자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세우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육신을 제거하는 상징적 예식으로 할례를 거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할례 받은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할례를 거행했다는 것은 그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육신을 따라 살던 삶이 변하여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삶에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꿈을 이루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꿈을 이루길 희망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꿈을 이루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작은 실천(micro-movement)입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장애우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 바니에”(Jean Vanier)이고, 그 공동체는 “라르슈” (L’Arche; 방주)입니다. 라르슈 공동체는 현재 30여 개국에 120개가 있어서 장애우들과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처음에 장 바니에가 우연히 두 명의 장애우를 만나 사랑으로 섬기고 도운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슨 거창한 꿈을 꾸지도 않았고 무슨 엄청난 사명선언문 같은 것 만들어 발표한 일도 없습니다. 그 작은 실천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서 돕는 사람들이 모이고 또 장애우들도 찾아오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작은 움직임(micro-movement), 작은 실천이 어떤 결과를 낼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작은 실천이 없이는 위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작은 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실천이 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의심하던 삶에서 순종하던 삶으로 변화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할례 이후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순종함으로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바치라는 상상할 수 없는 명령까지도 순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할 수 있게 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작은 순종의 실천이 큰 순종의 실천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작은 것이라도 그대로 순종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행하여 완전한 길로 나가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의식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장 작은 실천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장 할례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