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11일 금요일 청천
라운영 편지가 온 날
금일도 평소와 다름없으나 제수씨 큰집 고추 심으로 가시고 아부지 가게를 지키고
나는 편지를 정리 하다니까 우동장께서 도지사님께 주진교 교량건설 확정에 감사편지를 보내려고 초안
을 해 달라고 오셔서 그동안 회신 온 것 보낸 것 등등
모든 서류 참고하여 하라고 갖다 주셔서 살펴보았다.
오전 오후 인사장를 쓰노라 시간을 보내고 휴식을 조금 취한 후에
물건 정리 하시라고 아버지께 얘기 드리고
오늘 석식은 라면으로 간단히 때우고 제수씨한태 재종형님 도장을 좀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동생이 서류 복잡하여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오후 재종형님 경운기 타이어 주부 갈아 넣으려고 오셨다가 들려 가신 후
경주식당 아저씨도 오셨다 가시고 경주식당 대지 30평인데 육백 준다고 하는데 팔백주면 판다고 한다.
집대지 토지 투기가 일어서 예상외로 집과 땅 값이 많이 올랐다.
오늘 저녁에는 티비 조금 보다가 잠이 들어떤 모양이다.
봉화 나운영 군이 팜프렛을 받아 본후 수기집이 나오며 한권 보내 달라하고
진심으로 성원을 보낸다는 편지를 받아서 인천 족조님 다음 두 번째로 온 편지 고맙고 반가웠다.
이 모든 가엾은 우리 장애 환우들에게
어떻게 하면 제불의 가피를 얻어서 이고득락을 얻을 수 있게 하나?
다녀와서 모두 답장을 해 주리라.
지장보살 지장보살
5월 12일 토요일 청천.
김정희 편지가 왔다.
우휘철 동장 어제 부탁한 도지사님께 감사편지 초안 써둔 것을 드렸다.
내가 쓴 것이 기초다.
기상후 세수 하다니 백부께서 신범철 결혼식 가신다고 오셨다 가시고 조반 한후 점방물건을 아버지 내 놓으시고 책을 보고 있다니 편지 한통을 던져 놓아서 보니까 김정희 편지 였다.
고마웠다. 수기 집에 성원을 보내 주었다. 세 번째였다.
자세한 소식을 주어 고마웠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간기능 예방 침을 놓은 후 쑥뜸을 뜨고 백부 다녀오시다 들려 막걸리 한병 사 오시어 먹은 후에 가시고 가게를 보며 금강을 읽었다.
제수씨 날 놀리시는 건지 책을 읽다니 문밖에 와서 확 하고 뭐해요? 하여 난 누군가 하고 돌아보니 제수씨다. 난 누구시라고 했다.
저녁 모인 돈 가져가시라니 들어오시어 나 배가 너무 나와따며 왜 그래요? 하여
잘 먹어서 살이 쪄서 그래요. 하고 또 조금 있다 티비 보러 들어오시어 아부지 아로나민 골드 한통을 사오시어 잡수시는데 이거 피로 회복제인데 뭐 하로 사니껴 하신다.
술을 잡수시니 그것 피로회복도 되고 영양제와 입맛 돌아온다고 해서 사왔지요 뭐 한 후
소주 한잔하고 오늘 아우한태 농가 부채 탕감 33만원 서류 준비 되었으니 농협에 가서 서환 하고 오라고주고 선례는 보건소에 가서 내 약을 찾아 다 주었다.
이렇게 하루 지나갔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마하살
5월13일 일요일 청천.
랑시인께서 전화로 개막식 때 인사 말씀을 편지 두장 정도 작성하여 오라고 하신다.
다시 두 번째 일간 스포츠 신문에 기사 크게 났다고 사가지고 보라고하셨다.
조반이 끝나고 제수씨 안동 물건 하로 가신 후
별로 하는 일 없이 염불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방도 보며 애들하고 놀았는데 제수씨 한시 넘어 일찍 오시어 중식을 차려 주어서 먹고 수지침을 놓고 오후 방청소를 하고 신명희 동생 신종구와 종덕이 오환이 왔다 가고 신발을 씻어놓고 저녁을 먹고 대조사 열반대제 모두 몇 명이 가게 될지 확인하고 돈을 내일부터 받들려고 얘기 해보니 사람이 여러 명이 터졌다.
종형수 안호사형댁 종덕이모 일이 생겨 못 간다 하여 도저히 11명을 체워 갈수도 없고 취소해야 할 것 같아서 사형하고 상의하니 어쩔 수 없다.
취소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되어 전화로 얘기 알려 주고 조금 있다니 인천에서 전화가 오고 경주 사징께서도 전화해 주셨다.
인사말씀을 어떻게 써야할지 초안을 정리하고 한시까지 쓰다가 내일 다시 쓰기로 하고 취침은 한시 넘어 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5월14일 월요일 운 비천.
바라밀 전시회 인사말씀 문안을 종일 작성 하였다.
어제 밤 꿈속에 김종필의원과 손을 잡고 대화를 해 보며 시국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어 보였다.
1시 반이 넘어 취침 했더니 7시경 박목수 어른이 오시었다.
들마루를 짜 가지고 오시어 문은 다시 고쳐 와야 한다며 가지고 가신 후 제수씨 아부지 치우고 들마루 들 라서 어서 물건을 올려놓은 것을 정리하고 조반을 먹기전 용계아제 한태 과원 약을 처야 한다고 문의 하니까 벌써 장에 오셨다 하였다.
조금 있다니 삼촌이 장에 오셔서 시목이 저금을 찾았다.
56,640원이였다.
1550원어치 주비를 쓰고 가신 후에 숙모도 왔다가고 재종형님도 오시어 도장을 모두 돌려 드리고 가신 뒤에 어제 밤에 인천에서 인사 말씀을 써 오라고 하여 머리를 짜내어 저녁까지 모두 쓴 후에 중식을 하고는 박목수 어른 문을 다 짜 오시어 점방에 모두 달았으며 잠그는 것도 4군데 모두다 손을 봐서 고쳐주고 옆집과 집안에 집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자재 드는 것을 제 가지고 자재가 준비되면 서울 같다 와서 하기로 하였으며 과원약도 동생이 먼저 서울 갔다가 19일 집에 와서 치기로 하였다.
덕남이 조모 오셔서 소주 한잔 하시고 가신 후 석식이 끝나고 서울 무정차 시간을 알아 가지고 서울 부름에 전화 안태원군에게 도움을 달라고 전화를 했더니 출발 시간 때 다시 전화를 주고 올라오면 협조한다고 했다.
내일 모래면 인천까지 갈 예정인데 감회가 새로우며 벌써 한달전부터 전시회가 차질 없이 잘 되기를 바라며 지장염불을 하면서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 기다려왔다.
부처님이시여 이번 행사가 잘 되도록 가피력을 내려주소서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5월15일 화요일 청천.
이발도 하고 인천에서 전화도 왔다
오늘 기상시간이 늦어 조반이 들어왔다.
7시반경 제수씨 고추 심어 주로 가시고 가게 아부지 보시다 들어오신 후 정리 하고 쓸어 낸 후 이발하고 장춘이발에 까지 아부지 밀어주시어 갔다.
문앞에서 김성철사형이 우휘덕씨와 들어 주어 쉽게 들어갔다.
이발사도 인심도 좋고 오늘 서비스가 아주 좋아 기분이 좋았다.
한참 놀다니까 박위중 어른이 마침 오셔서 저를 약방까지 좀 데려다 주시렵니까? 하니
데려다 주신다 하여 함께 가서 피로회복제 아로나민 골드 일백정을 일만원에 피부약 삼천원 이렇게 사 가지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신 후에 가셨다.
정말 고마우셨다.
집에 와서 휠체를 다시 깨끗하게 씻은 후에 머리도 다시 감았다.
발도 씻은 후 내일 인천까지 갈 준비를 벌써부터 신발을 싸 놓고 옷을 무엇을 입고 갈까 준비해 놓고 손꼽아 기다리며 모든 일이 잘 되고 뜻대로 풀려 나가기를 바라면서 지장염불을 하며 가게도 보고 이렇게 하다보니 벌써 갈 날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인천 선생님께서 내일 올수 있도록 준비가 되었는지 휠체 꼭 가지고 올라오라고 신신 당부 하신다.
대답이 신통찮게 들리셨는지 왜 올라오기 싫은가 힘들어도 올라와서 구경하고 가도록 하란다.
내가 누구처럼 기쁘다고 좋아하고 괴롭다고 슬퍼하고 좋으나 나쁘나 그때 그 마음을 중도의 생활을 하고 싶다. 하루하루 준비를 한후 어제는 쓸 줄도 모르는 인사말 까지 써놓고 차도 개인택시 맞춰놓고 서울도 마중 나와 준다고 출발할 때 전하 하라고 하였다.
신실이가 와서 빗목으로 맨 빗자루를 두 자루 얻어 주었다.
다림에 전화하여 친우를 물으니까 연락처를 모른다 하며 알 수 없다고 했다.
놀러 오셔 달라하니 대답이 없었다.
어제는 잠실 본전다방 최영자 누나는 전화를 하였던 모양이다.
교양과 예의도 없으며 무슨 전화를 그렇게 하는지 괘씸했다고 한다.
석식을 먹고 정리해 놓고 오늘 일과를 맞췄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마하살 부처님이시여 먼 길에 무사히 잘 다녀서 대성황리에 저가 인사말씀은 잘 할 수 있도록 큰 용기와 힘을 주세요?
지장보살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선례가 아버지 서울 가면 보고 싶어 어째노하여 사진 책을 보아라 하고
기성이는 몇밤 자고 오는데 아버지?
열 밤 자고 올게 하고 말 잘 듣고 과자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잘 놀아라고
할아버지 하고 당부 한후 오늘 취침을 했다.
5월16일 수요일 청천
서울 경유 인천까지 랑승만 선생님 집에 도착
7시 기침을 하여 조반을 한후에 백부 고추 묘종을 가지고 오셨다.
모든 준비를 해 놓아서 정홍이 택시도 시간 맞춰와 주어서 백부와 동생 나 함께 타고 안동 도착 9시40분이였다.
10시10분차는 고장이 나 결행이라 하여 11시차로 온다고 차표를 끊어놓고 중식을 때우고 차에 앉아서 동생이 잡고 올라갔다 기사도 좋은 분이고 앞 자석에 앉아서 서울 행 버스는 처음으로 타고 풍산을 거쳐 예천 용궁 문경 재를 넘어 넓은 들을 지나 차창 밖을 내다보니 새로운 풍경 같았다.
음성에서 고속으로 달리는데 시속 120k 로 달렸다.
예천에서 탄 할머니 네 옆에 앉아 오다가 호수 옆 휴게소에서 한 15분 휴식을 하고 오는데 할머니 한태 인사를 하고 여쭈었더니 빵을 한봉과 야쿠르트 두병이나 먹으라고 주신다.
목마르던 때에 정말 잘 얻어먹었다.
할머니 감사히 잘 먹었다 인사하니 또 주신다.
사양하고 할머니는 성남에 내려야 하는데 성남에서 모두 내리는데 할머니 내리세요? 하니 아직 더 가서 내려야 한다고 하여 나는 초행이고 잘 몰라 그런가 보다 하고 오다가 기사님께 여쭈어 봤다.
이 할머니 성남에 내린다 한다는데 어다서 또 세우냐고 하니 세우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도 전화번호 없이 손녀딸이 마중 나오기를 했다며 어떻게 하나 차는 가야하고 할머니는 차에 짐을 넣어 두셨고 다행히 기사님 한 코스 와서 차를 세워주고 내려 드린 후에 왔다.
내가 얘기 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서울까지 올 뻔 하였다.
성남시에서부터 서울까지는 별로 구분도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안동서 안태원군과 부름에 전화에 두군데나 오후 3시반 까지 도착 안동에서 11시 출발한다고 전화해 놓았더니 차에서 막 내려 보니까 태원이가 눈에 띄어 반가웠다.
악수하고 나와 주어 시간이 지나도록 기다려 주어 고맙다 하고 부름에 전화에도 마중 나오라고 해서 나왔을 텐데 전화 해주고 가려 했더니 태원이가 마침 저기 누가 기다리는 분이 있다며 물어보고 온다 하여 그렇게 하라 했더니 물으니까 내 마중 나온 사람이 확실하여 반갑다고 악수를 한후
나는 휠체를 타고 밀고 나왔다. 정말 고마웠다.
전철로 올까 하다가 여러 명이고 쉽게 찾아 오려고 택시를 타기로 하고 만 칠천원주고 인천 선생님 집 앞까지 물어서 찾아 들어가니 마침 선생님이 계셨다.
인상도 사진보다 휠씬 좋으시고 안태원이가 업고 이층까지 올라갔는데 너무나 고마웠다.
모두 커피를 시키려하다 사이다 한잔씩 하고 얘기 나누다가 권연완 군과 태원이는 서울로 올라가고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데 아무 부담감 없이 대화를 나누웠다.
저녁은 우족 곰탕을 해 놓으시어 나는 잘 먹었다.
선생님은 찬이 없어 어쩌나 하시며 미안스러워 하신다.
괜찮아요. 그런 생각은 절대 하시지 말라 하고 석식이 끝난 후 선생님은 꾸미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소탈하시고 소박하신 모습으로 협소한 방안에는 사방으로 책이 가득가득 쌓이고 진귀한 작품이 시화와 함께 걸려있었다. 일월강산 이란 작품은 묵화였으나 선생님 시 한편이 들어 있는 대작 이였다.
강석주 큰 스님 4섭 법장서도 있었으며 법당 겸 서재 선생님 독방 이였다.
아우는 12시경 먼저 나가 자라 한 후 김진탁군 동해시에 살고 있는 동생이 오지 않아 1시가 넘어 전화 가 왔다.
부천에서 자고 내일 온다고 초저녁에 선생님 제자 홍순옥양 박은영 양 두명이 와서 인사를 나누고 사와떤 방과 음료수를 나누어 먹었으며 생강차를 끓여주어 한잔씩 하고 11쯤 간후 선생님과 함께 있다니 또 박철민씨 왔다. 간후 또 김성천씨가 왔다.
술을 사와서 한잔하고 1시반이 넘어 동생이 경원이 방에 자고 있어서 나도 동생하고 함께 선생님 댁에서 편하게 잘 잤다.
선생님께서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잘 자라고 하신다.
난생 처음 인천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선생님께서 집에 전화해 주라고 하며 전화를 눌러 주어서 제수씨 받았다. 별일 없다 하고 잘 도착했다 한후 선생님이 바꿔 달라 하여 정중하게 받으시라 한 후
선생님이 받아 한번 놀러 간다니 제수씨 놀러 오라한다며 동생이 받아 얘기 하고 끊었다.
올 때 제수씨께서 별도로 만원 여비하라고 주셨다 고마웠다.
21세 때 서울 왔다 간후 16 년 만에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이것이 모두 부처님 가피력이라 생각 하면서 오늘 인천도착을 이렇게 정리하며 선생님 높고 높은 대비 행에 깊은 감동을 받으면서 이렇게 끝맺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관세음 보살
5월 17일 목요일 우천
인천에서 서울로 다시 들어왔다.
기침 7시에 하여보니 내가 제일먼저 일어났다. 기분이 상쾌하다.
아파트 생활은 답답한 것 같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면 김성천 29세 시 낭송하는 분이 아침 국을 데워 조반상을 봐 가지고 9시경 끝내고 있다니 박철민씨 선생님제자 동해 김진탁이 형제도 조반을 한후 곳 들어왔다.
인사를 한후 또 김영승 시인이 33세라 했으며 반갑게 인사하고 농담도 하며 맥주와 막걸리를 사 와서 함께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짐을 묵기 시작하여 맏 아드님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니까 누님보살님도 오시고 학교 갔다 와서 점심을 시켜 먹은후 각자 식성 되로 시켜 먹고 있다니 기사 차를 몰고
와서 비가 계속 내리고 있어 짐을 챙겨 실은 후에 먼저 들어오시고 우리는 택시로 미술관 앞까지 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밖은 보이지 않으나 기사분이 너무 좋은 분이다.
신궁장 여관 208호실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시켜 보내온 것을 먹고 모두 제각기 볼일 보러 나간 후 목욕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김진탁 맹인 동생께 애기하니 때를 밀어준다고 한다.
물을 받아놓고 옷을 벗고 오라하여 탕에 넣은데 애 먹었다. 때를 불리고 있을 동안 밖에 같다온다 하여 다녀 오라하고 혼자서 탕 안에서 때를 씻으며 있다니 랑 아버지와 웅 모두 왔다.
진탁이 때를 밀어 깨끗이 씻어주어 너무 고마웠다.
진탁이도 옷을 벗은 후 몸 구석 세밀하게 씻어주어 너무나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내일 개막을 위하여 한시반이 넘어 나는 먼저 잤다.
그러나 비는 계속 내리고 선생님은 개막식을 할 때 사람들이 비가오면 많이 못 와서 어쩌나 걱정하시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신다.
나도 잠이 들지않아 그냥 누워 눈만 감고 동생과 선생님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탁이도 함께 누워 잤다.
얘기하는 소리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는 없다.
이번행사 잘 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여 선생님이 애타 하시며 창밖을 내다보며 비 오지 말았으며 간절히 기도하여 3시경 일어났다.
5월18일 금요일 우천
새벽부터 염불기도 덕분인지 하늘이 비를 멈춰 주어서 김성천 시 낭송 하는 분이 선생님을 깨워 함께 데리고 동생 웅이 하고 작품을 전시실로 옴기로 갔다.
다행이 작품을 전시할 동안 비가 약간씩 오다 말다 하는데 새벽에 진탁이 선생님 앞에 욕설를 함부로 하여 꾸중을 들었다.
조반을 한후 휠체를 타고 경인미술관 앞에 갔다.
마침 영월에 살고 쌍용 시멘트회사에 근무하는 운곡 거사 이동성 씨께서 오셔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주어서 고마웠다.
미술관 건물은 이조 때 박영호 대감 저택인데 제3전시실인데 천년만년이 가도 끄덕 없을 도리와 기둥을 보며 훌륭한 이 경인미술관 동양관에서 나와 우리 8명을 위하여 중식은 거르고 모든 준비를 다하고 개막식 때까지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일생에서 제일 감격스러운 날.
재소자 충호 동생이 3박4일 휴가를 얻어서 형님 누나 형수를 대동하고 도착하여 인사를 나누고 최명숙양도 인사를 나누고 손님이 한분 두분 모이기 시작하였다.
6시20분경 개막식을 개최하였는데 파성 설창수선생님 조영암 큰스님 천상병시인님 등등
유명 원로시인들을 뵈알하여 인사를 한후에 랑승만 선생님께서 맨 앞에 앉아 있으라 하여
소피를 본 후 앉아 있다니까 성황을 이루었다.
식순에 따라 개막식을 하는데 장애인 8명을 대표하여 인사 말씀을 할 차례가 되어 나는 앉은 자리에서 꽃다발을 안고 인사말씀을 읽어 내려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전시관에 150여명이상 모인 가운데 숨 소리 조차 들리지 않을 듯 조용히 인사말을 경청하며 장내 바라밀 전시회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인사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며 서러움과 감격에 복 받쳐서 인사말은 잠시 중단 되었다.
선생님들 모두 내가 인사말 한 것을 인용 구구절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다며 인용말씀을 하시며 축사에 말씀을 하여 주신다.
나는 그냥 집에서 전화를 받은 후 하루 낮 써 가지고 선생님께 수정을 받아서 인사말을 하려고 했더니 그만하면 손볼 것 없다며 그대로 인사말을 해도 된다 하시고 동생도 옆에서 들어 본후 그대로 해도 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여러 군데 다니며 인사말을 들어봤으나 별로 더 잘한데 없었다고 한다. 유명하신 랑선생님과 동생이 하던 말대로 내가 인사말 원고를 그런대로 쓴 편이다.
시낭송과 충호가 낭송할 때 누구나 다 눈물을 흘렸으며 조영암 큰스님 법문도 유창하시고 정말 신기한 기적 같은 개막식이였다.
개막식이 끝나고 다과회를 할 때 사진을 찍기 위해 모이라 하여 찍으려하는데 김승찬 이사장님 내외분이 참석하셨다.
개막식이 끝나고 앞에 와서 날 찾아 주셨다.
너무 좋은 자리에 초청해주어 고맙다 하시며 동생한태 인사 시키고 선생님과도 인사 하시게 한후 김밥도 조금 먹고 사진도 찍은 후에 이동성 거사는 간다고 작별하고 모든 분들이 바삐 가신 후 김승찬 사모님이 봉투 하나를 주머니에 넣어 주시더니 여관에 와서 저녁에 펴 보니까 삼만원이나 들어있었다.
저녁을 고기덮밥을 시켜서 먹었다.
오늘 이렇게 개막식은 하였으나 오전에 일본에서 온 모사장이 영암스님 작품 무자를 42만원에 사 가지고 갔으며 십만원 받고 영월 작품 한점 주었으며 그 외는 작품이 나간게 없다. 그러나 모두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감격적인 개막식을 치루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마하살
5월19일 토요일 청천
장애불자들을 위한 랑승만바라밀전 개막식 이튼 날
심해당 선생님 정한모 장관 신세원 교수 등 여러분이 다녀가시고 인사도 하고 염불 향불을 피우며 아침저녁은 전시관에서 시켜서 먹었다.
오전에는 허경선양이 본후 오후에는 이혜경양이 사무를 맡아 보는데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모두 한후에 최명숙양 한태 선생님 뒤 이야기를 들었으며 떳떳한 시인에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었다.
수즙어 하면서 점심시간에 나가더니 떡을 사와 앞에 같다 놓아 맛있게 정말 잘 먹었다.
하루 두기씩 때우며 화장실이 멀어서 음료수는 적게 먹고 동생은 한미순 집을 찾아 인사를 선생님 대신 갔다 왔다 하며 저녁때 왔으며 오늘 11시차로 내려가려다가 밤 11시차로 간다고 내러 간후 오늘부터 남에 도움 없이 스스로 다니려고 휠체는 그냥 두고 앉아서 간후 갈 때 소피보고 저녁은 비빔밥으로 먹는데 이혜경양이 비벼주어 감사히 먹었다.
혜경양은 크리스찬으로 부모님이 계시고 딸만 4명인데 맏딸이라고 했다.
출판사에 다닌다고 했다. 편집도 하고 그런데 9명이 동인지를 냈다고 하였다.
오늘은 쌍용그룹에서 오십만원 수표를 보내왔으며 법무교화신보기자 3명이 취재하여 갔으며 어제는 불교 방송 이승윤 아나운서가 취재 하여갔다.
오늘 아침 6시반에 방송 되었다고 한다.
어제 18일 새벽 5시부터 예불방송 시작할 때부터 선생님과 함께 들었으며 예불 기도를 하는데 법열이 올랐다. 정말 불가 사이한 가피력으로 소원성취 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요?
작품은 나가지 않고 선생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실까 여관으로 돌아와서 208호실에서 자명과 랑 정이 함께 나 하고 선생님과 함께 잠자리를 하기로 했다.
김성철 김진탁은 딴방으로 자러 가라고 했다. 진탁이는 앞을 못 보니 내가 봐도 민망한 정도로 선생님 기분을 몰라주고 혼자 기분을 내고 혼자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
공주교도소에 있는 충호는 이번에 글을 쓸 소재를 너무 많이 얻어 가지고 간다고 하여 모두 적어 가지고 나와 랑 정이 충호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하고 동생 웅이는 오늘 밤 9시경 집으로 내려갔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마하살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5월 20일 일요일 청천
한국 방생 바라밀 선원에서 성금모금 공연을 했다.
오늘은 기침을 하여 모두 먼저 나간후 조반을 혼자 시켜먹고 샤워를 하고 맨 나중 11시쯤 나갔다.
허경선씨 한태 동인 시집을 선물 받은 후 외국인과 인사를 했다.
장세원 외무부 직원과 인사를 한후 아버지는 작품이 나가지 않아 안절부절 가슴이 타 들어간다.
소주 3병을 거의 두병은 마신 셈이다.
옆에서 보기 너무 난처하다. 누구라고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혜경 강미정씨 한태도 싸인 받은 후 랑 정이 시켜서 천상병 시집을 4권 사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데 불광사 묘운 보살 3명이 한미순양 작품을 두점 6십만원에 사 가지고 갔다.
참 눈물이 나왔다. 감사하여서 공덕진 교수도 인사하고 목정배 교수 이학령 홍익대 전 총장님과도 인사하였다. 유명 인사를 많이도 알현했다.
오후 한국 바라밀 방생선원 원장 덕성스님을 비롯 부산에 거주하는 석지연 비구니스님과 인사하고 오늘 비구니스님 바라춤 등등 단소 사물 패 등 근 이백여명이 모여서 흥겨운 잔치 마당을 오후 5시20분에 시작 7시 반까지 너무나 신명나게 재미있고 우리들을 위한 한마당 위안잔치였다.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여 감격과 감동이 돼서 구슬 같은 눈물이 줄줄 비 내리듯이 쏟아졌다.
오늘 작품 팔린 것이 모두 백여만원 찬조와 성금이 모인 것이 팔십오만원 정도 이렇게 모든 잔치가 끝나고 바라춤을 추던 선녀처럼 아름다운 비구니스님의 나 한태 춤을 추자 팔을 잡았 끓었으나 못 춘다 그랬다.
알면서도 내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함인 줄 안다.
그리고 해산할 때 나 한태 와서 두 손을 꼭 움켜잡고 힘내세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하고 갔다.
원장스님과 인사하고 쿵푸를 보여준 비구니 스님과도 인사를 하고 나는 곳 추워서 여관으로 오는데 많은 보살들이 애처러워 하시며 어서어서 일어서서 돌아다니게 해 달라고 기원한다.
여기저기서 나는 합장하고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성불하십시오,
인사를 한후 오늘은 일요일이라고 배달이 안 된다고 랑 정이 또 저녁 때문에 대리로 왔다.
그래서 함께 휠체를 타고 식당으로 갔다.
아버지와 누님 매형 되시는 분 그리고 박은영 홍순옥 능인사 청년회장 그리고 두명 남녀 능인사 신도 말 못하는 농아 학생 등 저녁식사를 벌써 다 한후 밥이 없다 하여 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그래도 맥주 두잔을 한후 아버지 미안하다 너 불편하고 시켜준다 했더니 배달이 안 되어서 괜찮다.
오히려 나는 힘들어도 이런 곳에 참석하게 되서 영광스럽고 또한 기쁘다 하고
나를 위하여 청년회장과 여성 4명이 축하곡을 불러 주었다. 감사합니다.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에 손길 자비에 손길이 내려지리란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인데 이렇게 사랑해주니 영광이라고 인사말을 한후 저녁을 먹는데 청년회장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헤어질 때 전시회 끝나고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며 다음에 또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질 때 고모님 농아자 인사 한후 순옥 은영 둘이서 휠체 태워 여관에 데려다 준 후 휠체를 제자리에 들어서 같다 놓고 간다. 힘이 세고 장사다 고맙고 감사하다.
내가 이름을 기억하며 일기에 기록해 두었다니까 영광입니다.
다음 또 만나자 하여 헤어질 때 악수를 했다.
그리고 오늘은 아버지 성천 나 진탁 함께 잠자리에 든다.
일기를 정리 한후 비디오 보여 달라고 신청해 보라니까 성천 신청 한후 미인이 동물 소 말 개하고 성교하는 것을 시청 하고 인간사회가 이렇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3시경에 감사한 오늘 기쁨에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무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법무 교화 신문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관세음 보살
|
첫댓글 형님은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였고
장애를 입었지만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한 생을 무난하게 삶을 살았던것 같습니다.
마음은 항상 부처님을 모셨으니
그나마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것은 어느정도 성취했다고는 보는데
아마 이이야기를 형님 앞에서 했으면 큰 꾸중을 들었을 것라고 사려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래요. 형님이 열일곱살때 처음으로 구인사에 가서
불교에 귀의한 후 마음속에 부처님을 섬기며
나머지 인생을 사셨습니다.
지켜보는 저의 눈에는 말따로 행동따로 일때가 더러 보였지만,
약해지는 몸으로 신심은 대단했습니다.
지금쯤 부처님 나라에서 이생에서 누리지 못했던것 다 누리고 계시겠지요.
지정보살 지정보살 관세음보살
명심보감닙이 30 대에 서울에가셔서 작품전시회 에
참석하고 감동적인글 잘읽고 갑니다
그리고 대필해주신 분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예, 그때 랑승만시인과의 인연으로 인해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치뤄진
랑승만바라밀전 서예 작품으로 저도 함께 동참하여 새로운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때 한미순씨와 최명숙씨를 알게되어 지금껏 인연이 되었고,
그 이후 금춘가족을 발행하면서 그 인연의 폭을 넓힐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