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4: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4: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4: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4: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4: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4: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4: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4:10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 주해
1. 그동안 슬픈 애가를 불렀던 예레미야는 3장에서 터닝 포인트를 맞이한다.
1) 하나님은 흑암에서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고 무거운 족쇄를 채웠지만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자 오히려 소망이 생겼다.
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함으로 진멸되지 않았음이 깨달아지자,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웠다.
3) 그는 주님이 나의 기업이요 소망임을 고백하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기로 한다.
2. 우리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호소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쓰레기와 폐물로 삼았다”고 여기는 백성의 입장을 공감한다.
1)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그들을 살필 때까지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2) 절망했을 때는 “부르짖어 도움을 구해도 내 기도를 물리치고, 하나님이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한다”고 했으나 주님의 본심을 알자, 다시 부르짖어 기도한다.
3) 예레미야는 원수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어” 진멸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3.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다시 소망을 가지며,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지만, 예루살렘의 참상은 여전하다.
1) 소망이 곧 웃음이 된 것은 아니다. 이미 3장에서도 아침마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른다(3:48)”고 하였다.
4. 그러므로 백성들의 참상을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4: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4: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1) 순금과 같았던 보배로운 시온이 질항아리처럼 깨져 버린 것은 소망가운데서도 슬프다.
5. 언약 백성들의 처지가 들개와 타조만도 못하다.
1) 들개도 제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데, 백성들은 광야의 타조들처럼 무자비해졌다(3절).
2) 목이 말라 젖먹이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고 어린아이들은 빵을 달라고 구걸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지 않았다(4절).
3) 전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몸이 굳은 채 거리에 누워 있고, 전에는 화려한 옷만 몸에 걸치고 자란 아이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뒹구는 신세가 되었다(5절).
6. 죄악이 관영함으로 심판을 받은 대표적인 곳이 ‘소돔’이다.
1) 그런데 내 백성이 당한 형벌은 소돔이 당한 것보다 더 크다.
2) 소돔은 사람들이 손쓸 새가 없이 일순간에 망해버렸다(6절). 그런데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아주 천천히 모든 비참함을 경험하면서 죽어가는 자와 같다.
3)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다.
7. 비참한 백성들을 보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이전 영광이 자꾸만 떠오른다.
4: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4: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8. 오죽하면, 칼에 죽은 자들이 굶주려 죽은 사람보다 차라리 낫다고 말한다.
4: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4: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1) 칼에 죽는 것은 비극이다. 그러나 굶주림으로 점점 쇠약해져 가는 죽음은 더 비참하다.
2) 이렇게 죽음으로 끝났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기까지 하였다.
3) 그것도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는 일까지 일어나고 만다.
9.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나의 죄들로 인한 심판임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잠잠히 기다려도 힘든 일은 힘들고, 슬픈 일은 슬프다.
1) 예레미야는 우리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본심이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며,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을 아침마다 본다면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2) 예레미야의 영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소망을 회복했고, 주의 인자함 안에서 평안하다.
3)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현실과 막막한 현실, 과거에 비하면 너무나 처참한 비극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고 슬퍼한다.
4) 하나님은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신다.
10. 하나님의 생명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한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 우리 주님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11. 선지자는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진리만을 선포한다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예수님도 복음을 믿어 생명을 얻으라는 진리만 선포했다고 여길 수 있다.
1) 그런데 다수의 선지자들은 진리의 선포와 함께, 친히 이스라엘의 죄와 고난과 눈물에 동참하였다.
2) 예수님도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당하는 그 모든 슬픔, 아픔, 억울함, 고통, 시험에 모두 동참하셨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영적 고통, 마음의 고통, 몸의 고통이다.
12.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외치는 선지자의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른다.
1)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인생채찍과 막대기를 드신 하나님의 눈에도 그치지 않는 눈물이 흐른다.
2) 우리의 아픔을 모르시기에 심판의 복음을 전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심이 아니다.
3) 다 아시고, 친히 체휼하신 주님이 사랑으로 선포하는 복음이다.
13. 그러므로 긍휼 없는 진리를 주의해야 한다.
1) 진리를 핑계로 정죄하는 것은 하늘의 복음이 아니다.
롬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2) 그 눈에는 시내처럼 눈물이 흐르고, 심령이 상한 자로서 심판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3) 내가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남에게 그리해야 한다.
◈ 나의 묵상
다람쥐 챗바퀴 돌듯하는 애가가 참 좋다. 3장의 터닝포인트로 아름다운 결론을 맺지 않는 하나님은 인생과 역사를 아신다.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 아름다운 결론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은 동화다. 인생도, 신앙도 그렇지가 않다. 변한듯 하면 않 변하고, 답을 찾은 듯 하면 다시 모른다. 교회도 그렇다. 부흥이 오고, 세상이 달라진 것 같지만, 돌아보면 다시 타락했고,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이며, 신앙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 첫 사랑과 복음과 생명 얻음은 헛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우상이고 죽은 신이라면, 헛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현재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람쥐 챗바퀴 돌듯하는 인생을 향하 하나님은 항상 현재로 존재하시며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다. 도무지 변하지 못하는 나로 인하여 절망하지만, 전적으로 타락한 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그 은혜의 크기를 나타내신다.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알아가게 하신다. 첫사랑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 사랑과 은혜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보라고 하신다.
나의 죄가 깊음을 알수록, 그 죄를 눈과 같이 희게 하신 보혈의 깊이를 알게 된다. 나의 완악함의 높이를 알수록, 그런 나를 품으시고, 실패하지 않는 사랑, 즉 그분의 인자의 높이를 알게 된다. 다람쥐 챗바퀴 돌듯하는 애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공의는 점점 커지고 커진다.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고, 세 바퀴를 돌면서...비참한 나를 알아가고, 변함없는 주의 인자와 긍휼을 알아가게 된다.
우울증 환자의 고백 같은 애가를 통해서도 주의 인자와 긍휼, 생명 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슬픈 중에 회개하고, 다시 슬픔 중에 소망을 가지고, 다시 슬픔 중에 주의 긍휼을 본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한심해 한다. 이런 나를 헛되게 여긴다. 그러나 이런 나도 예레미야가 걸었던 그 여정을 따라간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비참함 중에서, 여기까지 함께하신 주님의 인자를 찬양하며, 이렇게까지 용납하시는 긍휼을 찬양한다.
진리를 핑계로 판단하고, 옳음을 근거로 정죄한 죄를 자백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심판과 눈물이 함께하고, 진노와 긍휼이 함께한다. 비판과 판단처럼 쉬운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님과 같은 비난과 판단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 그래서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회초리를 맞는다. 애통하시는 주님이 주는 쇠사슬의 멍에를 맨다. 심판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상하고, 그분의 눈에서 시내처럼 흐르는 눈물을 본다. 오직 진노의 심판만이 합당한 나를 위해 흘리시는 그 눈물과 상함과 긍휼을 받아들인다. 십자가의 주님이 나의 기업이요 나의 소망이다.
◈ 묵상 기도
주님, 저는 본능적으로 합리적인 비판과 분노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심판과 판단과 책망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저를 때리시는 회초리보다 주님의 눈을 주목하여 보게 하여 주십시오. 저를 향한 분노 이면에 있는 상한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기에, 예레미야보다 더 큰 슬픔과 고통으로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게 하옵소서. 나 홀로 있다고 여기면서 보낸 그 시간들, 그 고통들, 그 외로움, 그 헛된 맹세 속에 주님이 함께 하였음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이 항상 현재로, 깊이 동참하고 계셨음을 영원한 현재로 알게 하여 주십시오. 나를 지으신 주님, 나의 체질과 내 안에 있는 모든 무의식을 아시는 주님, 성령으로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주의 형상으로 빚어 주십시오. 주권자 주님, 전능하신 부활의 주님, 나의 체질과 무의식과 신경망을 모두 아시오니, 생명으로 채워 주십시오. 오늘도 주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아랍기도회 가운데 함께 하시고, 박선교사님과의 교제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십시오. 항상 현재로 함께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