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은 수륜면 마을 회관에 전도 연주를 갑니다.
할머니들에게 복음을 잘 증거 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갑니다.
오염된 영혼을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말씀을 받아 먹음으로 제 영혼에 빛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본문 주해)
12절 : 바울은 바리새파의 교육을 받고 자랐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율법으로 자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단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방인(갈라디아 교인)을 형제라고 부른다. 그는 율법 없는 이방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율법 없는 자가 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것은 복음을 위하여 유대인인 바울이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아무도 바울을 해롭게 하지 않았다.
13~14절 : 바울이 육체가 약하여졌기에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였다기보다는 바울에게 처음부터 육체의 약함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육체의 약함이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만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바울이 가지고 있을 질병이나 연약함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하였다는 것을 가지고 안질이라고도 하고, 말이 어눌했다고 간질이라고도 하기도 하며, 볼품 없는 외모도 그 중 한 가지라고도 한다.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바울 자신도 그것을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바울은 회심 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인 살인자였고, 게다가 사람들이 보면 시험에 들 만한 육체적인 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런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고, 더구나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던 것이다.
이는 복음이 사람의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능력임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15~16절 : “그 때의 여러분의 그 감격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그 때 여러분은 만일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나에게 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내가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나를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까?”(공동번역)
시험에 들 정도의 육체의 질병을 가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접한 그들이 거짓 선생들의 말을 듣고서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흔들리고 있으니 이들을 향하여 바울이 언성을 높이는 것이다.
아무 일한 것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 놀라운 복을 받아놓고서 지금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 와서 바울의 복음이 잘못된 것이고 인간의 행위가 가미 되어야 온전한 구원이며 복음이라는 말에 넘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의 복(감격)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에 복음을 전하여 믿었을 때는 눈이라도 빼주려고 하였다.
‘눈을 빼주는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말로 사용된 격언이다. 이를 반영하면, 바울의 말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바울에게 주었으며,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다’라는 뜻이다.
복음을 듣고 기뻐한 것,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의 복이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니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면서 바울을 원수처럼 대하려고 하는 것이다.
과거, 복음을 받아들인 감격이 참이었다면, 어떻게 그 복음을 전해준 사도와 원수가 되겠는가?
17~18절 :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을 이간시켜 다른 복음 전하는 자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이간질 시키는 것이기에 저주를 받으라고(1:8) 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좋은 뜻으로 성도들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복음)과 이간시켜 자신들을 따르도록 한 것이다. 즉 그들은 성도들을 독점하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하였다.
19~20절 : 이에 비해 바울이 열심을 내는 것은, 교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 수고(열심)를 다한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이 일에 관심이 없다. 그저 신자들을 자기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할 뿐이다.
바울은 이들을 경계시키며, 자신의 압도적 주장에서 한 발 물러서 ‘나의 자녀’라 부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마음을 표현한다.
“나의 자녀인 여러분,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내가 여러분과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여러분의 일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공동번역)
(나의 묵상)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했다.
그 연약함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충분한 시험거리가 될 만한 것이었지만, 눈이라도 빼줄 만큼 사랑이 컸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을 듣게 된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말해 준다.
좋은 목(회)자를 만나 복음으로 인도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과거에 인간적인 코드가 나와 너무도 잘 맞아떨어진 목사님께 열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 너무도 마음이 쓰라렸지만 그분과 더 이상 동행할 수 없음을 느꼈다.(언젠가 주님께서 그분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함께 복음으로 교제하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서형섭 목사님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되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감격한 것과 같다.
더구나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지 않는 모습, 자신을 좋게 생각하며 따르는 자들을 자기에게로 모으지 않고 늘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모습이 은혜가 되었다.
8년 가까이 설교를 들으며 묵상의 본문주해에 도움을 받았던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님도 그렇다.
목사님은 자신을, ‘예수님을 가리키는 때 묻은 손가락’이라고 종종 표현하신다.
‘때 묻은’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표현이다.(나도 그 ‘때 묻은 손가락’이길 원한다.)
나는 목회자는 아니지만, 복음을 전하고 생명의 삶을 전하는데 열심을 낸다.
과거에 나와 뜻이 맞는 이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이제는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품지 않는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그들 모두가 주님의 사람임을 너무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먼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기만을 원하고, 그런 그들과 함께 동역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또 나의 고질적인 연약함 때문에 그들이 시험받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헐뜯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을 이간질했다.
그것은 정확하게 그들을 복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
나도 이간질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생명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놓았으나, 나의 연약함을 보고 사탄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간질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 마음이 너무도 괴로웠다. 나의 연약함 때문이 그 지체가 생명에서 떨어져 나갈까봐....
오늘 안절부절못한다는 바울의 마음(20절)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또 내가 존경하는 목회자들을 은근히 험담하는 소리, 이간질하는 사탄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그럴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임을 잊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사람에게 열광하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열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위치가 바울의 입장이 될 수 있고, 또 갈라디아 교인의 입장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위치에 있든 예수님 안에서, 복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길을 달려가길 소망한다.
주님과 교제하는 이 시간은 나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아들의 나라를 누리게 한다.
(묵상 기도)
주님,
거짓 교사들의 이간질에 놀아나지 않도록
언제나 복음 안에서 정신 차리게 하옵소서.
나의 연약함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기 바라는 것처럼
다른 이의 연약함을 용납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옵소서.
오직 복음만을 따르게 되길 기도합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