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에서 어의로, 종기 치료의 신기원을 연 백광현의 이야기가 실린 정래교의 <백태의전(白太醫傳)>3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백태의전>에 의하면 백광현(白光炫)은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사람이다. 한의학은 원래 외과수술이 발전하지 않은 의학으로 종기의 치료도 그러했다. 그런 가운데 백광현은 외과적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종기 치료사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왔다.
백광현은 원래 말의 병을 고치는 마의(馬醫)였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원도 별 볼일 없는데, 마의라니 지체가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다. 그는 마의로서 오로지 침을 써서 말의 병을 고쳤고 의서는 보지 않았다. 정통적인 의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침으로 말의 병을 다스리는 기술이 진보하여 사람의 종기에도 시술해보았더니 효험이 있었다. 그는 이내 사람의 종기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전업했고, 수많은 종기의 증상을 보면서 의술이 더욱 정심해졌다. 요즘 말로 하면 임상경험이 풍부해진 것이다.
한데 왜 하필 종기인가? 지금은 종기가 나는 경우도 드물고 병 취급도 하지 않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종기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큰 병이었다. 종기에 관한 한 불후의 명약인 ‘이명래 고약’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 속에서 헤매고 목숨을 잃었을지 모를 일이다.
필자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종기는 큰 병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더하다. 조선시대 효종과 정조는 종기로 목숨을 잃었다. 제왕의 권력도 조그만 종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심지어 조선 전기에는 종기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치종청(治腫廳)’이란 관청까지 있었다. 종기는 참으로 심각한 병이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제 백광현의 종기 치료 장면을 보자.
독기가 강하고 뿌리가 있는 종기는 옛 처방에 치료법이 없었다. 광현은 그런 종기를 보면 반드시 큰 침을 써서 종기를 찢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아서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침을 너무 사납게 써서 간혹 사람들이 죽기도 했지만, 효험을 보아 살아난 사람이 또 많았기 때문에 병자들이 날마다 그의 집으로 몰렸다. 광현 역시 자신의 의술을 자부하여 환자 치료에 더욱 힘을 쏟았고, 이로 인해 명성을 크게 떨쳐 신의(神醫)라고 불렸다.
과격한 치료술이다. 침을 써서 절개해 독을 제거하고 뿌리를 뽑았다니 아마도 칼 같은 것으로 종기의 뿌리까지 절제했을 것이다. 정래교는 이처럼 "종기를 절개해 치료하는 방법은 백태의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였다.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의 신기원을 연 것이다.
정래교는 백광현을 백태의(白太醫)라 부르고 있다. 태의는 곧 어의다. 민간의 무면허 의사 백광현이 어떻게 내의원 의관이 되었는지 그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시대 내의원 의관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대대로 의원을 하는 집안에서 의과를 통과해 내의원 어의가 되는 경우인데, 대부분의 어의가 이에 속하였다. 이것을 본원인(本院人)이라 한다. 둘째는 의약 동참(醫藥同參)이라 하여 사대부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의술만 좋으면 모두 보임될 수 있었다. 백광현은 아마 후자의 길을 밟았을 것이다. 의과방목(醫科榜目:의과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숙종 21년 12월 9일 숙종은 백광현을 각기병을 앓는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에게 보내는데, 이날 <실록>에 "백광현은 종기를 잘 치료하여 많은 기효(奇效)가 있으니, 세상에서 신의라 일컬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볼 때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짐작된다. 백광현이 내의원 의원이 된 것은 현종 때다. <현종개수실록> 11년 8월 16일 기록을 보면 현종의 병이 회복된 것을 기념하여 내의원 의관들에게 가자(加資)를 하는데, 그때 처음 백광현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공이 있을 때마다 품계가 올라 마침내는 현감까지 지낸다. 숙종 10년 5월 2일에 왕은 그를 강령(康翎) 현감에 임명했다가 이어 포천(抱川) 현감으로 바꾸어 임명했다. 의원이 현감이 된 것은 대단한 출세다. 이쯤 출세하면 교만해지게 마련일 텐데 민중을 치료하는 것으로 의업을 시작했던 백광현은 귀한 몸이 된 뒤에도 초발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았다. 부르는 이가 있으면 즉시 달려갔고,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기량을 다 쏟아 환자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보고서야 그쳤다. 나이가 많고 귀하신 몸이 되었다고 게으름을 피운 일이 없으니, 기술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원래 타고난 성품이 그랬던 것이다. 임금의 병을 고치는 귀하신 분이 된 후에도 민중에 대한 헌신적 의료를 잊지 않았다니, 민중의로서의 모습이 약여하지 않은가. 무릇 의원이란 이래야 하는 것 아닐까?
― 출전 :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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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난생 처음보는 이야기입니다. 이런것도 있었군요,감사합니다.
음.. 이명래 고약은 혹시 이가고약을 말하는 건가요?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느낌이...// 흠... 종기를 제거하기위해 수술을 했다라, 충분히 가능하겠네요. 또 곰곰히 생각해보니 중국 삼국시대 화타가 뼈의 독을 제거하는데 살을 해부하거나, 중풍을 해결하기 위해 마취탕을 먹인 후 뼈주위를 시술해서 고쳤다는 말이 기억나네요.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한의학에서 해부는 적지 않게 있었나보군요. 새로 하나 배우네요.
그래서 역사는 하나만 중시해서는 제대로 알수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나중에 검시청이 생기고 실제로 중수무원록을 보면 피가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한 방법외에도 검시를 한 내용도 나옵니다. 그만큼 역사는 또다른 역사를 이어가는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이죠. 한의학이 계속 그자리로 머물렀다면 아마 지금처럼 발전하기는 어려웠을겁니다. 그만큼 꾸준히 발전 연구 했기때문에 최근에는 한국의 한의학이 중국보다 우수한 부분들이 조금씩 나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중국에서 저난리를 치는 거지만....
역사라는게 여러가지가 같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더 흥미로운거 같네요. 많은 부문 중에 전쟁에만 조금 관심을 두었었는데,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둬야겠네요.
새로운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