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旅程에서 상처받은 이야기(3)
한 길 수
이번에는 第3話로 서울시 지하철 운영사업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 차례이다.
필자가 1980년 4월 12일부터 2주간 일본 동경으로 출장을 가서 그곳의 거미줄 같은 地下鐵道網圖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는 언제 저런 지하철망을 형성하나 하고 시샘과 부러움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서울의 지하철 망도 그곳에 못지않은 거미줄 망을 치고 있으니 전 세계에 들어 내놓고 자랑할 만한 꺼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세월이 흘렀다고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니고 그 뒤안길에서 말없이 주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발에서 쥐가 나도록 뛰어다닌 숱한 공직자들의 고뇌와 피땀으로 점철된 역사의 産物임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성동구청 주택과장을 하다가 산업과장 환경과장 도시정비과장을 거쳐 1979년 10월 18일 서울시로 발령이 났는데 지하철 본부 운수계장의 보직을 받아 지하철 1호선 서울역-청량리역 구간과 2호선 일부구간의 운영을 담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1981년 2월 7일 지하철운영사업소가 발족되면서 관리과 총무계장의 보직을 받았다. 이 자리는 청사관리, 직원의 인사와 보수, 교육 훈련은 물론 후생복리와 사업소의 내부 살림을 도맡는 자리이었다. 새로 발족 당시의 지하철 운영사업소에는 부이사관인 소장 밑에 관리과 운수과 기전과 시설관리과 등 4개의 과와 현업으로 전기소 공무소 신호보안소 통신소 승무관리소 공작창 외에 영업현장이 1호선에 9개 역무소 2호선에 15개 역무소 등 30개소의 현장이 있어 인원은 700여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 2호선은 43개의 역무소가 있는데 필자가 근무한 1년 6개월 동안 모두가 개통되었기에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이를 경하하고 찬양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안에서 골병이 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지하철 2호선이 토막토막 개통만 하면 차가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따른 인력이 충원되어야 한다. 차를 운전 할 승무원도 늘려 배치하여야 하고 전기 통신 신호업무는 물론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는 밤(01;00-05;00) 시간을 이용하여 레일을 점검하는 직원 등을 교육시켜 적절하게 배치하여야 한다. 역무원들도 신규직원들을 뽑아서 교육을 시켜 배치하되 업무처리에 익숙한 선임직원들을 새로 개통하는 부서에 섞어서 배치하여야 직원들 끼리 노하우를 전수하여 일이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직은 숫자가 적어서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아니했는데 영업을 담당하는 역무원들의 발령이 문제이었다. 지금은 모두 기계화 자동화가 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들지만 그 당시의 역무원들은 출입구 마다 배치한 매표원, 하차 시 표를 회수하는 집표원 승차 시에 표를 개표하는 개표원, 승하차의 안전을 담당하는 직원 등이 24시간 2교대 근무제를 시행하였기에 직원숫자가 엄청 많았다. 또한 역무원이 똑같은 역무원이 아니고 역무를 총괄하는 기능직 4-5등급인 역장 1명 기능직 6등급인 부역장 격인 조역이 갑을 반에 1명씩 2명 야간근무를 같이 하는 기능직 7등급인 지도원이 2명 등 구색을 갖추어야 했다. 그래서 각역에 배치 할 간부직 충원에 어려움이 있었다. 아무나 임명하여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고 직원들을 통솔하는 능력과 영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인사규정에 따라야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에는 승진 소요 연수라는 것이 있는데 예를 들자면 8등급의 역무원이 7등급으로 승진을 하려면 8등급으로 최소한 3년 이상을 근무하여야 하고 7등급이 부 역장격인 조역으로 승진을 하려면 최소한 그 자리에서 2년 이상을 근무하여야 한다는 규정 등이다.
그런데 1974년 8월 15일 지하철이 개통된 이래 서울이라는 매력에 끌렸는지 철도청의 시골 역에 근무하던 6급 주사역장들이 그 곳에서 사표를 내고 서울로 진입하려고 서울 지하철 기능직 8등급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지하철 2호선이 부분개통 될 때 마다 간부직을 충원배치 하여야 하는데 자원이 없었다. 신규 공채로 들어온 직원들은 아직 소요연수를 채우지 못하였기에 할 수 없이 철도청에서 들어온 직원 중에 간부직을 역임했던 직원을 추려내었다. 예를 들자면 그 중의 하나인 기능직 8등급 A직원이 서울 지하철에서의 근무기간이 1년이어서 승진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철도청에서 8급으로 2년 이상 근무를 하였기에 전 경력을 합산하여 3년이 되었다면 이를 경력평정을 해서 이 사람의 근무성적점수와 교육이나 표창 받은 것을 평가한 부가점수를 합해서 서열명부를 작성한다. 그런데 이 A직원이 승진서열 내에 들어오면 7등급으로 발령을 냈다. 그런데 다음해에 또 부분개통으로 역에 근무할 간부직 충원이 어려울 때는 이 A가 철도청에서 7급으로 2년 이상을 근무했다면 A의 전 경력 2년과 지하철에서의 7등급으로 근무한 1년을 합하면 3년이 됨으로 2년의 승진소요연수를 충족했다고 보고 경력평정과 교육성적을 합해서 서열권내로 들어오면 다시 6등급으로 승진시켜 조역이나 역장으로 발령을 내는 인사행정을 했다. 이런 제도를 활용하지 않았다면 현금을 취급하는 역무원을 관리하는 간부직 직원 충원이 되지 아니하여 영업 분야의 업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는 지방 공무원경력평정규정에도 전 경력을 합산하여 승진소요연수를 산정하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적용했다. 2호선이 부분개통 할 때 마다 우리들은 합리적인 평정으로 영업에 아무 차질 없이 원활한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2호선 전 노선이 개통되자 서울 지하철에 종사하는 직원이 1.200여명이나 되다 보니 이 모두의 인사관리 사무도 엄청 힘이 들었다.
그런데 잘 가다가 어디로 빠진다더니 1984년 1월 1일, 1년 반 만에 탄탄한 기반을 다진 지하철운영사업소가 지하철공사에 흡수되었다. 18개월 만에 없애버릴 기구라면 무엇 때문에 기구를 신설하여 사무실을 마련하고 인력을 배치하는 등 헛수고를 그렇게 많이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조직이 공중 분해되는 바람에 우리의 그 많은 노하우와 노고가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었으니 너무나 아쉽고 허탈했다. 만일 우리 조직이 연기처럼 살아지지 아니했더라면 그 엄청난 지하철강성노조도 탄생되지 않아 그 많은 파업과 노사협상 등의 시련도 겪지 아니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들은 뿌리도 없는 부평초처럼 1984년 6월 30일까지 우리의 노하우를 전수하라는 명분으로 지하철공사에 파견발령을 받아 근무하면서 육군소장 출신 김 모 사장을 만났다. 그런데 이 분은 안하무인격으로 눈으로는 보아줄 수 없는 횡포를 다 부렸다. 그러나 우리들은 죄인도 아닌데 몸을 낮추어 필설筆舌로는 형언할 수 없는 온갖 수모를 다 감수하며 근무를 하여야 했다. 이런 막가파 식 통솔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것이 강성 지하철노조이었다.
그런 열악한 근무형편인데도 엎친 데 덮친다고 시청 감사과에서 운영사업소 18개월간 업무처리 실적을 감사하겠다고 남의 사무실로 감사하러 나왔다. 지하철공사 회의실에 감사장소를 벌려놓고 며칠을 뒤지더니 경리 재무 운수영업 전기통신 토목건축 등은 잘 넘어갔으나 하필 필자가 맡았던 인사문제 즉 직원승진 건을 놓고 물고 늘어졌다.
“철도청에서의 경력은 1회만 인정을 하여야 하는데 왜 몇 번씩 전 경력을 합산하여 인사의 난맥상을 초래했느냐.”고 따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측에서는
“전 경력을 인정하여 평정하라는 규정만 있지 1회만 인정하라는 문구가 어디에 있느냐”고 답변했더니 아니라고 우기더니 대어를 낚았다고 풍을 치면서 감사 자료를 가지고 시청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뒤 시장명의로 소장 과장 계장 담당직원에게 징계위원회에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다. 그래서 소장은 출석을 포기하고 과장과 함께 담당직원을 대동하고 징계위원회에 참석을 했더니 위원장인 부시장인지 기획관리실장이 앉아서 인사질서를 문란시킨 사유를 설명하라고 하기에 지하철의 부분개통으로 간부직원 충원의 애로사항을 설명하고 지방공무원경력평정규정에 따라 前경력을 인정하여 평정했다고 답변을 했더니 그게 1번만 인정하라는 것이지 몇 번이고 포함하라는 규정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 1회만 인정하라는 규정은 없고 전 경력을 포함하여 평정하라는 규정만 있다고 답변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 “이 사람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먼.” 하고 땅땅땅 사회봉을 3번을 치더니 모든 위원들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 소장은 견책, 과장은 감봉 1월, 계장은 감봉 3월, 담당자에게는 해임처분이 내려졌다. 이는 의도적으로 뭔가 석연치 않은 내용이 감춰져 있는 망령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도 억울해서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냈으나 그 밥에 그 나물이어서 마이동풍이기에 고등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곳도 공무원법상 경과하는 하나의 요식행위 기관에 지나지 않았는지 뭔가를 깊이 살펴보려는 의지도 노력도 없이 무조건 기각해 버렸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와 같이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에서는 답답한 사람들의 심정을 외면 한 채 무조건 한없이 깔고 뭉개는 작전을 펴고 있었다. 이 낮잠만 자고 있는 대법원의 처사란 분통터질 노릇이어서 명이 짧은 사람은 기다리다가 서쪽나라로 가고도 남을 느림보 게으름뱅이 짓을 하고 있었다.
짓밟힌 권리를 찾으려는 애달프고 서러운 마음은 법원에 가 있는데 미운털이 박힌 빨간 딱지가 그어진 우리들은 6월 30일까지의 파견기간은 끝이 났는데도 새로운 보직발령을 내주지 아니하여 6개월가량을 각자 자기집안에서 방안 퉁수가 되어 죄인처럼 두문불출 두더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늦게야 이 소식을 들었던지 총무처에서 지방공무원경력평정규정을 개정하여 전 경력이 있는 자는 1회에 한하여 이를 합산하여 평정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자 대법원에서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 원래 규정이 잘못된 것을 알고 총무처에서 개정을 했으니 전 규정을 적용한 행정처리는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은 1986년 11월 10일이었다. 이로서 우리들은 인간승리의 만세를 불렀다.
대어를 낚았다고 우쭐대던 얼치기와 서울시 인사위원회 총무처의 소청심사위원회 행정법원 등 우리 앞길을 망친 눈먼 소경들이여! [정의는 살아 있다]는 판결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는가.
우리들은 주홍 글씨 멍에를 벗었으나 해임처분을 받아 공직을 떠났던 실무담당자 허동인 주사는 그 쇼크로 병을 얻어 입원가료를 받다가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그러니 분명히 이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대도 감사 나왔던 자나 징계처분을 한 자 등은 외눈하나 깜박이지 않고 희희낙락 하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천벌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필자도 짐이 무거워 허덕이는 인사담당자를 교체하지 아니한 책임이 있다. 물론 옆에서 보조하는 직원을 2명이나 붙여주었지만 매사를 꼼꼼히 챙기는 완벽주의 자인 허동인 주임은 부분개통 때 마다 1주일 정도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사무실에서 철야로 인사작업을 하다가 쓸어져서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기도 하는 등 오로지 이 업무에 매진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자면 많은 업무에 시달리는 것도 문제지만 엉터리 해임처분의 쇼크로 순직한 것이다. 정의가 살아 있다면 이런 사람을 발굴해서 훈장을 주어도 시원찮은데 해임처분이라니 이런 몰상식한 행정이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하늘을 향하여 호소하고 또 묻고 싶다.
감사과에 근무한다고 우쭐대고 뻐기던 자들도 응분의 처분이 있어야 하나 누구하나 머리카락 한 올 빠지지 않고 거들먹거리다가 퇴직을 했으니 이 나라에는 불의에 벼락을 내리는 하느님은 없는 것 같다.
필자가 주동하여 허동인 주임이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지하철 운영사업소 본부에 근무했던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병원비의 일부라도 보태라고 전달한바 있으나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는가. 마음만 허하고 아팠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하느님도 매사에 꼼꼼하고 틀림이 없는 인재가 필요하여 허동인 주사를 발탁하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필자는 지금도 수시로 허동인 주사가 생각난다. 그럴 때 마다 너무나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에 가슴이 저며 온다. 한편 그때 대어를 낚았다고 희희낙락하던 자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응어리가 져서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
한맥문학 2020년 7월호에 게재
|
첫댓글 고운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