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다페스트=오윤희 특파원
예술이 생활이 된 나라 헝가리 문화 현장 르포
'오페라 티켓 생일선물' 학생들끼리 주고받아
1인당 月3만원 문화소비… 장애인 무료입장 등 지원
미술관 5년에 1번꼴 가는 한국과 대조 이뤄
20일 오후 7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국립 오페라하우스 홀 맨 뒤쪽 1층 날개 좌석에서 주부 바르줘 일로나(Varga ·57)가 은행원 남편과 함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공연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로 약 1시간을 달려서 왔다는 이 부부가 앉은 곳은 우리 돈으로 4만원대의 3등급 좌석이었다. 그녀는 "세계적 안무가인 보리스 아이프만(Eifman)이 안무한 발레니까, 이 정도 수고는 당연하다"며 설레는 표정이었다. 오페라하우스는 이날도 만원이었다. 팔짱 낀 노부부와 검은색 이브닝드레스로 멋 낸 젊은 여성들 사이로 터틀넥 스웨터에 빛바랜 바지를 입은 학생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바르줘씨는 매년 서너 차례 발레나 오페라를 보고, 매달 한 번꼴로 음악회에 간다.고교생 빅토리아(17)는 곧 17번째 생일을 맞는 친구 가브리엘라에게 주는 선물로, 함께 관람을 왔다. "용돈을 아끼면 오늘 좌석(1인당 약 2만4000원가량) 정도는 구할 수 있어요." 주부 바르줘나 고교생 빅토리아는 헝가리에선 평범한, '문화 애호가'들이다. 헝가리의 1인당 국민소득(2007년 기준)은 1만5500여 달러로 우리보다 낮지만, 일반인들의 문화생활 수준은 우리보다 높다.
헝가리인들이 연간 오페라·발레·미술 전시회 등의 관람에 쓰는 돈은 2007년에 5만5000여 포린트(약 35만원)였다. 매달 3만원 이상씩 문화 활동에 투자한다는 얘기다.
한편 한국 정부가 작년에 발표한 ‘2008년 문화 향유 실태 조사’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한국인의 연간 문화예술행사 관람 횟수는 평균 4.88회. 이 중에서 영화 관람(연 4회)이 문화 활동의 대부분이었다. 영화관을 빼고 한국인이 미술 전시회를 찾은 횟수는 연간 0.2회다. 무용 관람 횟수는 0.03회다. 평균적인 한국인이 5년에 한 번꼴로 미술관에 가고, 무용 공연은 30년에 한 번꼴로만 찾는다는 얘기다.
평일인 이날 오전 부다페스트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보티첼리 특별전시회’를 꽉 채운 인파도 평균적인 헝가리인들의 이런 문화 열기를 증명했다. 가보르 크리스타(Gabor·48)와 친구도 각각 장애인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뒤에서 밀면서 그림을 구경했다. “티켓은 1인당 3200포린트(약 2만원)라 조금 부담스럽지만, 장애인은 무료이고요. 무엇보다 우리 넷은 모두 그림을 좋아해요.”
- ▲ 2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발레 공연‘카라마조프가(家)의 형제들’1막이 끝난 뒤 휴식시간의 모습.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토대로 한 이날 발레 공연은 빈자리 없이 만원을 기록했다./부다페스트=오윤희 특파원
◆자판기 커피보다 약간 비싼 좌석
헝가리는 우리보다 소득은 낮지만, 물가는 엇비슷하다. 그런데도 국민이 다양한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는 비결 중 하나는 ‘저렴한 공연 가격’이다.
부다페스트 국립 오페라하우스에서 국립 오페라단이 이달 말 상연하는 ‘나비부인’은 최고 석이 1만6000포린트(약 10만원) 정도다. 지난 3월 서울시오페라단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나비부인의 VIP석 가격 25만원의 절반 수준이다.
헝가리 국립 오페라하우스 좌석 등급은 공연에 따라 7~8가지이고, 같은 등급에서도
위치에 따라 가격대가 다시 4~5가지로 나뉜다. 중간급은 5000 ~7000포린트(약 3만3000~4만5000원), 가장 싼 것은 300~400포린트짜리(약 2000원대)도 있다. 100포린트 내외인 자판기 커피 한 잔보다 조금 더 비쌀 뿐이다. 서울에서는 가장 가격이 싼 오페라 좌석도 3만원대다. 저렴한 가격 덕택에 공연장을 찾는 시민도 많아 다음 달 내내 열리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지난 17일 이미 전 좌석이 매진됐다.
‘공짜’도 많다.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부다페스트 복합문화공간 괴되르(Godor)에 가니 입구에 11월 공연 일정이 붙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기타리스트 콘서트, 인디밴드 공연, 추상미술품 전시 등이 잡혀 있다. 우리 돈으로 대략 1만원 정도 되는 입장료를 내는 공연이 절반, 입장료가 없는 공연이 절반이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헝가리 문화 프로그램은 양도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이달만 해도 부다페스트의 ‘국립 미술관’ ‘응용 미술 전시관’ 등 30여개 크고 작은 미술관·박물관에선 50여 가지가 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소규모 레스토랑이나 바에서도 정기 공연이 열린다. 17일 저녁 부다페스트의 유대 음식점 쾰레베스(Koleves)에선 4인조 재즈 밴드의 음악회가 열렸다. 이 레스토랑은 매주 화요일 ‘재즈의 날’마다 연주회를 연다. 입장료는 우리 돈으로 3000~6000원. 친구들과 함께 온 대학생 벤스 하틀은 “대학생은 300포린트만 내면 모든 공연을 볼 수 있는 곳도 있어서 최근 2~3달간 매주 1회씩 공연을 보러 갔다”고 말했다.
◆문턱을 낮춘 예술 교육
20일 오후 2시. 부다페스트 현대미술관에선 도슨트(docent·박물관 안내인)가 그림을 무료로 설명하는 ‘가이드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미술관은 평일 두 차례씩 1회 1시간 동안 가이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도슨트인 론 슈미츠(Ron)씨가 19세기 전시관에 걸린 화가 모네의 풍경화 한점을 가리키며, 프로그램 참가자 7명에게 “바다 색깔이 어떻지요?”라고 물었다. 한 명이 머뭇거리며 “짙은 푸른색, 옅은 푸른색, 하늘색으로 조금씩 달라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와 하늘이 이어지는 경계 부분도 마찬가지지요.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색채의 변화를 미묘하게 표현한 것이 인상파 화풍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문화 기관 스스로 앞장서서 ‘상류층만 예술을 즐긴다’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노력한 것도 누구나가 문화를 즐기도록 돕는 데 한몫했다. 정부 역시 내년 1월부터 이제까지 영화 티켓 판매 등에 부과하던 문화세(cultural tax)를 없애고, 로또 수익금 90%를 문화 기금으로 충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