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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 ─ 전자는 산서의 북방에 이는 후흐호트 지역을 출발하였고,
후자는 북경 북서쪽에 있는 현재 선화 근처의 상곡을 출발하였다.
위청은 고비를 가로질러서 현재 외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에 도착하였는데,
헤르만은 위청이 옹긴 강의 하류까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섬서의 함양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밞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르네 그루쎄 ─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中
원삭 6년 (BC123년) - 곽거병이 위청을 따라 두번 출격하여
곽거병 17살 본대에서 벗어나 기병 800기로 적을 수백리 뒤쫒고 2000명을 죽이고 포로로 붙잡음
흉노 선우의 할아버지 뻘인 자약후 산을 죽임
선우의 막내숙부인 나고비를 생포함
원수 2년(BC121년) - 1만군을 이끌고 오려산을 넘고 속복 부락을 치고,
곽거병 19살 육일 동안 싸우며 연기산을 넘고 천리를 행군해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죽임
혼야왕의 아들과 상국과 도위를 죽이고 8000여명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음
20살에 표기장군
원수2년(BC121년) - 북지에서 출격하여 거연수를 건너 기련산까지 나아감
흉노의 추도왕와 2500명을 사로잡고, 3만 2천명을 죽이고 사로잡음
다섯명의 왕과 그 왕들의 부모와 흉노의 연지와 왕자 53명과 상국과 장군과 도호 63명 사로잡음
원수2년(BC121년) - 황하를 건너 혼야왕을 항복시키고 8000여명을 목베고 10만명을 항복시킴
원수 4년(BC 119년) - 곽거병과 위청이 5만 군사를 이끌고 앞서고 그 뒤로 수십만 군대가 따라옴.
곽거병은 대군에서 나아가고 위청은 정양에서 나아감
위청이 선우의 군대를 공격하고 2만명을 목베고 사로잡음. 선우는 달아나게 됨.
사막과 강을 지나 흉노의 근신 장거를 사로잡음
흉노의 왕호 비거기를 주살함
둔두왕을 사로잡고 장군, 상국, 도위, 당호 83명을 사로잡음
흉노군을 공격해 7만 4천명을 죽이고 사로잡음
오르콘 강
쇠퇴기라 하지만 아직 분열되지도 않은 흉노가
정주민족의 기병대에 발려 적군이 자기땅을 1천리나 행군하는데 손도 대지 못하고
한나라 군대는 보급도 제대로 안되는 흉노 땅에서 연전연승하며 거창하게 하늘에 제사까지
그전까지 유목민족이 자주 쓰던 - 느린 적군을 안쪽까지 끌어와 몰살 한다는 상식이 뿌리부터 뒤바뀌어 버리고..
곽거병은 중국 역사상 가장 대단한 장군 중에 한명이자 싸우면 싸울때마다 이기는 천하무적의 선봉장이었습니다. 천재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세의 기린아 중에 한명이었죠.
곽거병이 태어났을때, 한나라는 내부의 힘이 절정에 달해있던 상태였습니다. 700년의 전국시대와 진나라의 폭정, 항우와 유방의 격돌로 벌어진 피폐해짐은 한문제라는 뛰어난 황제가 오랜 시간 다스리면서 그 상처를 아물게 했고, 내부 정치의 불안함은 한경제라는 황제가 오초칠국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서 일소, 한나라는 그 거대한 나라에서 완벽한 중앙 집권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한나라의 힘은 절정에 치달았고 내부의 저력과 사람들의 자신감도 충만했죠.
이때 황제가 된 사람이 한무제였습니다. 무제는 이제 이 힘을 외부로 돌리려고 하였는데, 이러한 의도에 의해서 조선이 멸망되고 명장 노박덕을 파견해 남월을 점령하고 9군을 설치, 베트남을 최초로 지배하는등 다방면으로 손을 뻗었는데, 이 모든것은 결국은 부가적인 일이고 가장 커다란 적은 북방의 흉노였습니다. 다른것은 흉노를 손보는 와중에 겸사겸사 혹은 횽노의 조력자를 없애기 위한것에 가까웠죠.
흉노가 가장 강성했을 시기의 영역이라는데, 실제적인 영토라기보단 동서남북으로 가장 많이 뻗어나갔을때 '영향력' 을 가르키는 것인듯 합니다.
흉노의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일대 전기가 된것은 묵돌 선우라는 영웅이 나서면서 부터였습니다. 묵돌은 아버지를 물리쳤고 흉노를 통합해 아시아 최초의 유목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서쪽의 월지를 격파하고 남쪽의 누번, 백양까지 접수, 진나라 명장 몽염에게 빼았겼던 땅을 모조리 회복했으며 북쪽으로는 혼유, 굴석, 정령, 격곤, 신려 5개국을 복속시켰습니다.
당시 중국은 항우와 유방이 격돌하여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고, 또한 유방은 국가의 초반 기틀 마련을 위해 위협이 될만한 뛰어난 무장들을 제거 혹은 소외시켰습니다. 결국 유방은 유인책에 넘어가 백등산에 포위 되어 굴욕적인 협상 끝에 빠져나왔고, 그 후로 흉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나라의 북방을 유린하였지만 한나라는 그저 꾹 참고 수비만을 하며, 역으로 군사를 끌고 나가는 것은 막았습니다.
이렇게 참고 있던지 거진 1세기, 급부상한 한나라는 어마어마한 힘을 바탕으로 복수에 나서려고 했고, 반대로 흉노는 서서히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전면전만 장장 40년간 이어지며 두 나라의 힘을 바닥까지 들어내는 대전쟁이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BC 130년, 한무제는 이광, 위청등 많은 장수들에게 군사를 주어 흉노를 공격했지만 모든 장수들이 대패하고 이광은 포로까지 되었다고 탈주했습니다. 도망친것은 위청밖에 없었지요. 견실한 장군인 위청은 그후로도 명장의 면모를 보여주며 흉노와의 전쟁에서 맹활약했지만, 그저 단순한 승리가 아닌 흉노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선 또 다른 타입의 지휘관이 필요했습니다.
한무제의 처조카가 되는 곽거병은 어린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곽거병의 이모가 되는 위자부는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기에 곽거병 역시 귀인으로 대접받았는데, 한무제 역시 이 어린 처조카를 상당히 아끼고 귀여워했습니다. 출신부터 엘리트 중의 엘리트 였던 곽거병은 오만하고 안하무인 격인 성격이 되었는데, 그에 반해서 활쏘기에 능하고 말을 타는데도 재주가 있어 무인으로서 자질이 있었습니다.
BC 123년, 곽거병은 드디어 첫번째 출전을 떠나게 됩니다. 위청을 따라 출진한 곽거병은 기병 800기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때 나이는 고작 18살에 불과하였습니다. 곽거병은 첫 출전에서 이 기병대로 본대를 무려 수백리나 이탈하는 폭주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보통 이런 경우에는 멋모르고 나섰다가 패전하는 경우가 많지만 곽거병은 달랐습니다. 2000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공을 세운 것이었죠. 더구나 흉노 선우와 할아버지 뻘 되는 자약후 산을 죽이고 선우의 막내숙부인 나고비를 사로잡기 까지 합니다. 그 공로로 관군후가 되었습니다.
곽거병은 오만하였던 만큼, 모든지 최고가 아니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부대 역시 따로 정예를 뽑았고, 기마대는 항상 최고의 말을 탔으며, 최고의 무장을 갖추고 막강한 훈련을 거친 한나라 군대 최정예를 자신의 부하로 삼았습니다. 이 정예 기병대는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BC 121년, 1만명을 이끌고 출진한 곽거병은 육일 동안 쉬지 않고 싸우며 전진하여 흉노의 절란왕과 노호왕을 죽이고, 혼야왕의 아들까지 참살하여 8000여명을 죽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말 그대로 추풍낙엽이었지요. 바로 그해 곽거병은 쉬지 않고 기련산까지 나아가서 3만 2천여명의 적을 참살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것이 더욱 대단한것은 곽거병은 태복 공손오와 같이 움직이기로 되어있었으나, 공손오가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혼자서 부대를 움직여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곽거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혼야왕을 항복시킨 곽거병은 8000여명을 죽이고 이번에는 무려 10만 명이 나 되는 포로까지 잡게됩니다. 이떄의 년도는 BC 121년이었습니다. 저 세가지의 대공이 단 한해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군부에 몸 담은지 3년, 곽거병은 만호후가 됩니다.
곽거병의 계속된 승리에 흉노 선우는 몹시 화를 냈으나, 이 젊은 장군의 돌진은 아군도 적도 아무도 막지 못했습니다. BC 119년, 한나라는 곽거병과 위청을 동시에 출격시킵니다. 상곡부근에서 출발한 곽거병의 군대는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계속 전진하였습니다. 그들이 행군한 거리는 1천리가 넘었고, 흉노의 왕호 비거기는 주살되었고, 80명이나 되는 흉노의 장군, 도위, 상국들은 반항 한번 못해보고 사로잡혔습니다. 흉노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은 7만 4천여명이 넘었으며, 곽거병의 군대는 단 한번의 보급도 없이 현지에서 적의 군량을 빼았아 밥을 먹으며 흉노의 영토 한복판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게 됩니다.
몽골 북부의 오르콘 강.
유목 민족들이 무서운 것은, 강력한 기마병이라는것도 있지만 그 기마병을 활용하는 기동력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영토로 느린 적들을 끌여들여 아무런 보급도, 지원도 기대할수 없는 상태에서 포위해 몰살시켰는데, 수많은 군대와 장군들이 이러한 작전에 희생당했습니다. 허나 곽거병은 1만 남짓한 군대로 오히려 먼저 황량한 사막과 모래바람이 부는 흉노의 땅 한복판에 자진해서 들어갔고, 눈깜짝할 사이에 흉노의 중심부까지 쳐들어왔고 다시 왔던대로 태연하게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지요.
돌아온 곽거병에 대해서, 모든 한나라 사람들은 그 놀라운 공에 합당할만큼의 사랑과 관심을 보냅니다. 하지만 24살이 되던 날, 어이없이 곽거병은 급사했습니다.
평소에 곽거병은 오만한 성미를 지녔고, 말 수도 별로 없고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었으며 자신의 출생 때문에 병사들의 어려움을 돌볼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지치고 힘들어하는데 대놓고 연회를 크게 벌이는가 하면, 남은 고기는 땅에 파묻거나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곽거병의 부하들과 주위 사람들은 그를 무도하다고 비웃기는 커녕 오히려 그 당당함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거의 악마와 같은 카리스마가 있었다는 이야기겠죠.
감숙성에 주취안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서 병사들과 쉬게 된 곽거병은 황제가 노고를 격려한다며 준 술을 받게 됩니다. 이때 곽거병은 밖으로 나가 강물에 술을 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황제께서 내려주신 술이니, 다 같이 먹도록 하자!"
이에 부하들은 감동하며 강물을 먹었다고 합니다.
싸움에 관해서도 곽거병은 오직 자기 방식대로만 싸웠습니다. 최정예의 병사로, 적 지휘부가 있는 중심지를 바로 노려 한방에 끝내버리는 식이었죠. 어느날 한무제가 오자병법을 이야기 하려고 하자 곽거병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지금 싸우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옛 병법을 읽힐 필요는 없습니다."
출처 : 삼갤 매그니토횽 글 퍼왔어요.
ps. 하지만 이 모든 승리의 카운터 한 방을 도로아미타불로 만든 이광리의 위엄.
첫댓글 ㄲㄲ
정작 야심차게(?) 퍼온 이 글은 댓글이 이렇게 없을 줄이야 흑흑흑 ㅠㅠ
베트남 지배한게 정말 사실?
사실입니다.
그럼 위촉오 당시 촉이 말하던 남만은 베트남인가요 아니면 운남 정도인가요?
운남정도 아니던가요??
삼국시기에 촉한이 정벌한 남만이 운남인 것은 맞습니다. 근데 [남만]이라는 의미는 좀더 광의의 의미로써 중국 남부의 이민족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입죠. 따라서 한무제 때 남월을 정복하고 설치한 '남월9군' 지역도 남만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은 한나라 이후 당대까지 무려 10세기 간 중국의 지배를 받고요...^^;
ㅎ자세한 정보 감사합니다 삼한갑부님.
곽거병, 위청은 다 거품이고 대 흉노전의 주역은 이광이라는 설이 있더군요. 보급도 제대로 못받는 이광이 오합지졸 수천으로 흉노군 주력을 어렵게 붙들고 있으면 위청 곽거병이 우회해서 흉노 본진을 털고 모든 영광을 가져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