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44]모처럼 지은 친구 3명의 호호(온계, 갈뫼, 추산)
# 성균관 한림원翰林院을 다녔을 때이니 20년이 다 된 것같다. 그때 공무원 친구를 생각하며 지어준 호를, 그 친구가 지금껏 애용하는 것이 흐뭇한 일이다. ‘바리 우’자의 <원우圓盂> 친구가 두어 달 전에 술을 한 잔 거나히 한 후 귀가하며 “막역한 친구의 호를 지어주면 고맙겠다”며 전화를 했다. 물론 나도 그 친구를 아는 사이이나, 서울과 전북으로 떨어져 사는 통에 40여년간 만난 횟수라야 열 번도 되지 않는다. 고교 3학년때 같은 반으로 ‘제법’ 친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견결堅決하다(태도나 심성이 결기가 있고 굳세다)’ ‘개결介潔하다(성격이 아주 꼿꼿하고 깔끔하다)’는 단어가 생각난다.
그는 현재 완주 봉동에서 ‘친환경 바이오 열병합발전소’(열대과일 껍질이나 우드칩 등을 원료로 전기와 스팀을 생산하여 기업 등에 공급)를 경영하고 있는 건실한 중소기업인이다. 20여년 전에는 크게 고비가 있었는데 용케 그 시련을 이겨냈다고 한다. 4년 전인가, 제2발전소 준공식을 참석했을 때, 나같은 백면서생은 이 거창한 발전소를 준공하여 친환경 에너지를 어떻게 생산하는지 설명을 들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데, 참으로 친구가 용하고 장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사적인 얘기이나 형과 동생, 3형제의 우애가, 사업에 망한 형을 동생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등 주변인들이 보기에 너무 좋아 부러움을 살 정도라고 했다. 또한 여유가 되면 고교 은사를 챙기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하여, 그의 호 첫 글자를 ‘따뜻할 온溫’자를 찍었다. 호의 뒷글자 ‘0재齋’ ‘0암菴’ ‘0촌村’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큰 의미가 없다. 작호作號때, 첫 글자에 무게중심이 80%쯤 실린다 할 것이다. 일단 그의 심성이 따뜻하고(형제 우애, 우정 중시), 직업도 따뜻함과 밀접한 발전업이기 때문에 생각한 것이다. 유난히 막걸리를 좋아해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거의 매일 상음常飮하는 것도 좋은 예이다. 30-40대에 사업에 실패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견결하게’ 일어나 괄목할만한 사업으로 주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신세를 진 누구에게나 그 ‘은혜’를 갚지 않으면 못견디는 ‘개결한’성격의 소유자임을 알고 있다. 호의 뒷글자를 ‘시내 계溪’자로 한 까닭은 시냇물처럼 꾸준히 그의 심성과 그가 하는 사업이 오래도록 흘렀으면(지속되기를) 하는 마음에서이다. 거창하게 이황 선생의 ‘퇴계退溪’을 운운하지는 않는다. 성이 고高씨이므로 온고지신(溫故之新)의 '온'으로 풀이해도 좋겠다. ‘온계溫溪’ 고원영 친구의 사업이 번창하기를 빈다. 아울러 건강이 좋지 않다는 형수(친구의 부인)가 쾌차하기를 빌면서, 그가 이 호를 원우 친구처럼 인생 제2막 ‘제2의 이름’으로 애용했으면 좋겠다.
# 이름만 기억하는(빙氷씨라는 희성) 고교 동창이 4년 전쯤 우거寓居를 찾아와 만나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얘기를 하다보니 두 살이나 위여서 ‘야야’하기가 좀 거시기해 ‘빙형’이라 부른다. 토목직으로 공무원으로 군산시청에서 정년퇴직을 한 후 고향에 집을 짓고 변변한 농사를 짓고 있다. 지황을 수확하여, 조선시대 임금과 사대부만 먹었다는 경옥고瓊玉膏를 손수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시’를 하는 재미를 특기로 삼고 있는 듯하다. 키도 헌칠하고 매너도 좋고 완전 상남자이다. 젊어서 본의 아니게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듯하다. 아무튼, 오래 전부터 그 친구의 호를 지어주고 싶었는데, 엊그제 새벽 무슨 수필을 읽다가 ‘갈뫼’이라는 호를 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갈뫼’는 가을산(秋山)의 우리말이나 그 의미가 자못 깊다.
가을산은 일단 단풍으로 아름답다. 만산홍엽滿山紅葉, 설악산 대청봉에서 공룡능선 등을 바라보라. 붕얼붕얼 꽃을 피운 그 풍광이 얼마나 아름답던가. 또한 가을산은 황금들판처럼 넉넉하고 풍요롭기까지 하다. 도토리 상수리 등 사람이나 짐승에게 유익한 열매도 차고 넘친다. 가을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얼굴에 물드는 홍조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사색과 성찰을 하게 되므로 인생이 깊어진다. 말하자면 ‘꽉찬 산’(滿山)인데, 곧바로 닥치는 북풍한설 겨울을 위하여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빈산’을 준비한다. 낙엽이 없다면 다음해 봄에 어떻게 싹을 틔우겠는가. 그는 ‘죽을 때까지 학생이다’는 식으로 퇴직 후 한국농수산대학 특강과정(약초, 발효, 유통가공)을 모두 밟아,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 듯하다. ‘갈뫼’ 빙강섭 형이 순우리말 호를 제2의 이름으로 삼을 정도로 좋아하면 좋겠다.
# 또 한 친구의 호를 지으려 했는데, 며칠 동안 마땅한 글자가 떠오르지 않다가, 빙강섭 형에게 바친 호 ‘갈뫼’의 한자어‘추산秋山’으로 해도 참 어울리겠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 역시 키도 훤칠하고 마냥 사람이 좋게 보이는 호인이자 상남자에 맞춤이었다. 무엇보다 말수도 적고 남의 말을 듣는 편이며, 사람이 점잖았다. 바둑을 좋아한다니, 언제 한번 두어보고 싶다. 경찰공무원으로 정년퇴직했다는데(3년간 같은 반이 아니고 졸업 45년만에 처음 만나 네댓 번 회동), 진짜 경찰조직에 몇 십 년 동안 몸 담았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같은 뜻의 호를 두 친구가 써도 괜찮을까? 같은 뜻이지만, 한 친구는 한자어로, 한 친구는 순우리말로 부른다면 아무 문제가 안될 것같다.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같은 호를 가진 옛 선인들도 많았다. 문제는 누가 더 한자어 호에 어울릴까, 생각하다 성씨와 더불어 어감이 어울리는 게 좋겠다 생각한 것이다. 이제껏 친구 100여명의 호와 형수들의 당호를 지어주었지만, 같은 호를 두 명에게 바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추산 신귀생나 갈뫼 빙강섭 친구가 서운해햘 까닭은 없지 않을까. 어느 백 살 넘은 철학자의 말처럼, 그들의 인생 제2막이 그야말로 황금시절로 기억되는 삶이 활짝 펼쳐지기를 바랄 뿐이다.
부기: 고원영 친구의 호를 부탁한 오규진 형의 언제 지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은 작호기를 참고삼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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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진 형이 작호作號를 부탁했습니다. 21세기 정보사회시대의 첨병인 과학기술부에서 불철주야 봉직을 하는 바람에 친구들과 ‘소원’한 것에 대해 항상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가진 점잖은 분입니다. 어찌 그에 걸맞는 호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작호할 때에는 먼저 그분의 인품을 떠올린 뒤 그에 걸맞는 글자를 찾고, 그 글자가 쓰였던 문헌이나 전거를 찾습니다. 따라서 옛사람들이 주역을 바탕으로 작호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대판 호는 음운론적으로 읽기 쉽고 부르기 쉬워 기억하기 쉬우며, 그 사람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면 되지 않겠냐는게 저의 우견입니다.
원우圓盂로 짓습니다. ‘둥글 원’자야 선인들의 호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바리때 우’는 어쩌면 오형이 맨처음 사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생소한 글자일 것입니다. 제 식대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우’는 밥그릇(바리)입니다. 절에서는 바리때라고 하지요. “君猶盂 民猶水 盂方水方 盂圓水圓”사발이 모난 것(네모)이면 거기 담은 물의 모양도 방형方形이 되고, 사발이 둥근 것(동그라미)이면 거기 담은 물의 모양도 원형圓形이 된다는 뜻이죠. 임금은 바리가 되고 백성은 물이 된다는 말은 백성의 선약은 임금의 선악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한 우란분盂蘭盆이라는 불교용어를 아시지요? 범어梵語(산스크리스트어) ‘울람바나’의 음역으로 삼보三寶에 불공佛供하여 죽은 자의 괴로움을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조상의 영전에 음식을 바쳐서 추수秋收를 알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큰 일을 처리할 때도 원만하고 신중하게 하여 뭇사람들의 본보기가 되라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그가 좋아하고 늘 사용하는 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