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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인생의 유일한 답
□ 본문 : 요한복음 7:37-39절
오늘 하나님 앞에 나온 여러분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할 때에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7일 동안 제사장들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성전까지 행진하여 성전 제단에 부었습니다. 광야생활 중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신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7일 동안의 초막절이 끝나고 8일째 되는 날에는 성회로 모였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은 바로 이 날을 가리킵니다.
이 날에 예수님께서 성회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께서 초막절 끝 날에 이 말씀을 외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셨던 물을 낸 반석이 바로 예수님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예수님은 생수를 주시는 반석입니다. 단지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생수가 아니라,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생수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물은 말 그대로 육신의 갈증만 해결해 줄 수 있지 영혼의 갈증은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왜 허무합니까? 왜 평안이 없습니까? 큰 부자는 아니어도 유명한 사람은 아니어도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대단한 성공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실 물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살 집이 있는데도,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목이 마릅니까? 왜 우리는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영혼이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혼의 목마름은 어떻게 채워질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목마른 인생의 유일한 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마시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 목마름은 절대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목마름을 육신의 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목마름을 느껴야 합니다. 목마름은 내 영혼에, 내 인생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병이 무섭습니까? 증상이 없는 병입니다. 몸은 죽어가고 있는데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 언제부터인가 식사를 하고 나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식후에 늘 사이다를 마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며느리가 물었습니다. ‘어머니, 왜 그렇게 사이다를 마시세요?’
‘글쎄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 밥을 먹고 나면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사이다를 마시면 속히 시원하고 좀 내려가는 것 같다.’
‘어머니 그러지 말고 병원에 한 번 가보세요.’
‘아픈데도 없는데 무슨 병원이냐? 단지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되는 것뿐인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검사라도 한 번 해보세요.’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위암말기였습니다. 너무 늦어서 수술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암이 생겼을 때 견딜 수 없이 아팠다면 곧장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조기에 암을 발견했을 것이고, 그렇게까지 늦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느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몸에서는 암이 자라나고 있는데,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만큼 커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다가 통증을 느껴서 병원에 가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치료시기를 놓친 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마음이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특별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불안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허전하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는데도 외롭고, 있을 만큼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 같고 …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혼의 목마름을 느낄 때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만족을 얻습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혼의 목마름을 세상의 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로, 세상 성공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람들과 교제하며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하고, 육신의 쾌락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물로는 절대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영혼은 더욱 목마르고 황폐해질 뿐입니다.
※ 몇 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우연히 어느 쇼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의 메인 게스트가 20여년 만에 다시 가요계에 복귀하는 여가수였습니다.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그동안 무대가 그립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여가수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너무 그리웠다고, 밤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볼 때마다 무대의 조명이 생각나서 가슴이 설레었다고 말입니다.
20여년만의 공백을 깨고 새롭게 도전하는 용기가 대단했습니다.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얼마나 연습을 했겠습니까? 그것도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 여가수는 다시 무대에 서는 순간, 육의 목마름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무대에 섰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다시 무대에 섰을 때 마치 세상을 다 얻는 것 같은 기쁨이 있었겠지만, 그것이 영혼의 목마름까지 해결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것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녀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허무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인기를 얻으면 얻을수록 그 허무함을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그 무엇도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목마른 인생의 유일한 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영혼의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명절 끝 날에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이 있습니까?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습니다. 참 평안과 만족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신의 만족을 영혼의 만족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목마름을 느낄 때마다 쉬지 않고 육신의 물을 마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진정한 만족을,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모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의 이성이 말합니다. ‘죽으면 끝이야.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 요즘처럼 과학이 발달한 세상에 천국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괜히 그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인생을 즐겨.’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외면하고 영혼의 목마름을 무시하며 살다가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 모든 사람은 두려워 떱니다. 육신이 쇠약해지면 세상의 물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일 수 없습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의 이성은 더 이상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죽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정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혹시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면 과연 나는 어디에 갈 것인가?’
그래서 영혼의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이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의 목마름이 해결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를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모든 인생은 죄와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참된 평안과 만족을 얻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목마른 인생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목마른 인생의 유일한 답은 예수님입니다.
이 시간 예배당에 모인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수의 강이 되시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어도 영혼의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목마름과 전혀 다른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느끼는 목마름은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하는 목마름입니다. 예수님을 더 경험하고 싶은 목마름입니다. ‘あなたは’라는 일본어 찬양이 있습니다.
あなたを 愛しています / もっと深く 知りたい
あなたに 代わるものはない / もっと近く 感じたい
主よ あなたは 私の道 / 義の太陽 なぐさめ
希望の光 揺るがぬ土台 / あなたは永遠とわに 我が全て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더 느끼고 싶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목마름입니다. 이 목마름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이 목마름이 우리를 아름답게 합니다. 이 목마름이 우리를 풍성하게 합니다. 이 목마름이 우리를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만하게 합니다. 이것을 거룩한 목마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와 같은 거룩한 영혼의 목마름을 육적인 것으로 해결하려는 유혹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육신의 본성을, 육신의 편안함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인 수고보다 사람들을 만나 즐기는 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더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거룩한 목마름을 세상의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과 같은 목마른 인생이 됩니다. 어쩌면 그 목마름이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생수의 강이 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우리가 곤고하고 허무한 인생을 사는 것은 세상의 물을 마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도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임재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한 젊은 수도사가 나이 많은 원장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 명상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젊은 수도사의 말을 듣고 있던 원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바로 자네 안에 계시다네.” 젊은 수도사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아니 제 안에 계시다니요? 그런데 왜 저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원장이 술 취한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네는 술 취한 사람이 왜 자기 집을 못 찾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지 아는가? 술에 취했기 때문이네.” 그러면서 원장이 말합니다. “무엇이 너를 취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게.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취해 있지 않아야 한다네. 취한 것으로부터 깨어야, 그래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네.”
성도 여러분, 무엇에 취해있습니까? 세상 물에 취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실 수 없습니다. 취해있을 때는 모르지만, 깨고 나면 더 큰 목마름이 몰려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마시지 못하도록 여러분을 취하게 하는 세상 물을 정리하십시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갈급함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없고, 예수님의 임재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갈망이 사라진지 이미 오래입니다. 예배에 대한 사모함도 없습니다. 그냥 왔다갔다하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아무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시는 성령님의 탄식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향한 목마름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의 기대감도 없고,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말입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는 전인격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과 욕망까지 포함됩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말합니다. 우리의 존재근원을 말합니다. 그곳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생수는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정결하게 씻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까? 마음이 완악합니까?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완악한 마음을 제거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내 힘으로 내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죄의 권세가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용서의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낙심하고 정죄하고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상황을 만나면 우리 안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옵니다. 그러면서 상처받은 자아가 소리칩니다. ‘용서도 한 두 번이지, 내가 몇 번이나 참고 용서해야해!’ 하고 말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처가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십니다. 성령님은 능히 상한 마음을 만지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쓴 뿌리를 성령의 불로 태워주십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까? 말씀대로 살기 원하지만 자꾸만 육신의 정욕에 무너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낙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실까?’ 의심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노력으로는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육신의 정욕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도 생수의 강이 흘러야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자들은 누구든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내가 목마릅니다.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정결하게 씻어주시고, 나를 영접하여 주소서.’ 그러면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성령님께서 고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한 가지만 더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강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영혼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나 혼자 마시고 나 혼자 새로워지는 것이라면, 생수만 주셔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수가 아니라 생수의 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획은 단지 나 혼자만이 아닙니다. 나를 고치시고 나를 살리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는 것은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수의 강을 주시는 것은 나를 통해 세상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생수의 강이 일으키는 역사를 잘 보여주는 곳이 에스겔 47장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처음에는 발목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무릎에 이르고, 그 다음에는 허리에 이르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됩니다.(5) 그리고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고기가 심히 많아지고, 이 강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9)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의 강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교회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 성령충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현재형입니다. 계속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을 구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나 혼자 만족하고 나 혼자 변화되고 나 혼자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 가정이 살아나고, 나를 통해 교회가 변화되고, 나를 통해 이 나라가 살아나고, 나를 통해 열방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이 시간 목마른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살리시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