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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창 17: 1-8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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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는 <스탠포드 대학교>라는 명문 대학이 있습니다.
중세의 유럽을 연상하게 만드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깊은 인상을 주는 이 학교는 1891년에 창설자(founder) 리런드 스탠포드 1세(Senior Leland Stanford)와 그의 부인인 제인 래스럽 스탠포드(Jane Lathorp Stanford)여사가 15세에 죽은 외아들 리런드 스탠포드(Jr Leland Stanford) 2세를 기리기 위하여 설립한 대학입니다.
리런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는 미 대륙 횡단철도건설이 성공한 이래로, 서부 도처에 깔린 철도망의 소유자로서 거액의 부를 쌓아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에는 안타깝게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결혼 후 무려 18년 동안을 아이가 없다가 리런드 스탠포드가 44세 되던 해에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가 바로 리런드 2세입니다. 그들은 뒤늦게 얻은 아들을 정말 사랑하였고, 그를 위해서라면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들 가족은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오랜 사업으로 극도로 피곤해진 리런드가 좀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런던과 파리를 거쳐서 제네바와 베니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아테네까지 가는 긴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 그만 아들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급히 아들을 이탈리아의 플로렌스로 데리고 왔습니다. 장티푸스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한 3주간을 치료를 받아서 병세가 나아진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병이 재발하여 그는 결국 1884년 3월 13일, 16세의 생일을 며칠 앞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그들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절망과 피로감으로 잠 속에 빠져 있었는데., 그는 꿈속에서 아들이 바로 자기 곁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살아갈 목적이 없어졌다.'고 탄식하는 아버지에게 소년은 대답했다.
"아빠, 그런 말씀 마세요. 앞으로의 삶에 많은 일이 남아있지요. 남을 위해서 살으세요. 아빠." 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의 어린이는 모두 우리들의 자녀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탠포드 부부는 자기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어떤 형태로든 공공사업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부터 품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지는 못한 처지였습니다.
꿈속에서 들은 소년의 이야기는 그 동안 탄식하며 슬퍼했던 아버지에게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줌과 동시에, 소년이 마침 대학에 갈 나이였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소년 소녀가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을 만들려는 결심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부인인 제인도 이 생각에 즉각 찬성하였습니다. 이때가 리런드의 나이 60세, 제인의 나이 55세인 때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스탠포드는 즉시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명문 대학들을 일일이 방문하여서 대학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언을 들었습니다.
당시 <하버드 대학>의 학장이었던 엘리오트에게 찾아가서 '학생들에게 무료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들어가는 경비가 얼마나 되는가?'를 물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학교를 세우는 데 필요한 토지나 건물에 대한 비용은 제외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오트 학장은 약 500만불 정도가 들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약 120년 전의 이야기이니까 이 금액은 정말 천문학적인 숫자이지요.
잠시동안 침묵이 계속되고, 부인의 얼굴은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생각해도 너무나 엄청난 금액이었으니까요.
남편인 리런드가 침묵을 깨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제인, 괜찮아요, 우리는 할 수 있어요."
그러자 부인은 미소지으며 남편의 결단에 찬성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1891년에 대학이 설립되게 된 것입니다.
대학 건물 중심에는 스페인의 건축양식을 닮았으면서도 소박한 시골 교회와 같은 기념교회(Memorial Church)가 있습니다.
교회는 제인 여사가 남편이 사망한 후 '남편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의 내부에는 이러한 글귀가 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것은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고통을 통하여서 입니다."
이런 글도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개별자처럼 성취해야할 목표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사실을 이해할 때 그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 인간본성의 지위의 최고 위치에서 그 자신을 끌어내릴 세속적인 행동은 어떤 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종종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우리가 우리 의무를 다하려면 더욱 더--묵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운 돌보심과 지혜로운 인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지금 나이가 아흔 아홉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자기가 직면할 미래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은 어떤 것일까요? 그다지 만족할만하다거나 희망적인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나이가 되도록 무엇하나 확실하게 이루어 놓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인생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무지 생각도 할 수 없는 시점에 지금 아브라함은 서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난 것은 75세가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네 이름은 창대케 되어서 이제 이 세상에서 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엄청난 약속입니까?
사람이 한 번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정말로 이 약속에다가 자기의 미래와 운명을 걸어볼 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향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나아갔던 것이지요.
그 때부터 그에게는 남다른 불안하기 짝이 없는 나그네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안정된 삶을 버리고 낯설고 위험으로 가득 찬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남보다 배고프고, 남보다 고달프며, 남보다 불안에 가득 찬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꿈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모든 어려움을 잘 참고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러한 아브라함의 결심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었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 수가 있었겠지요...
자기에게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으니까요.
문제는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애당초 처음부터 아브라함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좀 나이가 많았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약속을 속히 이루어주실 거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브라함의 기대와는 다르게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런 징조도 보여주시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이 보여주셨던 빛나는 미래는 도저히 그 징조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었지... 그것은 정말 잘못들은 것이지...'
아브라함은 이제 모든 것을 체념하고는 그저 자기가 거느리는 몸종을 상속자로 삼으며 자신의 아픈 마음을 달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생각에 대하여 펄펄 뛰시면서 반드시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에 나올 자가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 가운데 친히 임하셔서 그 약속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입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희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아! 이제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지나보다... 이제 곧 하나님은 약속하신 아들을 주시겠지...'
하지만 다시 하나님은 잠잠하셨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실 징조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초조해졌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나하고 맺으셨던 약속! 만약에 지키지 않는다면 쪼개진 제물처럼 내가 그렇게 되겠다고 스스로를 그 약속에 얽어매셨는데... 하나님은 그 약속마저도 잊으셨단 말인가...'
그 때에 아내 사래가 하나의 제안을 해 왔습니다.
'이제는 더 기다릴 수가 없어요... 더 늦기 전에,,, 당신에게서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니겠어요? 저를 시중드는 애굽여인 하갈을 통해서 당신의 아이를 낳기로 합시다. 더 이상 하나님을 기다리다가는 우리는 죽도 밥도 다 안되고 말 거예요...'
아브라함도 더 이상 기다려 보자고... 하나님은 절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이 아니라고... 그렇게 아내를 설득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을 맞아 들였고,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사래와 하갈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곧 자기가 한 일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이 때에 아브라함의 나이는 팔십 육세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1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성경은 그 동안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지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지 13년이 지난 후에 다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며... 13년 간의 긴 침묵을 깨고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묵묵히 아브라함을 지켜보고 계셨던 이 13년이라고 하는 시간...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왜 그동안 가만히 계셨던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13년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기대와 믿음을 거두는 체념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아마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침묵하실 분이 아닌데... 하나님이 나와 맺은 약속을 이렇게 없었던 것으로 돌리실 분은 아닌데... 한번쯤은 나타나셔서 가타부타 무슨 말씀이라도 있으실 텐데... 그래야만 내가 이스마엘을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가 있을 텐데...'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을 대할 때마다 그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편법의 산물이라는 생각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니까 아브라함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어 갔습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결국에는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반드시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것도 하갈과 같은 애굽의 계집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음 그에게 짝지어 주신 사라를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의 상속자가 세상에 나오게 하겠다고 그렇게 약속을 하셨지만... 결국은 하나님도 어쩔 수 없으신 거라고... 그나마 더 늦기 전에 이스마엘이라도 얻은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라고...'
아브라함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이스마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었다는 것... 그래서 그 누구가 생각을 하더라도 99세가 된 사람이 89세가 된 할머니를 통해서 자식을 낳는 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시간이 되어버리니까... 이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까... 아브라함은 이제 자신이 했던 행동이 정당한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오히려 당당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맞아! 바로 이거야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 힘으로 하는 게 훨씬 좋다니까... 아까운 시간 낭비해가면서 기다릴 필요가 없어! 이제는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야지...' 아브라함이 그의 나이 99세가 되어서 가졌던 생각은 여기에서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처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길을 떠났을 때... 모든 그를 아는 사람으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떠났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불붙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와 맺으신 약속을 이루어 주실 거야...'
아브라함은 이 믿음 하나가지고 길을 떠났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믿음으로부터 아주 멀어져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기다릴 수도 없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이 인생의 계획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점점 더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인도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러한 아브라함을 거울삼아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래! 믿을만한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어...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가 있어...'
우리는 이러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속히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빛나는 미래를 성취하실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떠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정말 나의 모든 것을 다 버릴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결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시지 않는다면... '시간은 점점 더 흘러가는데... 이러다가는 내가 가진 기회가 다 사라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안되겠어... 혹시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나름대로 대비를 해야지...'
마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듯... 슬슬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하고... 나름대로의 방법을 마련하느라고 분주합니다.
만약에 그래도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 때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미 죽은 하나님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곁을 완전히 떠나버리는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근원적인 두려움은 우리 가운데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제쳐놓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익숙해지고 말았기 때문이지요.
'아브람의 구십 구세때에...' 생각해보면 이 구절 속에 참으로 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스마엘을 통해서 가장 근원적인 문제까지도 스스로 해결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침묵이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즐겁기도 합니다.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기의 삶을 뒤흔들어 버리기보다는 하나님이 조용히 계시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지난 13년 동안 하나님을 찾았다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단을 쌓았다든지... 처음에 아브라함이 출발할 때와는 다르게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아브라함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가진 생각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들 속에서 과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라는 랍비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를 마치 하나님과 사람이 술래잡기하는 것에다가 견준 적이 있습니다. 술래잡기라는 것이 술래가 된 사람이 숨은 사람을 찾으러 다녀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사람의 술래잡기에서 하나님이 숨고 사람은 그 하나님을 찾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아야할 술래인 사람이 하나님은 찾지 않고 그냥 집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들이 자기를 찾으러 오지를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서서 술래인 사람들을 찾는 웃지 못할 일들이 요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의 열정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제는 그가 하나님에 더 이상의 기대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더 이상 애타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에게도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삶의 현실들... 우리의 힘으로 도무지 어떻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삶의 문제들... 마치 99세가 된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고 싶어도 낳을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서도 더 이상 하나님을 찾는다든지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한다든지... 이런 믿음이 희미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 이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문제야... 그래도 나는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아... 내 곁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나는 약하고 나는 어리석고 무능하지만.... 나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들 가운데서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3, 14장에 나타난 가나안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군들의 보고... 그들이 보고 온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들의 보고는 둘로 명확히 갈라졌습니다.
열명의 정탐군들은 하나같이 우리는 도저히 그 곳을 정복할 수가 없다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거인족이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정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이들과 견해를 말합니다.
'그들이 우리들 보다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같은 상황에 직면하고서도 이렇게 보고가 반대인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견해... 이 열 명의 정탐군의 보고에는 아쉽게도 하나님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99세가 된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처럼... 우리가 직면한 상황만을 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도 현실은 같은 눈으로 봅니다.
'그들은 참 강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현실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이 믿음! 다시금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을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살아라...'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그렇게 마치 열 명의 정탐꾼처럼... 비참하고 무능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직면한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그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함을 통해서 모든 삶의 고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은 다시금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다시금 너하고 약속을 맺기 원한다. 나는 너를 심히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는 지금 자식도 없는 신세이지만... 그리고 지금 네 나이가 99세여서 모든 희망이 다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러한 너를 심히 번성하게 해 주겠다. 나는 너에게 땅을 주겠다. 지금은 네가 집도 절도 없이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네가 나그네처럼 전전하는 이 가나안땅 전체를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비록 지금은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내가 직면한 현실이라는 것도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희망과 기대를 사라지게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러한 미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한 번 부른 사람은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 한번 하신 약속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어도 이루시고야 마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전능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오늘도 용기와 희망으로 충만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