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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4일(목)
* 시작 기도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 것을 압니다.
하여 주께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되 그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살후 3:2).
주님께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이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임을 압니다.
그들이 예수를 모르고 세상의 논리와 가치로 살아갈 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심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의 뜻에 대하여 언급하셨습니다.
(요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 영생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딛 1:2).
그 영생을 약속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으로 이 하루를 살기 원하오니 나에게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의 거룩한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되 나의 의로 사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부요하게 하소서.
주님이 주신 그 생명으로 하늘에 잇대어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갈 3:19-29
제목 :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나의 묵상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
그로 인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이 혼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의롭게 되는 것, 곧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의 복음임을 증명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율법의 한계성이다.
그들은 율법이 영원한 것인 줄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약속하신 자손 곧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19b)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히 9:10) 이런 것(첫 언약, 율법)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
이는 율법을 통해서 생명 곧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아들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마고 약속하신 유업 곧 영생을 주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다름 아니라 창세전 약속하신 복으로써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아들의 생명을 얻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생명은 율법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
그 생명을 얻은 자만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창세전 약속대로 유업 곧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하여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은 곧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구속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가 세례를 받고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옷, 곧 보혈의 옷을 입게 된다.
따라서 이제는 세상적 삶을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입은 자로써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자가 된 것이다.
아들의 생명 없이 무조건 하나님의 아들 된 삶을 살라고 강조한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삶이 아니라 생명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윤석열 대통령에게 아들이 있다 치자.
그 아들의 친구들에게 윤대통령을 아버지로 삼고 그의 아들로 살라고 한다고 해서 아들이 되고 또 아들처럼 살아지는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아들처럼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윤대통령의 양아들이 되는 입양이라도 되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이 세상은 입양이라는 제도를 통하여 양아들이 된다 할지라도 친아들과 같은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유명한 왕자와 거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왕의 아들인 왕자가 시골 동네를 지나다가 너무나 자유롭게 지내는 자기 또래의 거지 한 명을 보았다.
왕자는 그런 거지 아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그 거지 아들의 얼굴이 자기하고 똑같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그 거지에게 오늘부터 네가 왕자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거지니까 너와 나의 옷을 바꿔 입자고 하면서 옷을 바꿔 입었다.
그날부터 거지는 왕자가 살던 왕궁에서 살았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녀들이 세수하라고 물을 떠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궁궐 밖으로 달려 나가 흘러가는 냇물에 세수를 하는 것이다.
양치 할 수 있도록 다 준비했는데 칫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대충 손으로 하였다.
아침을 준비해놨는데 그 밥을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습관대로 손으로 먹는 것이 아닌가?
궁궐의 시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 “왕자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하는 거예요.” 하면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왕자가 된 거지는 소리를 꽥 지르면서 “나 왕자 안 해.” 하고 궁궐을 도망쳐 나왔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이다.
이는 아무리 겉으로 왕자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해도 그것은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일 뿐 생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나 역시 동일하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생명 곧 영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영생이란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만 알았던 나에게 끊임없이 들려지고 강조되는 말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된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삶을 강조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밖에 나가서 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았다.
그런데 나의 삶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삶이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곧잘 하면서도 사람들 앞이 아니면 거짓과 정욕 그리고 탐욕이 나를 지배하였다.
아들의 생명이 없는데 항상성(恒常性)을 가지고 그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의 신앙생활은 율법적인 삶이었다.
보이는 곳에서만 잘 하면 되었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면 되는 그런 삶이었다.
이런 나는 어려서만 아니라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어진 사역도 열심히 했지만 그것은 진짜 그 영혼들을 사랑해서라기보다 나의 열심을 드러내 보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로 인하여 사역의 열매도 많이 맺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열매를 하나님께서는 진짜 기뻐하셨을까, 돌이켜 보면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적인 나의 의와 나의 열심으로 행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고 나서야 복음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복음의 목적은 생명을 얻게 하는데 있다.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생명과 썩지 않는 것 곧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을 주셨다.
그런데 나는 이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삶에만 치중하였을 뿐이다.
게다가 성도들에게도 그것만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거지에게 맞지 않는 왕자의 옷을 입혔던 것이다.
아무 옷이나 입는다고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을 입어야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인 십자가 죽음,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연합할 때 결국 그 생명이 나의 것이 된다.
무엇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그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모두가 아담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담의 생명이란, 만들어진 생명으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죄의 본성인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서 아들의 생명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그저 나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 양 살아간다면 이는 다른 복음이요 다른 영이며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직 생명은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통하여 거듭나게 된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얻는 생명 곧 아들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것으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말씀 곧 복음 없이는 아들의 생명을 얻을 수가 없고 복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삶을 터치하신다.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데 날마다 우리가 말씀으로 묵상해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곧 말씀 그 자체이신 아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그의 옷 곧 보혈의 옷을 입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삶의 기본이요 근본이다.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나를 드러내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나는 없어지고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날 뿐이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삶을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 생명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아들의 생명이 있어도 육신의 생각과 그런 행동들이 순간순간 튀어나온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날마다 발을 씻는 회개이며 자기부인이다.
그 회개는 주의 보혈로 씻는 것이며 그 회개를 통하여 더욱 구원이 공고해지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나의 실체가 어떠한지를 분명히 알고 피조물의 자리인 죽은 흙이요 먼지와 티끌이라는 그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죽은 흙으로써 아들의 생명을 얻어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요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은혜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복음도 모르고 생명도 모르던 자가 어떻게 아들의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요?
그것이 창세전 약속이었음도 모르고 살았나이다.
창세전에 나를 택하셨다는 말씀은 수도 없이 들었으나 그것이 실재가 되지 않았고 그저 지식적, 관념적으로만 생각하였나이다.
이런 패역한 자 곧 나는 하나님을 나 잘 되게 해주는 우상으로만 섬겼을 뿐입니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 심판하셔서 무덤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을 통하여 주님의 뜻인 영생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이 복음이었음도 알게 되었나이다.
심판은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나에게 와서는 안 될 것으로만 여겼던 나를 살린 것은 곧 주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심판은 나를 죽이는 진멸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하는 징계였음을 깨닫게 하셨나이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담의 생명이 아닌 아들의 생명으로 시작하며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이 생명을 통하여 나에게서 풍겨나는 생명의 향기가 멀리멀리 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