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영결식,
대통령은 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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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 된 연평해전 영웅의 눈물
윤석열 정부가 가장 박한 평가를 받는 분야가 인사인데, 드물지만 호평을 받은 적도 있다.
지난해 12월 보훈부 차관 인사였다.
과장급인 현역 대령의 차관 임명 자체도 파격이었지만, 그 인물이 지난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총상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와중에도 현장에서 전사한 고(故) 윤영하 정장(당시 29세, 대위)의 지휘권을 이어받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희완(48·해사 54기) 당시 참수리 357정 부정장(중위)이었기에 더 화제였다.
참전용사이자 상이군인이 본인과 같은 국가 유공자를 챙기는 주무 부처의 차관이 됐다는 상징성이 컸다.
어릴 적부터 군인을 꿈꿨고, 북한 도발로 오른쪽 다리를 잃고서도 군복 벗을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 천상 군인인 이 차관을 보훈의 달을 살짝 넘긴 지난 9일 세종시 보훈부 청사 차관 집무실에서 만났다.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장애도 꺾지 못한 그의 군인정신과 2002년 6월 그날의 전우들, 그리고 당시 정부가 잘못 꿴 첫 단추 얘기를 들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 사투를 벌이다 84일 만에 전사한 박동혁 의무병(당시 21세) 대목에선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그는 부상 당한 전우 살피느라 정작 자신은 무려 총 2.65㎏의 파편이 나올 정도로 온몸에 총상을 입었지만, 당시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영결식을 외면했고 정부는 고작 3000만원을 나라 지킨 목숨값으로 지급했다.
살아남은 이 차관은 절단된 다리 외에도 1년 동안 국군수도병원에서 9번의 수술과 치료를 반복할 만큼 중상을 입었는데, 퇴원 후 만난 두 살 어린 지금의 아내가 장애에 대한 편견은커녕 "당신을 존경한다"며 결혼을 승낙한 사연은 감동 그 자체였다.
3시간 동안 들은 이 차관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에서 재구성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을 일. "
지난해 12월 대통령실에서 "오늘 퇴근 전까지 답을 달라"며 보훈부 차관 제안을 했을 때 맨 처음 든 생각이었다.
갑작스런 제안에 감정이 요동쳤다.
일단 다음날 출근 전까지 시간을 벌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평소 밤 10시쯤 퇴근했는데 이날은 오후 5시 30분 칼퇴근해 아내, 어머니, 장인 장모, 형님 두 분에게 의견을 구했다.
장인어른만 곧바로 "아따, 좋네"라는 반응이었고, 나머지는 조심스러웠다.
밤을 꼴딱 새운 후 결국 수락하기로 했다.
"어떻게 지켜낸 유니폼인데…. "
한 다리를 잃고서도 벗지 않은 군복을 당장 벗어야 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생뚱맞은 일이 아닌 나 같은 국가 유공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면 남은 8년(대령 계급정년 56세)이 아깝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가난한 집 삼 형제 중 막내, 심지어 초등학교 3학년 때 빚보증 잘못 선 부모님이 돈 벌러 도시(울산)로 떠난 후 5년 동안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컸다.
학원은커녕 참고서 살 돈도 없었지만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기가 죽지도 않았다.
오히려 "훌륭한 사람이 되자, 그러려면 당당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데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난 덕분이었다.
특히 5학년 때 담임인 이석원 과학 선생님이 정말 잘해주셨다.
집에 데려가 재워주고 먹여준 것은 물론 반장인 내가 각종 대회에 나가도록 도와주셨다.
경북 금릉군(김천시) 구성면 시골 공립학교(구성초)에 다니면서 영어 말하기 대회, 과학 경시대회, 테니스 대회 등을 나갔다.
고적대 악장도 했다.
강남에선 과학경시대회 하나 준비하느라 수백만 원도 쓴다는데, 난 돈 한 푼 안 들이고 선생님과 실험하며 김천시 대표로 나갔다.
지금도 그때 실험 과정이 전부 기억날 정도로 과학을 좋아했음에도 해사를 택한 건 어릴 적 강렬한 기억 때문이다.
연안 이(李)씨 집성촌에 살 적에 명절이면 지프 타고 들르던 먼 친척 육군 대령 아저씨가 그렇게 멋있었다.
고3 땐 해사 신입생 모집 홍보 영상에 등장한 잘 생긴 생도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해사 졸업 후 최전방 평택 2함대에 배치돼 고속정 참수리 357정을 탔다.
홍보 영상에서 본 낯익은 인물이 거기 있었다.
2002년 운명의 그 날을 함께한 고 윤영하 정장이었다.
영화 '연평해전'(2015)이 관객 600만명을 넘기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1998~2008)가 애써 지우려던 2002년 6월 29일 참혹했던 전투를 많은 이들이 알게 됐다. 기습 공격당한 후 25분 동안 북한의 포탄·총알 258발을 맞으면서도 윤영하 정장 이하 27명의 대원은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격퇴하고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지켜냈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윤 정장과 부사관 황도현·조천형·서후원이 전사했고, 참수리 357정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던 조타장 한상국은 41일만인 8월 9일 인양된 참수리 357정 조타실에서 조타키를 잡은 채 발견됐다.
2.65㎏의 파편을 제거하고도 뼛속에 파편 100여 개가 박힌 채 온몸에 22개 링거줄을 단 처참한 모습으로 나와 함께 중환자실에 있던 박동혁 수병도 26개월 현역병 제대를 9개월 앞둔 9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7월 1일, 8월 11일, 9월 22일 여섯 전우를 보내는 세 번의 영결식이 열렸다.
난 오른 다리가 잘린 채, 8㎝ 구멍이 난 왼 다리만은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농이 마르지 않는 상처 부위 소독을 그야말로 이 악물고 버텨내는 중이었다.
스물여섯 나이에 두 다리 모두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보다 3개월 동안 세 번의 영결식에 군 통수권자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전투 다음 날 서울공항을 통해 한일 월드컵 결승전 관람차 일본으로 출국했다.
공항 인근이었지만 전우들이 안치된 국군수도병원엔 들르지 않았고, 귀국할 때 잠시 일반병실에 들러 병문안했다.
심지어 가장 먼저 열린 4인 합동 영결식은 국방부 장관과 합참의장이 불참한 채 해군장으로 치뤄졌다.
야당인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이 문제 삼자 "관례상 장례위원장(해군 참모총장) 이상 고위급은 참석하지 않는다"는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내놨다.
또 신임 국정원 기조실장은 "김정일 책임은 없다"고 했고, 여권 인사들은 "패전" 운운했다.
국가를 위해 몸을 던져 NLL을 사수하고 국민 안전을 지켰는데.
중환자실에 있는 내게 울면서 전화한 대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혀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죽하면 이듬해 아들 제대 날 "왜 동혁이는 집에 오지 않느냐"며 목놓아 울었다는 박동혁 모친이 "주한 미 사령관은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지만 우리 정부는 전화·편지 한 통 없다"는 공개 편지를 썼을까.
헬기로 국군수도병원에 이송돼 7시간의 수술 후 첫 질문이 "군 생활 계속할 수 있느냐"였다.
나라 위해 복무한다는 자부심이 매우 컸기에 다리 하나 잃었다고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의가사 제대한 3명을 제외하곤 현역병·부사관 17명 모두 군에 복귀했다.
정부는 당시 간단히 "중경상"으로 발표했지만, 전사자 6명 외에 승선했던 전원이 손가락 절단, 소장 파열 등 총상을 입었고, 많은 대원 몸속엔 여전히 파편 수십 개가 박혀 있다.
나 역시 정수리에 1.3㎝ 파편이 남아 있다.
신체적 고통은 그날의 트라우마에다 국가의 형편없는 처우를 맞닥뜨린 정신적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월드컵 열기에 가려 국민적 관심도 적었지만, 휴전 중인 나라인데 전사자 예우 제도가 아예 없었다.
특히 햇볕정책 아래 금강산 관광 보조금 지급에 열 올리며 북한 눈치 보던 김대중 정부는 첫 단추를 완전히 잘못 끼웠다.
군 통수권자의 영결식 불참뿐만 아니라, 국방부는 서둘러 우연한 충돌이라는 식으로 '서해교전'이라 축소 명명했다.
또 군인연금법에 '전사자' 항목이 없다(2004년 개정)는 이유로 전사가 아닌 단순 공무상 사망자로 처리, 박동혁 의무병에겐 고작 3000만원을 지급했다.
계급이 가장 높은 윤영하 소령도 6500만원이 전부였다.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