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번역] 5:1 "주님, 우리가 겪은 일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 주십시오.
5:2 유산으로 받은 우리 땅이 남에게 넘어가고, 우리 집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5:3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가 되고, 어머니는 홀어미가 되었습니다.
5:4 우리 물인데도 돈을 내야 마시고, 우리 나무인데도 값을 치러야 가져 옵니다.
5:5 우리의 목에 멍에가 메여 있어서, 지쳤으나 쉬지도 못합니다.
5:6 먹거리를 얻어서 배불리려고, 이집트와도 손을 잡고 앗시리아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5:7 조상들이 죄를 지었으나, 이제 그들은 가고 없고, 우리가 조상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5:8 종들이 우리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들 손에서 우리를 구해 줄 이가 없습니다.
5:9 먹거리를 얻으려고, 쫓는 자의 칼날에 목숨을 내겁니다.
5:10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살갗이 아궁이처럼 까맣게 탔습니다.
◈ 주해
1.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대한 소망마저 끊어진 절망에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며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움을 통하여, 주님을 나의 기업으로 삼고 주님의 구원을 기다린다.
1) 그러나 “쓰레기와 폐물이 되었다”고 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살필 때까지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지만, 예루살렘의 참상은 여전함으로 슬픈 애가는 계속된다.
2. 백성들 중에서 가장 큰 잘못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에게 있다.
1) 그들은 백성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심판의 말씀 대신에 평안과 회복과 축복만을 말했다. 백성들의 잘못은 헛된 도움인 애굽을 바라보고 바라본 것이다.
2) 우리의 끝이 가까이 왔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다.
3) 백성들은 왕의 그늘에서 보호 받기를 원했지만 그는 덫에 걸리고 만다.
4) 결국 종말에 이른 시온에게 주님은 “형벌을 다 받았다”고 하면서 회복을 약속하신다.
3. 5장에서 예레미야는 “우리(언약 백성)”를 주어로 사용하여 공동체적인 애가를 부른다.
1) 언약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당한 재난을 고백한 후에,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면서 애가는 끝난다(19-22절).
4. 예루살렘이 겪는 재난은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언약 백성은 우리가 겪는 치욕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살펴주시기를 간구한다. 아이들이 사고를 자초한 후에 부모의 도움을 구하듯이...
5:1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5:2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1) 나라, 땅, 집을 빼앗긴 것도 고통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이방인에게 빼앗긴 것은 치욕이다.
2) 그래서 언약 백성은 “기억하소서, 살펴주소서”라며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2. 언약 백성은 고아와 과부처럼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를 아뢴다.
[새번역] 5:3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가 되고, 어머니는 홀어미가 되었습니다.
5:4 우리 물인데도 돈을 내야 마시고, 우리 나무인데도 값을 치러야 가져 옵니다.
5:5 우리의 목에 멍에가 메여 있어서, 지쳤으나 쉬지도 못합니다.
1) 언약 백성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가족들이 죽고 해체되는 재난을 겪었다.
2) 바벨론에 의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여서, 자기 소유의 물과 나무도 값을 치러야 구할 수 있었다.
3) 더구나 목에 매여 있는 멍에가 무겁고 지쳐서 쉬고 싶으나 쉬지도 못한다.
- 너무 기진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쉬지도 못한다.
4) 너무 기진하여 다른 사람들의 간병과 돌봄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고아와 과부처럼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다. 우리 물과 나무조차 돈을 내야 구할 수 있으니, 어찌 쉬겠는가?
3. 지난 날,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했던 것을 후회하며 탄식한다.
5:6 먹거리를 얻어서 배불리려고, 이집트와도 손을 잡고 앗시리아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5:7 조상들이 죄를 지었으나, 이제 그들은 가고 없고, 우리가 조상들의 죄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1) 애굽은 유다의 남쪽, 앗수르는 유다의 북쪽에 있는 강대국이었다.
2) 유다는 힘 있고 능력 있는 자들의 손을 잡고 양식을 구하였다. 때로는 비굴한 자세로 그들과 화친하면서 잘 살고자 온갖 노력을 하였다.
3) 조상들이 그러하였고, 지금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의 죄를 담당하고 있다.
4. 언약 백성들은 바벨론에게 패하여 굴종하는 것이 비참한 일이라고 호소한다.
5:8 종들이 우리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들 손에서 우리를 구해 줄 이가 없습니다.
5:9 먹거리를 얻으려고, 쫓는 자의 칼날에 목숨을 내겁니다.
5:10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살갗이 아궁이처럼 까맣게 탔습니다.
1) 여기서 종들은 바벨론의 용병부대를 뜻한다(왕하 25:24). 그들은 매우 포악하고 잔인했다.
2) 굶주린 백성들이 먹거리를 얻으려면, 적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어야 했다.
- 양식을 구하지 못하여 모두가 산송장 신세가 되고 피부색은 아궁이처럼 검어졌다.
5. 예레미야와 애가는 여호수아서와 정반대다.
1)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을 차지하는 것이 여호수아서다.
- 비록 연약함은 있으나, 가장 영광스러운 세대요, 언약의 성취를 경험한 세대다.
2) 반면에 여왕처럼 존귀했던 예루살렘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고, 수치와 굶주림을 당하는 것이 예레미야와 애가다.
- 여러 세대가 고난을 당했지만, 가장 수치스러운 세대요, 언약적 심판을 경험한 세대다.
6. 언약 백성은 경제적 궁핍, 사회적 무질서, 정치적 압제를 당하고 있다.
1) 굶주리고 있으며, 양식을 얻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 재난 영화에 이런 장면이 종종 나온다. 이때는 힘 있는 자들만이 양식을 차지한다.
2) 그런데 재난 가운데에 있는데, 기진하고, 기진한 데 쉴 수가 없다.
7. 사방팔방으로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기진하다가 죽어가야 한다.
1) 그런데, 이미 예레미야는 이 여정을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을 경험했고 제시했다.
3: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3: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 예레미야의 이 고백이 “언약 백성인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8. 3장에서 소망을 회복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를 보았던 예레미야의 숙제는 “이것을 모든 백성들에게 어떻게 알게 하는가?”일 것이다.
1) 또한 예레미야를 지켜본 백성이라면 예레미야가 경험한 믿음의 여정을 나는 어떻게 갈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것이다.
2) 예레미야를 통해 보고 듣고 배운 바대로 “나도 하겠다”면서 믿음으로 행하면 비록 비참하나 모두 소망으로 나아가니 감사하고 찬양할 일 뿐이다.
9. 그러나 굶주림, 비참함, 후회, 무거운 멍에를 매고 기진하여 쉬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그들은 대부분 “어렵다,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1) 백성들은 “그것조차 할 힘이 없다.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건 예레미야 너 같은 사람이나 가능한 거야”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10. 그래서 예레미야의 애가는 계속된다.
1) 심판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 그들의 악을 알고, 심판의 이유를 아는 예레미야, 게다가 어떻게 다시 소망으로 회복되는지를 예레미야는 다 안다.
2) 반면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모르고, 불신이고, 악하다.”
3) 그러면 한심한 백성들에게 “분노하며 책망하고 비난”하는 것이 보통이다.
11.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한심한 백성이 곧 “나”라고 하면서 “재난 받는 것은 나”라고 하고, 그 믿음 없는 한심한 놈들도 “나”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1) “저 한심한 놈들이, 저 믿음 없는 것들이, 저 교만한 것들이, 저 완악한 것들”이라면서 손가락질 하지 않고, 내가 “바로 그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2) 참으로 예레미야는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듯이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대한다.
3) 주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체휼하시고 공감하신다. 그리고 체휼을 넘어 나의 죄와 심판을 담당해 주시고, 사랑과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4) 아침마다 주님의 인자와 신실함이 새롭게 되기를 원한다.
◈ 나의 묵상
3장으로 애가는 끝나지 않고 4-5장의 슬픈 노래와 탄식이 계속된다. 예레미야는 이 비참함과 심판을 믿음으로 통과하지만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예레미야는 자신만 통과했으니 됐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극복했으니 훈계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자신은 통과한 과정이지만 믿음이 없어서 비참해 하는 백성들과 여전히 연합한다. “우리”라고 하면서 함께 탄식하고 어찌할 줄을 모른다.
기진하나 쉴 수 없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사실, 그들은 정죄받아 마땅한 자들인데 말이다.
주님이 나를 그렇게 보신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진리와 논리를 근거로 하면 나는 정죄 받아 마땅하지만, 주님의 눈은 긍휼로 보신다. 왜 믿음이 없느냐고, 왜 예레미야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왜 나와 연합되어 부활로 나오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나와 같이 되셔서 나와 함께 탄식하시고, 나로 인하여 우신다. 이런 주님, 이런 하나님이 어디 있을까?
요즘은 자주 기진함을 많이 느낀다. 사람이 이렇게 에너지가 없을 수 있나라는 생각도 한다. 비교적 나는 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쉬지를 못하기에 ‘기진하여 쉴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겠다. 주님도 골고다 길을 오르면서 쉬지 못하셨다.
예레미야와 애가를 묵상하면서 예레미야의 믿음과 3장의 여정을 보고 감탄하고 깨닫지만, 나는 예레미야보다는 한심한 백성들에 가깝다. 예레미야를 만나면 좋겠다. 나의 믿음 없음과 기진함과 연약함을 다 알고도 체휼하며 공감해 줄 사람이다. 공감을 넘어 나와 같이 되어 주고, 나와 함께해 줄 선지자다. 예레미야가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죄와 허물을 다 알고도 여전히 인자하신 주님, 정죄받아 마땅하나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 이런 나와 연합되어 나와 함께 고난 받으시고, 눈물 흘리시는 주님이시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확증되었다. 영원한 사건인 십자가를 통해 확증되었으므로, 영원히 주님은 예레미야처럼 나와 함께하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존재와 그의 사랑과 눈물의 의미를 잘 모른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함께한다. 나는 주님의 존재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이 나와 함께함의 의미를 잘 모른다. 그래도 주님은 나와 함께하신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납하신다. 사랑의 품으로 안으시고, 아버지 안에 거하신다. 임마누엘, 지금 이 곳에서 나와 함께하신다. 주의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워서, 주의 신실함의 크기를 알 때까지 나와 함께하신다. 나를 용납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오늘도 보혈을 의지하며 은혜의 보좌로 나간다. 그리스도를 옷 입고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한다.
◈ 묵상 기도
주님, 예레미야를 통하여 저를 아실뿐 아니라, 연약함과 완악함까지도 품어주시고, 공감해 주시고, 용납하시며, 나의 눈높이에서 함께하신다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만은 저를 아시고, 저와 함께하시고, 저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레미야처럼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힘이 다 끊어진 자리에서도 아침마다 주의 인자와 긍휼을 보소서. 나의 죄를 알고, 주의 인자를 알아 소망으로 나아가며, 주님이 나의 기업임을 고백하며 주님이 구원을 잠잠히 기다리게 하옵소서. 원망을 버리고, 주님의 본심안에 거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레미야가 걸었던 믿음의 여정을 성령님께서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옵소서. 성령을 따라 영의 생각을 따라 애가를 부르게 하여 주십시오. 종교개혁주일입니다. 항상 교회와 신앙이 복음으로 개혁되어야 하오니, 머리되신 주님이 인도하여 주십시오. 오늘의 예배, 기도, 그리고 모든 만남 가운데 함께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나의 힘이요 구원이요 소망이요 기업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