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향의 도시 강릉 선교장 3
(한옥 체험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
록 나날이 발전되어 증축 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주택으로서 1965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되어 개인소유의 국가 문화재로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300여년동안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름다운 전통가옥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미를 활달하게 포용
하여 조화를 이루고 후덕한 인정미를 지닌 후손들이 지금까지 거주하는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따라서 한국의 유형 문화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뿐 아니라 강릉문화를 대표하며 경포 호수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에 전통문화 시범도시인 강릉시의 문화 관광 자원으로서 부각되었다.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점지 했다는 명당터인 선교장은 300여년전 안채 주옥을 시작으로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랑채, 중사랑, 행랑채, 사당들이 지어졌고 큰대문을 비롯한 12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대장원을 연상케 한다.
입구에는 인공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활래정(活來亭)이라 이름을 짖고 연못과 함께 경포호수의 경관을 바라보며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조선의 선비와 풍류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하었다. 만석꾼 곳간채에는 항상 곡식이 가득하여 흉년에는
창고를 열어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베푸는 집안의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하여 선교장 이라고 지어진 이름 이지만 그 호수는 논이 되었고
대장원의 뒤 야산에 노송의 숲과 활래정의 연꽃 그리고 멀리보이는 백두대간 사계절 변화의 모습을 바라보는 운치는 한국
제일이라고 하겠다. 2000년을 기해 한국 방송공사에서 20세기 한국 TOP 10을 선정할 때 한국 전통가옥 분야에서 한국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선교장 에서 연못을 지나 보이는 주옥 전경입니다.
인공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활래정이라 이름 지음
활래정 연못 내 작은 섬과 마당을 이어주는 목교의 모습입니다. 한국전쟁후 망가져 철거된 목교가 새롭게 복원되었습니다.
(이 사진은 옮겨온 사진임다)
회화나무가 봄을 준비하며 잔뜩 꽃망울을 만들고 있습니다.
- 활래정-
선교장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활래정(活來亭)입니다.
창덕궁 후원의 연못을 본떠서 만든 연못과 별당 겸 정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활래정은 순조 16년(1816년)에 이근우(李根宇)가 지었습니다. 정자는 연못 속에 네 개의 돌다리를 담그고 있어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입니다. 그 모습이 'ㄱ'자형이나 실은 두 개의 정자가 하나처럼 붙어 있습니다.
지금은 보수 중 이었습니다.
우물
주옥인 안채
한옥의 우아하고 멋스러움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고고한 우리 고유의 한옥은 우리가 자긍심을 같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문화 유산입니다.
뒤로 보이는 송림은 산책로로 이어졌습니다.
이곳은 선교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겨우살이의 준비로 이곳저곳에 쌓아둔 장작더미와 그외 농산물들의 더미가
현대의 산물인 색깔 입힌 비닐이 포장으로 덮여 있어 확연히 자연과 달리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자연을 손상시키는 이런 부산물들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는 할 지언정
많은 부작용을 낳는 것만을 틀림없습니다.
맨 뒤의 초가는 방앗간입니다. 만석꾼의 곡식을 이곳 방앗간에서 해결 했겠지요.
방앗간 뒷쪽입니다
뒷 채의 동산으로 오르는 산책로엔 오죽과 송림이 우거져 있습니다
만고 풍상을 겪은~~
고택과 함께한 소나무의 위용
오죽이 뒤곁에 즐비합니다
사당으로 오르는 곳인데 이 초가는 아마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해 와서
다시 정리하는 찬방이나 부엌 같습니다.
한옥의 수려한 멋, 대단했습니다
어느 한 곳도 빈틈이 없는 우리 건축의 미를 보여줍니다.
지붕과 지붕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풍경이 묘미를 자아냅니다.
집안이 미로 같이 동선이 모두 연결되어 계속 돌아보면 다시 그 자리로 올 수도 있습니다
뒤 안의 굴뚝입니다. 굴뚝도 얼마나 예술적입니까?
방에 불을 때는 아궁이(마룻장 아래에 있다)
숨바꼭질을 한다면 숨을 장소가 너무 많아 못 찾을 것 같습니다.
그 옛날의 이댁의 아이들은 참으로 재미 있었을 것이다 라고
엉뚱한 상상을 해 봅니다.
앞으로는 담장의 역할도 하는 행랑채가 있고 왼쪽은 중사랑채 뒷곁입니다.
각 집 채를 연결하는 작은 문, 역시 솟을 대문으로 멋을 부렸습니다.
이 곳도 아궁이
한옥에 서양의 테라스 그런대로 멋스럽습니다
중 사랑채
연지당
안채와 사랑채 사이를 구획하는 벽돌담장과 출입문이 있어서
당시의 철저한 남녀유별 풍속을 보는 듯 합니다.
가장 안 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행랑채
이곳은 행랑채입니다. 행랑채는 집 둘레를 돌아가며 담장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을 바깥 행랑채라 하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는 행랑채를 중 행랑채라 한답니다.
지금은 한옥 체험관으로 손님들이 투숙도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시종들이 기거했겠죠~~
옛날 부잣집 대단하지요?
서양의 장원과 같이 분류하면 될까요?
고성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러나 아담하고 그윽하며 단아한 멋이 있는 우리 한옥만의
특성이 잘 담겨진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분들의 품성이 느껴지기도 하는~~
|
첫댓글 내 나라에 이런 작은 문화재가 있다는 것이 큰 자랑이예요. 노르웨이를 갔더니 선조들이 맨 해적질 만 하고 살어서 문화재를 찾아 볼수 없었어요. 사진 잘 보았습니다
하하, 토끼님 재밋습니다. 선조들이 해적질만 해서 문화재가 없다.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나 한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군요.
그 나라의 문화가 조상들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볼 수 있게 되는군요.
우리 나라는 정말 좋은 곳이 많아요. 덕분에 또 강능 문화재에 빠져 봅니다요.
정말이예요. 우리의 문화를 먼저 알고 나서 남의 문화를 알아가는 것도 중요한것 같습니다. 소금님 잘 내려 가셨지요?
소금의집은 잘 있겠지요?
고풍스런 한국의 경관과 깊은 운치, 감상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부지런한 미소님, 참으로 우리 옛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 느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오죽헌 부근에 있나요..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지요섬세한 한옥의 아름다움도,회화나무 둥근우물도 멋지네요..사진도 물론 근사합니다
네 오죽헌 부근이예요. 오죽헌에서 차로 10분 정도 옮겼던 것 같습니다. 집이기 전에 대 저택 수준이지요.
바다를 낀 동산이 있고 넓은 대지에 갖출 것은 다 갖춘 그야말로 꿈에서나 소망할 것 같은 집이었지요.
좋은 곳에 다녀 오셨군요. 한옥의 단아하고 우아한 멋을뻑 느껴 보았습니다.
아주 멋집니다.
네 맞아요. 한옥의 장점을 다 집약한 아주 멋진 곳이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문화의 자긍심도 우러나게 하는 그런 곳이었지요.
우리네 한옥은 보고만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집이 사람을 압도하지도 않으면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져요
네 뚱님 말처럼 편안하게 하는 ..그러나 보통 서민들의 집처럼 처마나 지붕이 낮지가 않은 그 시대의 집으로서는 조금은 장대하고 웅장함을라요. 안동의 소수서원 같은 곳은 이런 부잣집들과는 정말 느낌이 랐답니다. 오늘도 학교 생활 겁게 하세염
느끼게 하는 그런 모습이었지요. 우리나라 곳곳에 옛날 갑부들의 이런 웅장한 한옥들이 지방마다 있더군요. 그러나 그 안에 살아온 사람들에
따라 그 느낌이 조금씩
뚱님, 재원이랑 학교 다니기 얼마나 분망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