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가해] 마태 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너무나 추운 날씨에 한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죽었습니다. 어떤 조각가가 그 뉴스를 보고 벤치에 누워있는 노숙자의 모습을 본뜬 조형물을 만들었습니다. 조형물 속 노숙자는 담요를 덮고 있는데 담요 밖으로 삐져나온 두 발에는 커다랗게 뚫린 못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조각가의 눈에는 우리의 차가운 무관심 때문에 길에서 죽은 그 노숙자가 예수님처럼 보였던 겁니다. 그는 노숙자가 죽은 그 자리에 자기가 만든 조형물을 설치하고 싶다고 토론토시에 제안했지만 시에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시에서 노숙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질책을 받게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조각가는 뉴욕의 주교좌 성당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조형물이 성당의 외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조각가는 포기하지 않고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만든 조형물을 바티칸에 보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그 조각가를 바티칸으로 초대했고, 그 조형물을 직접 축성한 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조형물의 발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며 기도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심했던 자기 모습을 돌아보며 가난한 사람, 외로운 사람, 아픈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작고 약한 우리 사회의 예수님들을 보살피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매서운 추위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요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모습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최후의 심판’을 지혜롭게 잘 대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십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양들은 성질이 온순하긴 하지만 게을러서 움직이기를 싫어하기에, 양들 사이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여기저기 부딪히는 염소가 없으면 병에 걸리기 쉽고 목자와 함께 길을 걷기도 어렵습니다. 반면 성질이 급하고 호전적인 염소들은 언뜻 보기에 양들을 못살게 굴고 괴롭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게으른 양들이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만들어 위험한 장소에서 벗어나게 하고 풀을 뜯게 했지요. 오늘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그런 양과 염소 사이에 ‘시비를 가리겠다’고 하십니다. 성질이 온순하고 말을 잘듣는다고 양을 무조건 예뻐하시겠다는게 아닙니다. 성질이 급하고 말을 잘 안듣는다고 염소는 무조건 배척하시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힘과 권력으로 다른 양들의 풀까지 빼앗아 먹어 혼자만 디룩디룩 살이 찐 못된 양은 없애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성급하고 부산스럽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 단점을 주님께서 당신 양을 보살피시고 이끄시는 도구로 쓰시도록 순명한 염소는 사랑으로 보살피겠다고 하십니다. 단지 타고 태어난 품종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얼마나 성실하게 순명했는가에 따라 얼마나 큰 사랑을 받을지가 달라지는 겁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기준’은 예수님도 동일하게 적용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양과 염소를 가르시는 기준은 타고 태어난 품종이 아닙니다. ‘양’은 사는 동안 주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성실히 실천한 ‘충실한 종’들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염소’는 사는 동안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소명을 저버리고 제 뜻대로 행동하며 욕망을 채우는데에 급급했던 ‘불충실한 종’들을 상징하지요. 그런 기준을 가지고 공정하게 심판하여 ‘양’은 당신의 오른쪽에 세워 구원하시고, ‘염소’는 당신의 왼쪽에 세워 멸망시키시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된 의인들이 어리둥절하여 그분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께 사랑을 실천했다는걸 모르고 있습니다. 자랑하고 내세우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곧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진심으로, 상대방이 혹여 자기 도움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최대한 드러나지 않고 또 조심스럽게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작고 약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 사랑을 드렸고 그렇게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것이지요.
한편, 주님의 왼편에 서게 된 죄인들은 억울해하며 따지듯 물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풍요만 생각하느라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은 생각하지 않고 왜 자기들이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했느냐고, 자기들이 대체 뭘 그리 잘못했길래 ‘영원한 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겁니다. 만약 주님이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 당신 신원을 분명히 밝히셨다면 자기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 잘 해드렸을거라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대상을 가리거나, 대가를 바라는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하신 사랑은 차별 없이,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작고 약한 이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기 쉬운 이들 안에 당신 자신을 감추시는 겁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이 ‘참’인지 ‘위선’인지를 판별하여 ‘옥석’을 가려내기 위한, 그야말로 ‘신의 한 수’입니다. 그런 주님의 마음에 동화되어 작고 약한 이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며 참된 사랑을 실천한 이들은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사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권력과 재물이라는 세상의 왕을 섬기지도, 숫자와 결과로 사람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세상의 규칙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왕으로 섬기며 그분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이 우리를 억압하여 억지로 왕이 되신게 아니라, 우리 손과 의지로 그분을 우리 ‘왕’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마음가짐은 주님께서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신 뒤에 사람들이 그분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나, 제자들이 왕이신 주님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한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이 세상의 왕들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세속적인 욕망들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우리 왕이신 주님은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18,36)고 분명히 천명하시며, 세상의 왕권이 내미는 달콤한 세속주의와 물신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경제문제나 해결하자고 그분을 왕으로 섬기는게 아닙니다. 부족하고 약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여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주시기를 희망하기에 그분을 왕으로 섬기며 따르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되새기고 간직해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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