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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6일(토)
* 시작 기도
(딤전 4:4-5)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주님...
날과 달 그리고 해와 절기를 지키는 것은 그런 것을 지키라고 명한 신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라, 먹지 말라고 하는 것 역시 이를 명한 신에게 굴복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만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으며 이는 주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약하고 미련한 인간들은 이것을 먹으면 안 된다, 저것은 먹으면 된다 하면서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굴복합니다.
이 땅에 여러 신과 많은 주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 계실 뿐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으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데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음을 믿습니다.
하여 이 시간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나의 의 곧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주님과 하나로 연합된 자로 서게 하소서.
우상의 제물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오니 그런 종교적 계명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이 하루도 나를 붙잡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갈 4:12-20
제목 :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 나의 묵상
목회를 하면서 끊이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왜 이렇게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주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고래심줄 같이 강고해지는 것일까?
대적은 할 줄 알면서 왜 그들의 삶은 변화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이 그치지 않았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등록을 하였다고 하자.
그런데 그 사람은 성경도 모르고 예수를 알지 못하지만 교회에 와서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봉사를 하는지 모른다.
그를 향한 사람들의 칭찬이 그칠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이렇게 자기의 온 힘을 다해서 섬기고 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교가 있다.
그 종교들 나름대로 궁극적인 진리가 있다.
그 진리란 자기들의 경전을 아는 지식, 그 경전을 깨닫는 것 그리고 깨달은 대로 실천하는 수행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결단코 이들과 그 궤를 달리한다.
다른 종교를 폄훼해서가 아니라 진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함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지식, 깨달음, 수행과 실천에 있지 않고 존재(being)에 있다.
따라서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복음은 배우고 실천하는 영역을 넘어 갈라디아 1:16절에 나온 말씀처럼 ‘그 아들 곧 그리스도가 믿는 자 속에 나타나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갈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존재요 진리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언성을 높이며 강조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리의 핵심이요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부족하여 또 다른 그 무엇으로 채우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안타까움이다.
그저 단지 그들의 삶이 진리에 따라가지 못해서 이렇게 언성을 높이며 다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하고 할례가 필요하다는 거짓 교사들의 말에 넘어가는 그 어리석음이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그의 아픔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요 또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이다.
12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와 같이 된 것처럼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다.
이는 철저히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이방인이 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 속에 아들을 나타내 보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인의 옷을 벗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의 그릇(행 9:15)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 너희들도 유대인이 가르치는 율법의 종이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참 자유자 곧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며 거기에 무엇을 섞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온전히 존재이신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삼고 다른 것에 희석되지 않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무언가를 섞으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나의 義, 곧 자기주장의지에 있는 것이다.
이는 내가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예수를 이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아들의 존재가 믿는 자 안에서 드러나는 ‘계시된 복음’을 전했다.
(갈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런데 그 후에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이들에게 가르치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가르치는 율법주의는 ‘존재’가 아닌 ‘행위’에 기반을 둔다.
이는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이며 주장인 것이다.
오늘 본문 1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의 원초적 욕구이며 야망 곧 헬라어 ‘휘브리스’를 꿰뚫어본다.
이는 자신의 야망에 기초를 둔 주장이나 신념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재천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는 결국 자기를 믿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율법주의의 대명사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 결국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자 했다.
이런 그들의 음흉한 야망을 꿰뚫어보신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지 않는가?
(마 23:2-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신앙생활이나 사역의 열심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그 중심을 통해서 참과 거짓이 가려진다.
나는 없어지고 오직 존재로 계시는 주님만이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열심이다.
서두에 이야기 했던 것처럼 우리 사람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를 알지 못함에도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면 그 사람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를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이는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나 똑같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모든 봉사나 열심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만드는 악에 다름 아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목회를 하면서 내가 던졌던 질문이 얼마나 허망하고 헛된 것이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목사인 나 역시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설교를 듣고 좀 삶이 잘 유지되는 사람이 보이면 내가 우쭐해지지 않았던가?
내가 잘 가르쳐서 그렇다고 판단해서 말이다.
나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내 안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유대주의, 율법주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가 모세의 자리에 앉으려 하고,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나의 의는 하늘을 찌른다.
이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고백한다.
나는 죽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을 이용해서 나를 드러내고자 했던 죄인 중의 괴수이다.
이 시간 세례 요한의 고백이 내 심령을 찌른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정말 나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쇠하고 죽을 수 있는가?
나를 비롯한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알고 있으며 십자가를 자랑하고 노래한다.
또한 그 십자가를 증거하고 나아가 그 십자가에 내가 죽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나를 의식하여 나를 주목하고 나를 삶의 중심에 놓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요 유대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신앙생활은 자기를 고양시키고 자아를 실현시키는데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율법주의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해산하는 어머니의 고통으로 이들이 복음의 참 진리로 돌아오기를 호소하고 있다.
바울은 그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너희가 할 수만 있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려고 했던 자들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도대체 너희가 가졌던 그 복이 어디에 있느냐고 호소한다(15절).
그들의 복은 다름 아니라 곧 존재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복음의 핵심이요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들이 그 엄청난 복을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주의로 다시 돌아가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인 저들을 볼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향하여 외친다.
한 때는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할 만큼 바울을 극진히 섬겼던 이들이지만 진리로 인하여 원수가 되고 만다.
이 또한 세대를 넘어서 복음전도자들이 겪는 현실이요 실제상황이다.
천하의 사도 바울도 복음으로 인하여 이런 고난을 받고 있음이 또한 나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한 때 나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기뻐하며 내게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극진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런 이들을 위하여 해산의 고통으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바울의 열심 앞에서 나는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그들을 던지고 도망 나왔기 때문이다.
숫자나 사이즈 재정능력이 아니라 참 복음이 온전히 증거되기를 바란다.
하여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파되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나와 모든 주의 백성들 그 심령 속에 존재로 나타나 아버지의 영광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혼이 주의 은총을 입어 여기까지 오게 됨을 감사하나이다.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나 오직 주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이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나에게 주신 복이 어디에 있는지 날마다 이 마음속에 새기게 하시고 참 복이신 아들의 생명을 누리는 자 되게 하소서.
땅의 것에 착념하여 온 마음을 다 빼앗기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창세전 언약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복을 오늘도 사모하며 하늘의 복이 어떤 것인지 오늘도 체험하며 누리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