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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리기사님 좀 부르려고요. 여기가 어디냐면요....”
준영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고 주위를 살피며 통화를 했다. 지금 시각 오전 12시 47분. 잘하면 음주 단속에 걸릴 수도 있는 시각. 이 야심한 시각에 갑자기 왜 바다는 보고 싶다는 건지. 전 여친도 그렇게 술만 마셨다하면 바다바다 타령을 하더니.... 준영은 무사히 대리기사 전화를 끊고 아파트 단지에서 연하늘색 가디건을 걸쳐 입은 채 두 팔을 감싸고 걸어 내려오는 서진을 왠지 허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런 얼굴로 쳐다봐?”
“아녜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말해봐, 뭐. 대리기사가 없데?”
“아뇨. 불렀어요 근처에 있다고 10분 안에 도착한데요”
“그래.”
급하게 나오느라 등이 훅 파인 원피스인 채로 새벽의 밤거리를 걸어 나온 서진. 결국 음주단속 걸려 면허 정지 당하지 않도록 준영이 대리기사를 부르는 사이에 옷을 바꿔 입고 나오도록 얘기했더니, 고작 갈아입고 나온다는 옷이 또 짧은 치마에 타이트한 티셔츠, 그리고 얇은 하늘색 가디건이라니. 두 팔을 꽉 꼬아 팔장을 끼곤 계속해서 ‘추워추워’를 입버릇처럼 말하며 준영이 신겨준 플랫슈즈 신은 발을 동동거리며 구르는 서진. 가디건 단추를 하나하나 잠궈주며 준영이 뚱한 얼굴로 궁시렁거린다.
“춥다면서 갈아입고 온다는 게 왜 이런 거에요? 패딩이라도 걸치고 오지”
“.........너 원래 아무 여자한테나 이렇게 막 친절해?”
“아니거든요?”
“그리고 거긴 가슴이야 바보야”
서진의 가디건 단추를 잠궈 주다가 무의식적으로 가슴 쪽 단추에 손이 간 준영. 그녀의 말 한마디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손을 빛의 속도로 떼어낸다. 그리곤 등을 휙 돌려 서며 괜히 무안한 듯 소리 지른다.
“아 그러니까 좀 알아서 잠그고 다니라고요! 그거 열고 있다고 더 섹시한 것도 아니구만!”
“뭐?”
“내 말이 틀렸나? 한 개도 안 섹시하네 뭐”
그렇게 말하고 씩씩거리며 달아오른 열을 식히고 있는데, 순간 팔 쪽에 와 닿은 부드러운 촉감. 쿵-하고 심장이 떨어지듯이 그대로 동공을 멈춰버린 준영. 마치 자신의 감각을 의심이라도 하듯이 눈동자를 불안정하게 흩트리며 애써 태연한척 묻는다.
“지,지금 뭐하는 거에요”
“아....그냥 좀 어지러워서”
그렇게 말하며 준영의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서 있는 서진. 자연스럽게 준영의 팔에 밀착한 서진의 가슴이 와 닿자 당황한 준영이 괜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도로 쪽으로 옮긴다. 그러면서 은근히 팔을 빼내려하자 그 팔에 단단하게 팔장을 끼며 힘이 풀린 듯 다리를 휘청거리는 서진.
“아 나 아까 술을 너무 마시긴 했나봐...”
하며 가디건 단추를 두어개 풀고 브이넥 티셔츠의 목 부분을 살짝 잡아 늘리는 서진. 덕분에 187cm의 신장을 지닌 준영의 아래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온 서진의 바스트 라인. 순간 흠짓 놀라며 서진의 팔로부터 자신의 팔을 다급히 빼내곤 도로를 향해 뛰어가며 어색하게 웃는 준영.
“어? 저분이신가보다- 제가 가서 직접 모셔올게요. 기사님!! 기사님 여기-!!!”
귀까지 빨개져서 저 멀리 뛰어가는 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팔장을 끼고 다리를 교차해서 꼬아 선 서진이 순간 정색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뭐? 한 개도 안 섹시해? 까불고 있어....”
멀리서 바라보니 준영이 기사님인줄 알고 부르러 간 남자는 그냥 집으로 귀가하는 남자.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더니 초록색 후드를 훅 뒤집어쓰고 다시 캥거루처럼 앞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다시 서진에게로 뛰어온다. 그러더니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하는 준영.
“저 분 아닌가봐요”
“난 아닌 줄 알았어”
“.....알았으면 가기 전에 좀 붙잡지”
“붙잡기도 전에 너가 먼저 뛰어갔잖아 이 멍멍아”
“..........내가 왜 멍멍이-”
“어? 저분이네 기사님. 여기에요-”
서진이 손을 번쩍 들어 도로쪽으로 환하게 웃자 무언가 따지려했던 준영이 등을 휙 돌려 도로 쪽으로 꾸벅 인사를 하는데.....아무도 없다? 다시 고개를 돌려 서진을 바라보니 킥킥 거리면서 통쾌한 듯 웃고 있는 서진의 모습. 아놔....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준영.
“왜이래요 나한테?”
“어? 야 이번엔 진짜 기사님 왔다. 빨리 키 넘겨드려”
“뻥치지마요 이 뻥순이같으니라고.”
“진짠데?”
“한번 속지 두 번 속나? 나 그렇게 띨띨한 놈은 아니거든요?”
“저 대리기사 부르셨죠?”
“아 넵! 맞습니다”
순간적으로 들려온 아저씨의 목소리에 바로 군인처럼 등 돌려 대리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공손하게 차 키를 넘겨드리는 준영. 그 모습을 보며 풉-하고 웃어버리는 서진. 대리기사님이 차를 향해 걸어가시는 동안 씩씩거리며 자신을 힐긋 쏘아보듯 내려 보는 준영의 귓가에 까치발을 바짝 들고 선 서진이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인다.
“멍멍아 너 좀 귀엽다”
뭐지....싶어 뒷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려는데 금방 또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신의 차를 향해 뛰어가는 서진의 뒷모습. 대리기사님에 의해 시동 걸린 채 라이트 켜져 있는 서진의 승용차. 그 뒷좌석 쪽에 서 있는 서진이 준영을 향해 빨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인다. 으씨...하며 씩씩 거리면서도 그녀의 손짓 하나에 앞주머니에 두 손 넣고 못 이기는 척 차로 향해 걷기 시작하는 준영. 서진이 들어간 차문 반대편으로 앉아 문을 쾅 닫는 준영. 그리곤 대리기사에게 ‘오이도요’라고 짤막하게 외친다. 주머니에서 꺼낸 두 팔을 꼬아 팔장을 낀 준영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주행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후각으로 와 닿은 달콤한 샴푸냄새. 사르륵 쏟아져 내린 서진의 단발머리가 오른쪽 턱 끝에 머물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준영의 오른쪽 어깨에 서진의 작은 머리가 폭 기대어있다. 길다란 속눈썹이 아래로 내려와 앉아있고, 준영은 그런 서진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준영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서진의 붉은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나 졸려”
“나도요”
“도착하면 깨워줘”
“나도 졸리다니까요?”
“안녕”
하....뭐 이런 제멋대로인 여자가 다 있지? 황당한 얼굴로 서진을 내려다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금방 곤히 잠들어버리는 그녀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와버리는 준영.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날 믿어서 이러는 건지, 아님 전 남친한테 차인 아픈 상처 때문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져서 나한테 화풀이 하는 그런 건지.... 전자쪽이라면 어차피 나나 이 여자나 서로 피차 애인 없는 사이니까 좋은 감정으로 볼 수도 있는 건데 만약 후자 쪽이라면..... 잠시 뭔가를 상상해 보듯이 골똘한 표정이 되는 준영. 그러더니 서진이 기대지 않은 쪽의 팔을 확 들어 주먹으로 허공을 휘 젓는다. 입으로는 ‘18새끼’소리를 내면서.
“지금 저한테 그러신 겁니까?”
빽밀러로 준영을 바라보고 있던 이상한 눈초리의 대리기사가 한마디 말을 건넨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준영이 두 팔을 내저으며 소 같은 눈이 되어 변명하듯이 소리쳤다.
“아, 아뇨. 기사님한테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
고개를 갸웃하다가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운전을 하는 기사. 창문 밖을 쳐다보며 괜히 딴청 피우던 준영이 작게 한숨을 푹 내쉰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오늘 또 아침 8시 출근인데 비몽사몽 하겠구만. 하.....내가 대체 왜 이런 일에 엮여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거야. 진짜 액땜한번 으리으리하게 하는구만 김준영. 손으로 차가운 창문을 만지며 애써 감기려는 눈을 어렵사리 뜨고 있는 준영. 준영의 팔을 인형 안듯이 두 팔로 꼭 끌어안고 곤히 잠들어버린 서진 덕분에 팔이 저려올 지경이지만 일단은 도착할 때 까진 참는걸로.
.
.
.
“도착했습니다”
차키를 건네주며 말하는 대리기사의 목소리에 준영은 어렴풋이 감겨놓았던 두 눈을 떠냈다.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를 향해 잠시 당황한 듯 서진을 바라보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몇 장을 건네주며 키를 건네받는 준영.
“수고하셨습니다”
“예 바다 구경 잘 하세요~”
“네”
넉살좋게 웃으며 내리는 기사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준영이 살짝 손을 들어 서진을 깨우려다가 잠시 허공에서 멈춘다. 다른 손으로 천정에 있는 라이트를 살짝 켜보니 서진의 볼에 눈물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눈 밑으로 살짝 번져있는 팬더 같은 아이라인과 함께. 하...소리를 내며 그녀를 깨우려던 손을 거두려다가 그녀의 코와 입술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올려주는 준영. 그리곤 잠시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져본다. 아까 술집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 순간적으로 쿵쿵 거리는 심장. 잠시 그 생각에 멍해져있는데 부스스 소리를 내며 눈을 뜨는 서진의 옆 모습에 놀란 준영이 후드를 다시 급히 뒤집어쓰고 두 눈을 질끈 감아 자고 있던 척을 한다.
“뭐야.... 바다 도착했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서진이 그렇게 말하며 준영의 어깨로부터 몸을 일으킨다. 그 모습에 눈을 부스스 뜬 준영이 팔을 움직이려다가 순간적으로 온 어깨 저림 통증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다. 그리곤 자신을 쏘아보는 퉁퉁 부은 얼굴의 서진을 마주하는 준영.
“야. 너도 잤어?”
“........나도 졸리다고 했잖아요 아까”
“얘가 미쳤나봐. 기사가 이 차 아무데나 막 끌고 가버리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 책임감도 없이 잠들어버리고 난리야 난리가. 니 차 아니라고 막 이렇게 함부로 대할거야?”
“아니.....저기”
“그리고 여자가 니 옆에서 이렇게 잠들었으면 좀 보호해주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어쩜 그렇게 나 잔다고 같이 잠들 수가 있어? 너무한다 진짜”
“..........”
“넌 진짜-”
계속 말을 이으려는 서진의 입술에 준영의 입술이 다급히 덮여진다. 놀라 두 눈이 동그래진 서진을 뒤로하고 왼손으로 서진의 뒷통수를 붙잡은 채 고개를 틀어 깊게 키스하는 준영. 뜨거운 준영의 호흡이 들어와 어지럽게 서진의 입술을 탐하자 몸을 바둥거리며 준영의 가슴을 밀어내려는 서진. 그런 서진의 가느다란 두 손목을 준영의 큰 손이 양 옆으로 붙들고 서진의 몸을 차 문 쪽으로 밀어붙인 채 더 깊게 입맞춤을 한다. ‘음음!!!’소리를 내며 두 눈을 꽉 감은 서진이 조금씩 침착해지며 바둥거리는 손목의 힘을 점점 떨어트릴 때 쯔음, 준영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떨어져나갔다. 그리곤 자신을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고 있는 숨이 찬 서진의 얼굴을 향해 나지막이 준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 잔소리하면 확 안아버릴꺼니까 그만 입 좀 다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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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편씩은 정주행하려고 노력중입니다.
댓글 달아주신 성개냥b님 묘한 느낌이 난다니, 왠지 칭찬같은 느낌인데요 감사합니다 :)
Thdi님 처음에 다닥붙여서 쓰기 시작하다보니 이제 와 수정하는게 좀....죄송합니다 대신 진도는 좀 나갔지요? ;D 댓글 감사해요~
2초동안님 준영도 서진도 둘 다 거시기한(?)사람들끼리 모여 어떻게 변화되는지 잘 지켜봐주세요.
흥미진진해지도록 열심히 상상력 부풀려 보겠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시간 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동경로.
첫댓글 이번 편도 잘봤어요ㅋㅋㅋㅋㅋ준영이 박력!
아니예요~ 제가 핸드폰으로 봐서 더 그럴수도있어요~ 글 너무 재밌어요!!
첨으로 서진이 앞에서 준영이 강한 모습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