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유학생 '하란사'
하란사 (1875-1919)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 최초의 여학사는 하란사이다. 本姓은 김씨였으나,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하란사 (河蘭史, Nancy)라 불렸다.
어린 나이에 공부에 대한 열망이 많아 알아보던 중 이화학당이 여학교로 있는데 미혼인 여성만 입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하란사는 기혼 여성이라고 못 들어갈 이유가 없다 하여 찾아보니 이전에 기혼여성이 입학을 하였던 전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화학당으로 가서 입학을 청원하였으나 기혼녀라는 이유로 3번이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이대의 이화학당 학당장은 프라이(L.E.Frey)였는데 프라이는 미국 신시내티주 감리교지부에서 정식으로 파송된 선교사로 그 당시 25세의 미혼여성이었다.
계속되는 입학 거절에 하란사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하고 어느 날 밤 데리고 있는 하녀에게 등불을 밝하게 하고 이화학당으로 가서 당시 학당장인 프라이를 만나자 바로 등불을 끄니 주위가 어두워져 프라이가 의아해하며 보니 하란사는 “내 삶이 이렇게 어둡습니다. 제발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세요” 하며 호소하는 하란사에게 감동하여 입학을 허가하여 이화학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 딸을 낳았는데 하상기 전처의 아들 하구룡의 아내인 자신의 며느리에게 아기를 맡기고 학업을 계속 하였다. 하란사가 재학 중에 남편 하상기의 정성은 정말 지극하였다, 저녁 들어올 시간이 넘으면 하녀에게 마님의 진지를 가져다 주어라 하여 하녀는 소반에 식사를 차려 담아 학교까지 날라다 주었다고도 한다. 하란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 기독교를 믿게 되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는 나중에 전도사까지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몄으며 하란사는 1896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게 된다.
당시의 이화학당 졸업식은 따로 없었고 소정의 학업을 마칠 때 쯤이면 학교에서 졸업생들을 좋은 집안으로 소개하여 결혼을 하면 혼인증서를 써 주는 것이 졸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하며 몇 년 후 정식으로 졸업식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란사는 이미 기혼이라 그런 과정도 없이 학업을 마쳤다.
학업을 더 하고자 유학을 생각하게 되고 남편 하상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최초 자비 여성 유학생이 된다. 하란사는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서 게이오 대학에서 1년을 공부하고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오하이오주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안 대학에 들어가 1906년 한국여성 최초의 문학사(B.A) 학위를 받으면서 졸업하였다.
웨슬리대 졸업 후 귀국하여 상동예배당에서 영어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에게 영어를 교육하였으며 이후 이화학당 옆에 성서학원을 3년간 운영하다 이화학당으로 들어가 교사겸 기숙사 사감이 된다. 이 때 하란사는 한국인 교사 중에 가장 영어가 능숙하여 학교의 학생이다 의견 등을 선교사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 교사로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 총교사의 직분도 수행하게 되었다.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부가 개설되자 그 당시 이대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가 되며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게 된다. 이화에 있으며 몇 번에 걸쳐 미국을 오가기도 하였다.
1911년부터는 터틀(O.M. Tuttle)과 함께 이화의 지교枝校)인 서대문 여학교, 애오개(아현)여학교 등 9개 학교의 지도까지 맡았다고 하며 몇 군데 교회를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 사역도 하였다고 한다. 하란사는 호랑이 사감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하란사 사감에게 욕을 먹지 않은 학생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이화 학생의 자치모임인 이문회도 이끌었는데 유관순이 이문회 출신이었다고 한다.
1915년 하란사는 딸 자옥(세례명은 도로시)이 이화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는데 갑자기 죽고말았다. 딸을 잃은 슬픔은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로 이듬해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이 때 미국 전역에 다니며 강연을 하고 교포들의 후원금을 모아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1918년 정동교회에 기증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었으나 아쉽게도 6.25 전쟁 중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미국을 오가며 그 당시 이슈가 되었던 민족자결주의로 하란사도 그때의 조선의 처지를 미국등 각국과 각계에 알리는 등 독립운동에도 힘을 썼으며 고종과 엄비가 궁중 예물을 주며 독립운동 군자금에 써달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19년 고종이 곧 있을 파리강화회의에 한일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보내 조선의 상황을 알리고자 적임자를 찾았는데 그 때 의친왕과 친분이 있던 하란사를 불러 그 서류를 전해주었으나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게 되어 실행을 못하게 되었다. 하란사는 고종과 엄비와도 많은 만남을 가졌으며 자문역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하란사는 바로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어느 교민이 하는 만찬에 초대되어 갔는데 그 때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게 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 때 하란사의 나이는 한창 일할 시기인 45세였다. 나중에 장례식에 참석하고 온 선교사 벡커(A.L.Becker)는 그녀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다고 하여 이는 독살로 나타나는 현상이라 누구에겐가 타살을 당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까지 하였던 스파이 배정자가 일본의 사주를 받아 하란사를 독살하였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였다.
한 번은 윤치호가 한국의 여성교육을 비판하며 여학교 학생들은 요리, 빨래, 다림질 등 살림도 모르고 시어머니에게 순종하는 것도 모른다고 비판하자 하란사는 가정 일에 불평이 나오는 것은 타당하다고 인정할지라도 알아야 할 것은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여학교 졸업생이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가 될 수 있는 여성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반박하였다.
하란사는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였으나 받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정동 이화박물관(심슨 기념관)에 있는 하란사에 관한 안내판의 글이다.
-배움의 열망 가득한 기혼학생-
“인천 감리 (현 인천시장) 하상기(河相麒)의 부인 김씨는 안일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신문화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다. 서울에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꿈을 이루기 위해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학당장 프라이를 찾아가 그 앞에서 하인이 들고 있는 등불을 꺼버린 다음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줄 수 없겠느냐’고 호소함으로써 1896년 마침내 이화학당 입학 후 김씨는 세례를 받고 낸시(Nancy)런 세례명을 얻었다. 이를 한자로 바꿔 란사(蘭史)라 하고 남편 성을 따라 하란사란 이름을 쓰게 되었다.”
하란사는 최초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최초로 미국에 유학한 한국 여성 유학생이며 처음으로 미국 대학에서 문학사학위를 취득을 하였고 이화여대의 최초 한국인 교수가 되기도 하였으며 한국 여성의 복장도 변화시킨 신여성 패션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다고도 한다.
여성의 몸으로 독립운동에도 큰 역할을 하였으며 전도사로 미국 감리교 총회에 참석하여 강연을 하고 국내의 각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활동으로 교인도 늘리기까지 하였다. 전도사로서는 9개 교회에 다니며 예배에 참석을 하고 교인들의 집 1,426호를 심방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화학당 학생자치모임을 통하여 성경 그리고 독립정신을 학생들에게 갖게 하여 하란사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19년 3.1운동 때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여 그 당시 이문회 회원이었던 유관순도 나오게 된 기폭제 역할을 하란사가 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의 각 지역교회를 다니며 후원 받은 금액으로 각 교회를 돕고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올갠가지 구입하여 교회에 기증을 하기도 한 교육가, 사역자, 독립운동가 등 많은 일을 한 100여년 전 한국 최고의 여성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Note:
참고자료(도서)
1)근대를 산책하다 / 김종록/ 다산복스/ 2012
2)기타 자료들
참조: 하란사의 자료를 볼 수 있는 곳
1)국립여성사전시관 : 동작구 대방동 345-1 서울여성프라자 2층 (1호선 대방역 3번출구)
2)이화여고 심슨기념관 : 서울 중구 정동길 76
하란사 (출처 : 정동 이화여고 박물관(심슨기념관) 비치 사진)
같은 사진은 대방동의 국립여성전시관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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