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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Japanese divide into distinct categories, each with its different rules, those repayments on _on_ which are limitless both in amount and in duration and those which are quantitatively equivalent and come due on special occasions. The limitless repayments on indebtedness are called _gimu_ and they say of it: ‘One never repays one ten-thousandth of (this) _on_.’ One’s gimu groups together two different types of obligations: repayment of one’s _on_ to parents, which is _ko_, and repayment of one’s _on_ to the Emperor, which is _chu_. Both these obligations of gimu are compulsory and are man’s universal lot; indeed Japan’s elementary schooling is called ‘gimu education’ because no other word so adequately renders the meaning of ‘required.’ The accidents of life may modify the details of one’s gimu, but gimu is automatically incumbent upon all men and is above all fortuitous circumstances.
일본인들은 명확한 범주로 구분하는데 각각의 범주들은 다른 역할을 내포하고 있으며, -on-에 대한 보상(상환)은 양과 기한에 있어 제한이 없으며, 양적으로 동등하며, 특별한 계기에 따라 만기가 된다. 빚짐에 대한 만기가 없는 상환을 -gimu-라고 부르며 일본인들은 -gimu의무(義務)-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on-에 대해 천분의 1도 결코 갚을 수 없다” -gimu-는 두 개의 다른 의무로 구별할 수 있다. 부모에 대한 -on-의 보상은 -ko효(孝)-라고 부르며 천황에 대한 -0n-의 보상은 -chu충(忠)-라고 부른다. 이 두 개의 -gimu-에 대한 채권은 강제적이며 인간의 보편적인 lot운명, 팔자이다. 실제 일본에서는 초등학교의 교육을 ‘gimu 교육’이라고 부른다. 다른 어떤 단어로 그 의미를 정확히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사건은 사람의 -gimu-의 상세 내역을 변형할 수도 있다 하지만 -gimu-는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의 책무가 되며 모든 우연한 정황에 우선한다.
Both forms of gimu are unconditional. In thus making these virtues absolute Japan has departed from the Chinese concepts of duty to the State and of filial piety. The Chinese ethical system has been repeatedly adopted in Japan ever since the seventh century and chu and ko are Chinese words. But the Chinese did not make these virtues unconditional. China postulates an overriding virtue which is a condition of loyalty and piety. It is usually translated ‘benevolence’ (_jen_) but it means almost everything Occidentals mean by good interpersonal relations. A parent must have _jen_. If a ruler does not have it it is righteous for his people to rebel against him. It is a condition upon which one’s gift of loyalty is predicated. The Emperor’s tenure and that of his officials depended on their doing jen. Chinese ethics applies this touchstone in all human relations.
두 형태의 gimu는 무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덕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듦에 있어 일본은 국가와 자식으로서의 신심(효)에 대한 의무와 관련한 중국적 개념에서 벗어났다. 중국의 윤리적 체계는 일본에서 7세기 이후에 반복해서 채택되었으며 충과 효는 중국 용어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러한 미덕은 무조건이 아니다. 중국은 충성과 자애의 조건을 최우선의 미덕으로 가정한다. 그것을 ‘자비(-jen-)’라고 번역하지만, 서양인이 사람 사이의 좋은 관계로 의미하는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부모는 반드시 ‘-jen-'을 가져야만 한다. 만약 통치자가 자비롭지 못하다면 백성들은 통치자에게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켜도 정당하다. 그것은 충성에 대한 선물을 암시하는 조건이다. 황제나 황제의 관리들이 종신토록 통치할 수 있는가는 -jen-자비를 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his Chinese ethical postulate was never accepted in Japan. The great Japanese student, Kanichi Asakawa, speaking of this contrast in medieval times, says: ‘In Japan these ideas were obviously incompatible with her imperial sovereignty and were therefore never accepted in entirety even as theories.’[1] In fact jen became in Japan an outlaw virtue and was entirely demoted from the high estate it had in Chinese ethics. In Japan it is pronounced _jin_ (it is written with the same character the Chinese use) and ‘doing jin’ or its variant ‘doing jingi’ is very far indeed from being a virtue required even in the highest quarters. It has been so thoroughly banished from their ethical system that it means something done outside the law. It may indeed be a praiseworthy act like putting one’s name on a subscription list for public charity or granting mercy to a criminal. But it is emphatically a work of supererogation. It means that the act was not required of you.
이러한 중국적 윤리의 전제조건은 일본에서 전혀 채택되지 않았다. 저명한 일본 연구가 칸이치 아사카와는 중세에 있어서 일본과 중국의 이러한 대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에서 이러한 사고는 천황의 통치권과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온전히 이론으로조차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서 jen자비는 금지된 미덕이 되었고 중국의 윤리에서 가졌던 높은 지위로부터 완전히 강등되었다. 일본에서 자비는 -jin인(仁)-으로 발음된다.(중국에서 사용하는 글자를 같이 쓴다.) 그리고 ‘jin을 행함’ 또는 그 변형인 ‘jingi인의(仁義)를 행함’은 가장 높은 신분quarters에서 조차 요구되는 덕을 행함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일본 윤리체계에서 완전하게 제거되었기 때문에 법체계 밖에서 행해지는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것은 범죄자에게 공공의 자비나 자선을 위한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넣는 것과 같은 상찬할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로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동정적인 적선의 행위이며 당신에게 요구되지 않는 행위를 의미한다.
‘Doing jingi’ is used in another sense of ‘outside the law,’ too; it is used of virtue among gangsters. The honor among thieves of the raiding and slashing swashbucklers of the Tokugawa period—they were one-sword men as contrasted with the two-sworded swashbuckling samurai—was ‘doing jingi’; when one of these outlaws asked shelter of another who was a stranger, that stranger, as an insurance against future vengeance from the petitioner’s gang, would grant it and thereby ‘do jingi.’ In modern usage ‘doing jingi’ has fallen even lower. It occurs frequently in discussions of punishable acts: ‘Common laborers,’ their newspapers say, ’still do jingi and they must be punished. Police should see to it that jingi is stopped in the holes and corners where it flourishes in Japan.’ They mean of course the ‘honor among thieves’ which flourishes in racketeering and gangsterdom.
마찬가지로 ‘jingi를 행함’은 ‘법 밖에서’와 같은 다른 느낌으로 사용하는데 야쿠자 사이의 도덕으로 사용된다. 도쿠가와 시대의 난도질하는 무뢰한-이들은 두 개의 검을 사용하는 무뢰한 사무라이와 대비하여 하나의 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과 급습하는 도적떼 사이에서의 명예로움(을 표현하는 말)은 ‘인의를 행함’이다. 이러한 무법자들 중 하나가 낯 선 다른 이에게 피난처를 요구하면 그 낯선 이는 권리를 주장하는 깡패로부터 당할 미래의 복수에 대한 보험으로 피난처를 제공하며, 따라서 ‘인의를 행한다.’ 현대 용법에서 ‘인의를 행함’은 더 낮은 상태로 추락했다. 그러한 상황은 처벌받을 행위에 대한 토론에서 자주 발생한다. 그들의 신문은 말하기를 ‘일반적인 노동자들은 여전히 인의를 행한다. 그리고 그들은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경찰은 일본에서 번창하고 있는 은밀한 곳에서 인의가 중단되었는지를 살펴야만 한다.’ 물론 그들은 조직폭력배 사회와 협잡에서 번창하고 있는 ‘도적 사이의 훈장’을 의미한다.
Especially the small labor contractor in modern Japan is said to ‘do jingi’ when, like the Italian labor padrone at American ports at the turn of the century, he enters into outside-the-law relationships with unskilled laborers and gets rich off farming them out at a profit. The degradation of the Chinese concept of _jen_ could hardly go farther.[2] The Japanese, having entirely reinterpreted and demoted the crucial virtue of the Chinese system and put nothing else in its place that might make gimu conditional; filial piety became in Japan a duty one had to fulfill even if it meant condoning a parent’s vice and injustice. It could be abrogated only if it came into conflict with one’s obligation to the Emperor, but certainly not when one’s parent was unworthy or when he was destroying one’s happiness.
특히 근대 일본에서 작은 노무 청부업자는 ‘인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1900년 전후 미국 항구에 있는 이탈리아 십장과 마찬가지로 노무 청부업자는 비숙련 노동자와 법외적인 관계를 맺고 이윤을 받고 그들에게 일을 알선함으로써farming 부를 챙긴다. jen인에 대한 중국의 개념은 더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강등되었다. 일본인들은 중국체계에서 결정적인 덕을 완전히 재해석하고 강등시켰으며, 의무가 조건이었던 지위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일본에서 효는 인간이면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되었다. 그것이 부모의 죄악과 부정의를 용서하는 것을 의미할 때조차도 이행해야만 하는 것으로 말이다. 효는 천황에 대한 의무와 충돌 될 때에만 폐기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가치가 없거나 그가 자신의 행복을 파괴할 때에는 그러하지 않다.
In one of their modern movies a mother comes upon some money her married
son, a village schoolmaster, has collected from the villagers to redeem a young schoolgirl about to be sold by her parents to a house of prostitution because they are starving in a rural famine. The schoolmaster’s mother steals the money from her son although she is not poor; she runs a respectable restaurant of her own. Her son knows that she has taken it but he has to shoulder the blame himself. His wife discovers the truth, leaves a suicide note taking all responsibility for the loss of the money, and drowns herself and their baby. Publicity follows but the mother’s part in the tragedy is not even called in question. The son has fulfilled the law of filial piety and goes off alone to Hokkaido to build his character so that he can strengthen himself for like tests in coming years. He is a virtuous hero. My Japanese companion vigorously protested my obvious American verdict that the person responsible for the whole tragedy was the thieving mother. Filial piety, he said, was often in conflict with other virtues. If the hero had been wise enough, he might have found a way to reconcile them without loss of self-respect. But it would have been no possible occasion for self-respect if he blamed his mother even to himself.
일본 근대 영화에서 한 어머니가 결혼한 자식에게 있는 돈을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그 아들은 마을 학교 교장이며, 그 돈은 어린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로 부터 거두었다. 그 소녀들은 아버지가 매음굴에 팔아넘겼는데 시골에 든 기근으로 굶어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교장의 어머니는 그 돈을 아들에게서 훔쳤다. 본인이 가난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자신 소유의 고상한 식당을 운영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비난을 자신이 짊어졌다. 교장의 부인이 진실을 알고 돈이 없어진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고서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아이를 안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사실이 공개되었지만 그 비극에 대한 어머니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도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아들은 효 법칙을 충족하였고 인격을 닦기 위하여 홀로 홋카이도로 떠나 다가올 날들의 시험에 대비하여 자신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영웅이다. 나의 일본인 동료는 어머니가 그 비극적 사건에 모든 책임이 있다는 분명한 나의 미국적 신념에 대해 열정적으로 방어하였다. 그가 말하길 효는 조종 다른 도덕과 갈등 관계에 있다. 만약 그 영웅(교장)이 충분히 현명하였다면, 그는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고 그들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의 어머니를 자기 자신에게라도 비난한다면 그 사람은 자존을 위한 어떤 기회도 갖지를 못했을 것이다.
Both novels and real life are full of the heavy duties of filial piety after a young man is married. Except in ‘modan’ (modern) circles it is taken for granted in respectable families that the parents select their
son’s wife, usually through the good offices of go-betweens. The family, not the son, is chiefly concerned about the matter of a good selection, not only because of the money transactions involved but because the wife will be entered in the family genealogy and will perpetuate the family line through her sons. It is the custom for the go-betweens to arrange a seemingly casual meeting between the two young principals in the presence of their parents but they do not converse. Sometimes the parents choose to make for their son a marriage of convenience in which case the girl’s father will profit financially and the boy’s parents by
alliance with a good family. Sometimes they choose to select the girl for her personally acceptable qualities. The good son’s repayment of parental _on_ does not allow him to question his parents’ decision. After he is married his repayment continues. Especially if the son is the family heir he will live with his parents and it is proverbial that the mother-in-law does not like her daughter-in-law. She finds all manner of fault with her, and she may send her away and break up the marriage even when the young husband is happy with his wife and asks nothing better than to live with her. Japanese novels and personal histories are just as apt to stress the suffering of the husband as of the wife. The husband of course is doing _ko_ in submitting to the
break-up of his marriage.
소설과 실제 생활 모두 젊은이가 결혼한 후에 효에 대한 과중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근대’ 사회에서를 제외하고 부모가 훌륭한 중매 사무실을 통해 자식의 부인을 선택하는 것을 존경할만한 가족으로 당연시한다. 아들이 아닌 가족의 주요한 관심사는 훌륭한 선택을 하느냐이다. (중매에는) 화폐교환이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인이 가계도에 들어오게 되고 자식을 통해 가문을 영속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대화를 하지 않지만 부모들 앞에서 두 젊은 주역들 사이의 일상적인 회합을 배열하는 거간꾼은 당연시된다. 종종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 편의적인 결혼을 만들기도 한다. 여자의 부모는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하거나 남자의 부모는 명문가와의 동맹을 위해 이러한 결혼을 성사시킨다. 때때로 여자를 고를 때 그녀의 개인적인 탁월함을 보기도 한다. 부모의 은혜on에 대한 훌륭한 아들의 보상은 부모의 선택에 대해 이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결혼 후에 아들의 보상은 계속된다. 특히 아들이 가족의 상속자라면 부모와 함께 살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싫어하는 일은 상식이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모든 허물을 찾아내, 그녀를 멀리 보낼 수도 있고, 신랑이 신부와 행복하게 지낼 때조차 그녀와 살아봐야 더 좋은 일은 하나도 없다고 요구하며 그 결혼을 깨버린다. 일본 소설과 개인사는 부인의 고통만큼이나 남편의 고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아들은 파혼에 승복하면서 효를 실천하는 것이다.
One ‘modan’ Japanese now in America took into her own rooms in Tokyo a pregnant young wife whose mother-in-law had forced her to leave her grieving young husband. She was sick and brokenhearted but she did not blame her husband. Gradually she became interested in the baby she was soon to bear. But when the child was born, the mother came accompanied by her silent and submissive son to claim the baby. It belonged of course to the husband’s family and the mother-in-law took it away. She disposed of it immediately to a foster home.
미국에 살고 있는 한 ‘현대’ 일본인은 임신한 젊은 부인을 도쿄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시어머니로부터 비통해하는 남편과 헤어지라는 강요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싫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지만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태어날 아기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조용하고 순종적인 아들과 동행하여 그 아이를 요구하였다. 당연히 아이는 남편 가족의 소유였고, 시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시어머니는 즉각적으로 그 아이를 입양기관으로 보내버렸다.
All this is on occasion included in filial piety, and is proper repayment of indebtedness to parents. In the United States all such stories are taken as instances of outside interference with an individual’s rightful happiness. Japan cannot consider this interference as ‘outside’ because of her postulate of indebtedness. Such stories in Japan, like our stories of honest men who pay off their creditors by incredible personal hardships, are tales of the truly virtuous, of persons who have earned their right to respect themselves, who have proved themselves strong enough to accept proper personal frustrations. Such frustrations, however virtuous, may naturally leave a residue of resentment and it is well worth noting that the Asiatic proverb about the Hateful Things, which in Burma, for instance, lists ‘fire, water, thieves, governors and malicious men,’ in Japan itemizes ‘earthquake, thunder and the Old Man (head of the house; the father).’
때때로 이 모든 일은 효에 속하며 부모에 대한 채무의식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다. 미국에서 이와 같은 모든 이야기는 개인의 정당한 행복을 외부에서 방해하는 사례로 취급된다. 일본은 이러한 간섭을 부채의식을 가정하기 때문에 ‘외부’로 고려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미국에서 엄청난 개인적 고통을 통해 채권을 청산한 정직한 사람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도덕적인 이야기이며, 스스로 존경할 권리를 획득한 사람의 이야기이며, 개인적 좌절을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도덕적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좌절은 자연스럽게 분노의 찌꺼기를 남긴다. 미워할만한 일들 예를 들면 버마에서는 ‘불, 물, 도둑, 통치자 그리고 사악한 인간’ 일본에서는 ‘지진, 천둥 그리고 늙은이(가장 또는 아버지)’에 관한 아시아의 속담에서도 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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