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司馬遷)은 동양 역사의 아버지로 평가되며 그의 저서인 《사기》는 중국, 한국, 일본등 동양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기》는 중국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통사(通史)로 후대 정사(正史)를 기술하는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의 부친인 사마담(司馬淡)은 천문관측 및 국가의 대사와 의례를 기록하는 태사령(太史令)의 직위에 있었다. 한 무제(漢武帝)가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을 행하였는데, 사마담은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여 그 울분 속에 사망하면서 아들 사마천에게 《춘추(春秋)》 이래 역사 찬술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일찍이 여러 지역을 유람하였고, 낭중(郎中)으로 임관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아가 광대한 지역을 답사하였다. 원봉(元封) 3년(BC 108) 태사령이 되어 황실의 비서(秘書)를 열람할 수 있었으며, 태초(太初) 원년(BC 104) 《태초력(太初曆)》 제정에 참여하여 역법(曆法)을 개혁하였다. 이때 부친의 유지를 이어 역사를 찬술하기 시작 정화(征和) 원년(BC 91)에 초고를 완성하였다.
천한(天漢) 2년(BC 99)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匈奴) 정벌에서 사로잡혀 그 가족들이 연좌되자, 사마천은 그를 비호하다가 하옥되어 부형(腐刑.궁형)을 당하였다. 출옥한 이후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그가 쓴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는 형벌을 당한 울분을 역사편찬에 쏟았다고 하였다.
《사기》는 처음에는 《태사공서(太史公書)》, 《태사공기(太史公記)》, 《태사기(太史記)》라 불리다가 조조(曹操)의 위(魏)나라에 와서 《사기》로 약칭되었다.
《사기》는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 등 모두 130편, 526,500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사마천이 창시한 독특한 역사 서술체제인 기전체 방식으로 서술된 것이다. 현재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간행한 표점본은 555,660자로 여기에는 저소손(褚少孫) 등이 보필한 3만여 자가 더 수록되어 있다.
또한 마지막 1편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라는 자서전인데, 집안의 세계(世系), 책 저술의 경과, 자신의 사관 등을 밝혔다. 또한 각 권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고 하여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론을 하였다.
이 책은 고대 전설적 시기인 황제(黃帝)부터 한 무제까지 약 3천 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이는 공자(孔子)의 《춘추》 이래 4백 년간의 공백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또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고 서술하였으며, 당시 인물과 세태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하였으며, 그 문체는 문학적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사기》는 기전체(紀傳體)로 내용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정사(正史)를 기술하는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기전체는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과 통사적(通史的) 서술을 혼합하여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으로, 사마천은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하였다.
〈본기〉는 천하를 움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역사 서술의 가장 큰 뼈대를 이룬다. 대체로 제왕(帝王)들의 행적과 치적, 주요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한 것으로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한무제본기(漢武帝本紀)〉까지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현존본에 기록되어 있는 〈삼황본기(三皇本紀)〉는 당(唐)나라 사마정(司馬貞)이 첨가한 것이다. 각 권의 끝에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 하고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논평하였다.
〈서〉는 예제(禮制), 역법(曆法), 천문(天文), 법제(法制), 치수공사(治水工事), 경제 등의 제도와 연혁을 8권에 기록한 것이다.
〈세가〉는 제후의 계보와 역사를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으로 3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孔子)와 진섭(陳涉)을 〈세가〉에 포함시켰는데, 공자가 혼란한 세상에서 왕도(王道)를 세우기 위해 의례와 법도를 세웠다는 점과, 가난한 농노 출신인 진섭이 진(秦)나라의 폭정에 처음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사기》의 백미(白眉)는 〈열전〉이다. 사상가, 정치가, 장군, 역인(役人), 협객, 상인, 시정(市井)의 인물까지 망라하여 17권으로 구성하였다. 〈열전〉은 사마천의 인간 중심 역사관을 잘 드러내는 부분으로, 현실 속 어려움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인물들의 모습을 절묘한 문장으로 그리고 있다. 덕(德)이 있는 백이(伯夷)는 굶어 죽고 포악한 도척(盜跖)은 천수를 누린 것에 한탄하였으며, 조(趙)나라의 위기를 구한 인상여(藺相如)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처했을 때가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유림(儒林), 유협(遊俠), 영행(佞幸), 순리(循吏), 혹리(酷吏), 화식(貨殖), 골계(滑稽) 등 인물들을 유형화하여 기록하였으며, 흉노(匈奴) 등 주변의 이웃 국가와 민족을 기록하였다. 특히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한 무제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 고조선(古朝鮮)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기전체의 창시자인 사마천은 동양 역사의 아버지라고 칭할 수 있다. 《사기》 속 인물들은 후세 통속 연극과 소설의 소재로 이용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시인 굴원(屈原)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조선(朝鮮)시대 선비들 역시 문장을 닦기 위해 이 책을 읽었으며, 특히 정조(正祖)는 《사기》의 주요 내용을 선별하여 규장각(奎章閣)의 초계문신(抄啓文臣)들에게 교정을 보게 한 뒤 《사기영선(史記英選)》으로 간행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중국인의 현실적 코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며, 그 속에 담겨 있는 다채롭고 흥미있는 이야기들은 창의적 소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고사(故事)에서 우리의 식견과 견문을 넓힐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