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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주님, 그 깊디 깊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3:56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3:57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3:58 주님, 주님께서 내 원한을 풀어 주시고, 내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3:59 주님, 주님께서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보셨으니, 내게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3:60 주님께서는 나를 치려는 그들의 적개심과 음모를 아십니다.
3:61 주님, 주님께서는, 그들이 나를 두고 하는 모든 야유와 음모를 들으셨습니다.
3:62 내 원수들이 온종일 나를 헐뜯고 모함합니다.
3:63 그들은 앉으나 서나, 늘 나를 비난합니다.
3:64 주님, 그들이 저지른 일을 그대로 갚아 주십시오.
3:65 그들의 마음을 돌같이 하시고, 저주를 내려 주십시오.
3:66 진노로 그들을 뒤쫓아, 주님의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게 하여 주십시오."
◈ 주해
1. 하나님은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도록 예레미야를 치셨다.
1) 하나님은 이 흑암에서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자, 하나님에 대한 마지막 소망마저 끊어지고 절망한다.
[표준새]애 3: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 완전히 망했지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함으로 인하여 진멸되지 않음을 보니, 오히려 소망을 가지게 된다.
애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3) 그는 나의 기업이신 주님을 바라기로 한다.
4) 하나님의 본심, 즉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함을 알고, 나의 죄들 때문에 받는 벌이니 원망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
2. 예레미야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1) 하나님의 본심보다는 현실의 고난을 주목하는 백성에게는 주님이 진노하시며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2) 하나님이 “쓰레기와 폐물로 삼았다”고 여기기에 재활용 즉 회복을 기대하지 못한다.
3) 예레미야는 훈계나 정죄 대신에, 하나님이 그들을 살필 때까지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3. 흑암 가운데서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봄으로 다시 소망을 가지게 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는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하면서 그들을 위해 시내처럼 눈물을 흘린다.
1) 그리고 백성들의 억울함과 함께하면서 원수들을 멸하심으로 나(백성들)의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간구한다.
2) 절망 중에 있을 때는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쳤다고 했으나(3:8) 주님의 본심을 알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도움을 구하며 다시 부르짖는다.
3: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3: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4. 예레미야가 이전에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을 때 들으셨던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니 주의 귀를 가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한다.
3: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3: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1) 그 때에는 주께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고, 내 원통함을 풀어 주셨었다.
5. 하나님의 본심을 알자, 절망에서 벗어나 소망가운데서 믿음을 회복하고 과거에 기도에 응답했던 하나님께 지금의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기도한다.
3: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3: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1) 하나님은 이미 원수들이 내게 한 모욕과 비방을 들으셨으니 내가 자나 깨나 조롱거리가 되었음을 보아달라고 간구한다.
6. 하나님의 본심을 품은 예레미야는 비록 나의 죄들로 인한 심판이긴 하지만, 심판의 도구로서 거만하게 행한 원수들에게 저주를 내리고 멸하여 달라고 간구한다.
3: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3: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3: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1) 예레미야는 “거만한 마음을 주는 것”이 곧 저주를 받고, 진멸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2) 우리는 원수들이 거만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볼 때, 매우 화가 나면서 거만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원수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라고 기도한다.
3) 원수들이 더욱 거만해지고 교만해져야 그들의 패망은 빠르고, 그 진멸도 참혹하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4) 그러므로 원수들이 거만한 마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음을 보아야 한다.
7. 이렇게 애가서 3장은 66절의 긴 고백을 하나님을 향한 간구와 부르짖음으로 마친다.
1) 예레미야의 기도생활에는 변화가 있었다.
2) 선지자 시절,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을 때, 주님은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그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그의 생명을 속량하여 주셨다.
3) 하지만 멸망한 백성들과 연합된 예레미야가 되니, 하나님의 긍휼은 끊어졌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구해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물리치셨다.
3: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3: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 이로 인하여 여호와께 대한 소망마저 끊어졌다.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었고, 부르짖어 간구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힘도 없고, 간구할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다.
8.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과 나의 죄를 곰곰이 생각함으로 다시 소망이 회복되자, 주의 인자와 신실함을 다시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본심은 고생이 아니라 평안임을 다시 보게 된다.
1) 그러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선포할 힘과 용기가 생겼다.
2)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본심에 의지하여, 다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우리의 원통함을 풀어주시고, 원수에게 보복해 달라고 간구할 힘과 마음이 생겼다.
3) 즉 기도할 힘도 없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는 절망에서 하나님의 본심을 앎으로 다시 소망을 가지면서 이전에 응답하셨던 그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3장을 마친다.
4) 기도할 힘이 없을 때, 기도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과 우리의 죄를 곰곰이 생각함으로 먼저 소망을 회복해야 한다.
9.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자신들은 두려워 도망한 후에 “소망을 잃어버리고 기도할 힘”을 잃어 버렸다.
1) 주님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으로 자신에 관한 것을 가르침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셨고,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함으로 다시 믿음과 소망을 회복하게 해 주셨다.
2) 부활의 주님은 두려워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심으로, 도마를 만나 주심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다시 소망을 주셨다.
3) 그로 인하여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구하며 전심으로 기도에 힘쓸 수 있었다.
10. 애가 3장은 물론, 애가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이 기도에 응답했다는 내용은 없다.
1) 애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애가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헛된 것인가?
2) 아니다. 절망으로 인하여 기도하지 못하는 그 흑암에서 하나님이 다시 소망으로 인도하셔서 기도하게 하셨다면, 그 자체가 주님의 은혜요 응답이다.
11.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원수들이 진멸하여 기쁨이 충만한 것은 좋다.
1) 말씀 묵상을 통하여, 복음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하늘에 속한 기쁨을 누리고,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삶으로 나타난다면 감사한 일이다.
2) 그러나 주님이 돕지 않으시면 기도 자체를 할 수 없다. 묵상 자체를 할 수 없다. 예배 자체를 할 수 없다.
3) 여호와께 대한 소망이 끊어진 자에게 “기도, 묵상, 예배, 전도와 선교, 성도의 교제”를 해 보라고 하면 않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할 힘이 없다.”
12. 우리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인하여 소망이 끊어져야 마땅한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하사, 다시 기도하게 하시고, 다시 묵상하게 하시고, 다시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하셨다면, 그 자체로 주의 인자와 긍휼, 크신 신실함 안에 있는 것이다.
1) 애가를 부르는 예레미야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가 믿음의 선진으로서 애가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2) 절망을 넘어 소망 가운데서 기약 없는 응답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기도하는 이유는 아침마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새롭고, 그의 신실함이 크심을 믿기 때문이다.
3)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을 보고, 듣고, 간구함은 주의 크신 은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주님을 찬양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다.
13. 우리는 생각보다 “성공주의, 응답주의, 성취주의, 보란듯한 신앙”에 중독되어 있다.
1) 물론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를 증거한다.
2)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규정해서는 않된다.
3) 예레미야처럼 심판을 전하나, 듣는 자는 없고, 망해가는 백성들을 보다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파괴를 보는 신앙인의 여정도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 안에 있는 것이다.
4) 예레미야에게는 어떤 성공, 응답, 성취, 보란 듯한 것이 없다. 그는 성취를 이루지 못했고, 늘 거절당했다. 그가 그토록 막고 싶었던 성전 파괴를 목도하게 되었고, 눈물이 그치지 않는 애가를 부르는 자가 되었다. 그가 원치 않는 애굽에 가서 인생을 마치게 된다.
14. 성경은 이런 예레미야가 아브라함과 다윗, 다니엘처럼 믿음의 선진이요, 예수 생명에 참여한 자라고 하신다.
1) 슬픔 중에 기도하는 자, 절망 가운데 소망으로 나아오는 자, 응답이 없어도 기도하는 자,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예레미야가 격려하고 응원한다.
2) 사람들과 나 자신은 “이런 무익한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고 할 때, 예레미야는 “나는 평생동안 그렇게 했다”고 하면서 “나와 함께 하자”고 응원한다.
3) 예레미야는 자신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란듯하게 자랑할 것은 없지만, 그 길은 거절당하시고, 무력해 보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길이라고 응원한다.
◈ 나의 묵상
응답과 변화와 역사가 있는 간증은 역동적이다. 나도 청년 때는 역동적인 선교단체 간사님들의 간증과 말씀이 좋았다. 믿음 선교, 하나님이 역사하는 환경에 의도적으로 들어가서 믿음으로 사는 삶, 주님이 하시는 일은 참 놀라웠다. 주님이 재정을 공급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공동체를 세우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삶의 목적을 새롭게 하는 일에 참여한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부작용이 생겼다. 주님이 하신 일을 마치 나의 노력과 헌신으로 된 것처럼 여기는 착각과 함께, 하나님을 성공과 성취와 자아실현의 도구로 여기게 되는 율법주의와 세속주의가 들어왔다.
이와 달리 특별한 역사는 없지만, 잠잠히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을 나타내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여정은 고단했다.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은 있지만 예레미야처럼 무엇을 성취하거나 보란듯하거나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는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전통적인 신앙관으로는 부끄러운 신앙이다. 외적인 성취만이 아니라, 내적인 충만조차 없다니, 말하기도 부끄럽다. 부끄러운 시간의 유익도 있다. 조금씩 거만한 마음이 사라지고, 성공주의에 찌든 내 영혼을 보게 되고, 예레미야와 같은 사역자의 마음을 알게 된다. 점점 성공과 성취보다는 주님을 믿게 된 것이 감사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주님의 자녀된 것이 감사하다.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된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그 십자가를 품게 된다. 자격 없는 나를 부르신 주님의 인자를 알게 된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기고, 대단한 믿음의 역사와 불가능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야 한다고 여겼으나, 지금은 아들 안에 있던 생명을 얻은 것이 감사하고, 자격 없는 나를 용납하심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묵상의 효력이 강력하면 묵상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나 묵상의 효력이 있던 없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게 하시고, 기도가 응답이 되던 않되던 기도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다. 원래의 나라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의 신실한 사랑이 내 영혼을 붙들어 간다. 응답이 없어도 기도하게 하시고, 효력이 없어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그리고 애가를 통해서 격려하시고 응원해 주신다. 많은 선지자들이 예레미야와 같은 길을 걸었고, 주님의 십자가는 더욱 그러하다.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은 역사하는 믿음도 응원하지만 절망을 넘어 소망가운데 기도하는 자들, 애가를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도 응원한다.
내가 원하는 길은 아니지만, 주님의 뜻 안에서 주님을 부르고, 십자가 사랑으로 나아가며, 잠잠히 주님의 구원을 바란다. 이것이 좋다라고 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주의 인자와 긍휼은 언제나 일정한 빛처럼 비추어지고, 주의 신실하심이 참으로 크시다.
◈ 묵상 기도
주님,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과 역사와 성취가 있지만, 또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레미야처럼 성취와 성공이 없이, 주님의 마음으로 십자가에 참여했음을 봅니다. 선입견으로 주님과 믿음의 사람들을 규정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효력, 결과, 성과를 주목하는 시대지만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며, 기다리며, 복음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절망을 넘어 기도하게 하신 그 자체, 효력을 넘어 복음의 말씀을 묵상하게 하신 그 자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찬양받기 합당하시며, 주의 인자와 신실하심을 보게 하심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교회 생활을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주의 은혜요 영원한 일이요. 헛되지 않은 존귀함인 줄을 알게 하옵소서. 이미 주신 은혜로 감사하고, 은혜의 왕노릇으로 생명을 얻고, 이후로도 신실하게 인도하실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국내외 선교지를 축복합니다. 열매와 성취가 있음으로 감사하고, 또한 겨울 나무 시절을 보내도 감사하며 믿음으로 행하게 하옵소서. 성공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것,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본심을 품게 하옵소서. 선교원이 계속 할 수 있을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학당이 지속가능하며, 다음세대 선교를 할 수 있을지도 주님께 있습니다. 복생선교회, 비유의 문화사역, 상무백석교회도 주님의 개입과 은총으로 함께 하여 주십시오. 레바논이 전쟁으로 인하여 tnf와 많은 선교사님들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옵소서. 엘림센터 성도들, 특별히 룻과 다니엘라 가정을 돌보아 주십시오. 이스라엘, 네팔, 말레이시아, 남아공도 주님이 돌보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