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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다냄새 좋다!”
플랫슈즈를 신은 발로 통통거리며 걷고 있는 서진이 두 팔을 양 옆으로 펼치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 바람이 찬데... 몸을 잔뜩 움츠리며 서 있던 준영이 오이도의 빨간 등대 쪽으로 마구마구 뛰어가는 서진을 불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자기가 지금 치마 입었다는 거 잊어버린 거 아냐? 무슨 여자가 저렇게 천방지축이야? 자신과 입을 맞추고 난 뒤 서진과 분위기가 서먹해 지지는 않을까 사뭇 걱정했던 준영은, 곧 자신의 걱정이 쓰잘데기 없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잠시 동안 머물렀던 정적 끝에 그녀는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이 다시 준영의 볼에 ‘츄-’소리까지 내며 귀엽게 입술을 맞췄고, 팬더같이 번진 아이라이너의 눈으로 싱긋 눈웃음까지 치며 ‘너 키스 좀 하네? 매력있어-’라고 말하더니 별안간 물개박수를 치며 발랄하게 ‘맞다맞다 우리 바다 구경해야지 빨리 나가자!’하곤 지금 저렇게........자유부인처럼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거다.
“하아- 서울에서 이렇게 가까운 바다가 있다니 몰랐어. 우리 여기까지 한시간정도 걸렸나-?”
라고 말하며 뱅그르르 준영쪽으로 몸을 돌리던 서진이 별안간 스텝이 꼬여 그대로 철퍽 엎어져버리고 만다. 그 모습에 놀란 준영이 궁시렁거리던 걸 멈추고 다급히 서진에게로 뛰어와 엎어진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소리쳤다.
“아니 무슨 여자가 이렇게 덜렁거려요! 바다 구경을 왔으면 좀 조신하게 다니던가!”
“.........흑”
“지금 울 때에요? 자기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져놓고. 하 나 참.”
“추워”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팬더같은 눈에서 검은 눈물을 툭 떨어트리는 서진. 춥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리던 준영이 엎어진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곤 그녀의 두 손을 벌려 손에 묻은 흙을 털어주더니, 두 팔을 올려 자신의 초록색 후드를 벗어낸 뒤 서진에게 무심하게 말한다.
“팔 올려요.”
잠시 준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서진이 추운지 파르르 떨던 입술을 꾹 다문 뒤 고분고분 두 팔을 하늘로 올린다. 자신의 후드티를 서진에게 쑥 입혀주고 후드 모자를 작은 서진의 머리에 푹 씌워 버린 뒤 그 머리를 마구마구 헝클여 흩트리는 준영. ‘으그-!’ 웬수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준영이 장난을 걸자 ‘아, 야야!!’하며 두 팔을 허공에 마구 흔드는 서진. 긴 팔로 서진의 머리를 멀찌감치 떨어트리고 자신을 때리지 못 하도록 거리감을 두며 아이처럼 웃고 있는 준영.
“내가 바다까지 데려와줬으니까 밥 사요”
준영의 말에 허공에 휘두르던 두 팔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두 팔로 팔장을 끼며 금방 또 새침한 표정을 짓는 서진. 잠시 생각 하는 듯 하더니 등을 휙 돌려 상가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중에서 환하게 불 켜져 있는 조개구이 집 하나를 향해 손가락을 뻗더니 준영을 향해 따라오라는 듯한 제스츄어를 취하며 말한다.
“저기 가자”
.
.
.
“조개구이 2인분이랑 공깃밥 하나, 사이다도 한 병 주세요.”
“술은 안 하시구요?”
“너 술 안 마셔?”
“서울로 돌아 갈 때는 내가 운전해야죠.”
“그럼 청하 한 병만 주세요. 나는 마실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인심 좋은 얼굴의 조개구이 사장님께서 주문을 받은 뒤 테이블을 떠나 부엌으로 향한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준영이 자신의 후드를 뒤집어 쓴 채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서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간다. 준영의 큰 손이 다가오자 부르던 콧노래를 멈추고 가만히 준영을 바라보는 서진. 그런 서진의 눈가에 번진 화장을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러 지워주는 준영. 잘 안 지워지자 손 닦는 물티슈를 그녀에게 내밀며 말한다.
“지금 완전 팬더 같은 거 알죠?”
“뭐? 대박”
“화장실가서 거울보고 좀 지우고 와요”
“응”
준영의 물티슈를 받아들고 화장실로 고분고분 걸어가는 서진.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웃음이 지어지는 준영.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니 어느덧 새벽 1시 50분이다. 전화를 걸어 자고 있는 기사 동료에게 오전 근무 오후 근무를 교대해달라고 부탁해 놓은 후 전화를 끊는 준영. 낮게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보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혼자 생각을 한다. 뭔가 좀 급진적으로 상황이 흘러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 듯. 어제 오늘 이틀 동안 일어난 다이나믹한 일들을 떠올리며 생각 정리를 하고 있는데 술과 음료수, 그리고 서진이 자리로 왔다. 앉으며 자연스럽게 청하 뚜껑을 따려는 서진의 손을 자제시키는 준영.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서진에게 준영이 말한다.
“진짜 여기서 술 더 마셔도 괜찮아요?”
“에이, 청한데 뭐. 도수도 낮으니까”
“.......사장님! 참이슬 한 병 주세요!”
“어? 너 술 마시게?”
“이거 먹고 차에서 한숨 눈 붙이고 가면 되니까. 뭐 아침에 일찍 출근해요?”
“아니 난 프리랜서라서 괜찮은데, 너가 걱정이지”
“나 오후근무로 바꿔서 점심 먹고 출근하면 되니까.”
말을 몇 마디 나누고 나니 조개구이와 참이슬이 세팅이 되었다. 잔을 두 개 나란히 놓고 준영의 잔엔 참이슬이, 서진의 잔엔 청하가 졸졸졸 따라졌다. 물 컵 두 개를 나란히 놓고 한 잔엔 물이, 한 잔엔 사이다가 따라졌고 그 둘은 별 다른 말없이 동시에 허공에서 술잔을 부딪히며 시원하게 원샷을 했다. ‘아으..’소리를 내며 사이다를 들이키는 서진, 왼손과 오른손에 잡은 젓가락으로 조개 껍질 속 살을 끄집어낸 준영이 살 하나를 집어 내 서진의 앞접시에 툭 놓아준다. 그 조갯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서진이 다시 준영을 바라보자 다른 조개껍질을 집어 자신도 조갯살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서진을 마주 바라보는 준영.
“왜 안 먹어요”
“먹어”
젓가락을 들어 자신의 앞에 놓인 조갯살을 집어 초장에 찍어 먹는 서진. 그런 서진을 보며 픽 웃는 준영이 서진의 빈 잔에 청하를 마저 따라주며 말한다.
“혼자서 어른인척은 다 하면서 초장 범벅으로 먹는 거 보니 완전 입맛은 초딩이네 초딩이야”
“뭐?”
“진짜 어른이라면 이 해산물의 고유한 맛을 즐기면서 먹어야죠. 안 그런가?”
“나도 먹을 줄 알거든?”
“그럼 먹어봐요”
“....됐어. 유치하게 이런 걸로 너랑 투닥거리고 싶지 않아”
“.......그쪽 이름이 이서진이랬죠? 동신아파트 104동 1002호에 사는.”
준영의 낮은 목소리에 순간 눈이 동그래진 서진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참이슬 병을 들어 자신의 빈잔을 마저 채우곤 한잔 휙 들이킨 준영이 물을 한모금 마시며 말을 잇는다.
“나이. 물어보면 안 돼요?”
“안 돼”
“왜요?”
“여자 나이를 묻는 건 실례야”
“실례는 무슨. 우리 이미 키스도 하고 할거 웬만큼 다 했-”
준영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는 서진. 그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준영의 후드를 훅 뒤집어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잇는다.
“할 거 다하긴! 누가 들으면 우리가 잠이라도 잔 줄 알겠다 이 바보야”
다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서진의 손목을 붙잡은 뒤 장난기 서린 얼굴로 씨익 웃으며 말 건네는 준영.
“못 잘 건 또 뭐야. 나 잘해요”
“뭐, 뭘 잘 해 이 멍충아!!!”
“아마 내가 어제 그 술집 형님보다 열배는 더 잘 할 걸? 나 어리잖아”
“이게 진짜 미쳤나봐! 야! 너 조용히 안 해?”
부엌 쪽에 있는 조개구이 집 직원들과 한쪽에 앉아있는 다른 테이블 손님들의 눈치를 보며 준영의 입술을 틀어막기에 바쁜 서진. 진땀 빼는 그녀를 향해 푸-하고 웃음이 터져버린 준영이 ‘알았어요 안 할게, 안할게’를 반복해 말하자 그제야 의심서린 눈초리로 제 자리에 얌전히 앉는 서진의 모습이 보인다. 여전히 웃음으로 가득한 준영의 얼굴과 그와 완전 상반되는 서진의 울그락 불그락한 모습.
“의외네요. 여태까지 나한테 한 모습으로만 보면 완전 야생마처럼 남자들 휘어잡을 것처럼 보이더니.”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
“밥이 아직 안 나왔잖아 사장님- 여기 공깃밥이 안 나왔어요!”
“아 네- 지금 나갑니다!”
준영의 넉살좋은 모습에 가만히 그를 넋 놓고 바라보던 서진. 곧 준영의 후드 앞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준영을 힐긋 쏘아본다. 공깃밥 하나와 작은 홍합탕을 서비스로 주고 가는 사장님. 감사하다며 넙죽 인사하는 준영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서진의 얼굴이 미묘하게 표정을 바꾼다. 왠지 좀 뭔가 누그러진 얼굴이랄까. 수저를 들어 팍팍 복스럽게도 밥을 퍼먹는 준영. 많이 배고팠나 싶어 괜히 머쓱해진 서진이 그의 빈 물 컵에 물을 마저 채워준다. 그렇게 한참을 별 다른 말없이 밥 먹기에 초 집중하던 준영이 마지막 밥 한 수저를 입에 넣고 나서 조개구이 속 조갯살들을 열심히 발라내 그 중 하나를 자신의 입에 쏙 집어넣고 다음 조갯살 하나에 초장을 푹 찍어 서진의 입술 앞에 쑥 내밀어주는 준영.
“뭐”
“먹으라고요”
“내가 왜 너가 먹여주는 걸 먹어야 되는데?”
“나 먹는 거 쳐다보고만 있는 게 미안해서 그렇지. 별로 배 안 고팠잖아요.”
나 때문에 여기 온 거 맞죠?하는 그의 눈에 잠시 흠-하고 낮은 헛기침을 내뱉은 서진이 새초롬한 얼굴로 살짝 입술을 벌려 그가 내민 초장이 묻은 조갯살을 받아먹곤 조금씩 조금씩 우물거린다. 그 모습을 보며 씨익-하고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는 준영. 그런 준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져있던 서진이 곧 들려온 준영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잠시 호흡을 멈춘다.
“평소 목소리는 이렇게 이쁜데 왜 택배 전화 할 땐 그렇게 남자같이 받았어요?”
“켁켁-”
씹고 있던 조갯살이 목에 걸린 듯 켁켁거리는 서진. 그녀의 모습에 서진이 채워 준 물컵을 집어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대고 물을 목으로 넘겨주는 준영. ‘휴우-’소리를 내며 겨우 진정이 된 서진을 바라보며 무심한 듯 또 한 번 말을 건넨다.
“진짜 담배 펴서 목소리 허스키하게 낸 게 아니라 내가 남자라서 무서워서 그런 거죠?”
“누, 누가 그래 무섭다고!”
“아니 뭐, 요즘 하도 세상이 험하고 흉흉하고 그러니까....”
“........”
“그거 되게 잘하는 거에요. 남자가 여자 지켜줄 수도 있지만 여자가 먼저 알아서 자기방어진을 어느 정도는 칠 줄도 안다는 거. 남자 시각으로 봤을 땐 진짜 매력 있고 괜찮은 여자구나 싶으니까.”
“........치”
“근데 앞으론 아무 남자한테나 나한테 한 것처럼 유혹하지 마요.”
‘으씨-’하며 장난스럽게 준영에게 주먹을 휘두르려하는 서진. 그 손목을 공중에서 탁 붙잡은 준영이 서진을 바라본다. 허공에서 만난 두 사람의 시선. 쌍꺼풀 없는 준영의 눈이 서진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의 동공에 비춰 보이는 자신의 작은 모습. 순간 멈칫한 서진이 준영의 시선을 피한다. 그런 서진의 손목을 붙든 채로 흔들어 서진의 고개가 자신을 향하도록 놓는 준영.
“나 봐요. 딴 데 보지 말고”
“.........왜 그래 갑자기 밥먹다말고”
“나보라구 이서진”
뜬금없이 이름 세 글자를 전부 말하는 준영의 목소리에 동공을 준영에게로 맞추는 서진. 서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준영이 말한다.
“나 이서진 너 맘에 들어. 그래서 내 여자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 전에 조건이 있어”
“...뭐?”
“솔직히 오늘 바다에 오고 싶다고 그래서 난 가기 싫다는 생각이 100퍼센트 중에 80퍼센트는 있었는데 다 꾹 참고 여기까지 왔어.”
“............”
“난 너가 오늘 바다에 오자고 한 이유가 날 꼬시기 위해서든지, 전 남친하고 헤어진 충격 때문에 그래서인지 뭐 그런 이유 따윈 복잡하게 생각 안 할 거야 대신!”
대신?이라고 암묵적으로 묻는 서진의 두 눈동자.
“앞으로 내 앞에서 니 전 남친 얘기 꺼내지도 말고 실수로라도 하지 마. 난 너 과거 따위는 관심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
“그리고 앞으로 서로 꼬박꼬박 존댓말 써. 나도 이렇게 반말하는 건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테니까”
“왜?”
“난 내 사람한테 친구처럼 막 대하기보다 좀 존중 해 주고 아껴주고 싶으니까.”
“.........”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
“알았다는 건........?”
조금은 기대에 찬 눈으로 준영이 서진을 바라본다.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준영의 입술에 ‘쪽-’하고 귀엽게 입맞춤을 하는 서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준영에게 서진이 새침하게 고개 돌리며 대답했다.
“너 하는 거 봐서 앞으로 만나주든가 말든가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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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개냥b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힘이 번쩍나서 한편만 올리려고 했는데 또 한편 들고 왔네요. :)
저녁 식사 맛있게 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경로.
첫댓글 둘다 성격 귀여워요 앞으로 너무 기대되는데요ㅎ? 빨리 다음편 보고싶어요~
완전 멋진 방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