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절 엘리후는 지혜 있는 자들을 배심원으로 소환하여, 자신의 주장과 욥의 주장 중 무엇이 정의롭고 선한지 가려달라고 요청합니다. 입으로 음식 맛을 분별하듯, 귀로 지혜로운 말을 판별해달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불의하게 행하지 않았는데 벌을 받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6:28-30; 19:6-8), “정직을 추구한 나에게 하나님이 거짓말쟁이에게 쏘는 화살을 쏘고 계신다”(6:4; 16:13)라는 욥의 말을 인용하며, 욥이 물마시듯 하나님을 비방하고 있다고, 악인들이나 할 말들을 했으니 악인과 한패라고 비난합니다. 고난에 몸서리치며 쏟아냈던 욥의 다면적인 호소들을, “욥은 하나님을 기뻐해봤자 무익하다고 주장한다”라고 단순화하여 왜곡합니다. 다른 이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 해석만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10-15절 엘리후는 자신의 주장이 세 친구와 다를 것이라며 발언하기 시작했지만(32:14) 그들이 줄곧 개진해온 보응신학을 되풀이합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시므로 사람의 행동에 따라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고난받고 악인이 심판을 면하면 하나님이 불의해지는 것이므로, 그런 일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안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기계적인 공식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커서 인간의 지혜로 이론화하거나 명확한 틀 안에 정리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처럼 허무에 신음하고, 욥기처럼 억울함에 눈물 흘리는 의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16-30절 엘리후는 권력으로 죄를 감추고 의로운 척해도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아시고, 이미 다 아시기 때문에 날이 밝기 전에 조사나 재판 없이 즉시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욥에게는 참 잔인한 논리입니다. 끔찍한 심판을 당할 만큼 큰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욥을, 의인 행세하다 들킨 위선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욥은 자신에게 고난받을 불의가 있는지 하나님께 재판받고 싶어 하는데, 이미 즉결심판이 이뤄졌다며 제멋대로 유죄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실패한 사람에게 믿음이 적어서라고, 아픈 사람에게 회개하지 않아서라고,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함부로 충고하는 일은 없습니까?
첫댓글 17 정의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의롭고 전능하신 이를 그대가 정죄하겠느냐
엘리후 역시 하나님을 틀에다 두고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우리가 정 할수가 없습니다 우주 보다 크신 하나님을 다 알기에는 우리의 수명과 지식이 짧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다 아는 듯이 그래서 욥의 고난이 당연하다는 것을 확증하는 듯한 말투는 교만의 극치입니다
아버지 엘리후의 모습에서 또 나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고 엘리후의 모습이 오늘의 나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엘리후와 하나도 다를바가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나로 하나님 말씀을 빙자한 판단과 정죄 하는 죄를 멈추게 하옵소서 추측과 섣부른 결심을 하게 마옵시고 정직한 영을 부어주옵소서 공의와 정의를 떠들지 않게 하시고 삶으로 증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