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우당(庇雨堂)
종로구 창신3동과 숭인1동 5번지 일대를 ‘우산각골’이라 한다. 이곳에서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수광(李?光)은『지봉유설(芝峰類說)』을 저술하였다. 그는 낙산의 한 지맥인 우산각골의 작은 산봉인 지봉 아래에 비우당을 마련하고 민족의 자존을 일깨우고 지도층의 정신 개혁과 솔선수범을 촉구하는 실학을 일구었다. 비우당은 원래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4대 35년간 정승을 지낸 유관(柳寬)의 집터였다. 유관의 관향은 문화(文化)로, 고려의 정당문학 공권(公權)의 후손이며, 삼사판관(三司判官) 안택(安澤)의 아들이다. 고려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判秘書)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는 형조판서를 거쳐 세종 6년(1424)에 우의정에 올랐다가 80세에 고령으로 사직하였다. 세종 15년 88세로 세상을 떠나니,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안 금천교 밖에 쳐놓은 장막까지 나와서 애도하였다. 그는 나라에서 받은 녹봉은 다리를 놓고 길을 넓히는데 쓰거나 인근 동네 아이들의 붓과 먹 값으로 썼다. 그리고 자신은 담장도 없는 초가집에 살았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태종은 선공감(繕工監)으로 하여금 그가 모르게 밤중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수시로 반찬거리를 하사하기도 했다. 『용재총화(?齋叢話)』에 의하면, 공은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몸가짐은 여느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누구나 집으로 찾아오면 겨울이라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다. 때로는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가꾸면서 조금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또 손님을 대접할 때면 오지항아리에 막걸리를 담아 상위에 놓고 늙은 여종을 시켜 종지에 술을 따라 권하게 하고 서너 종지 마시면 그만이었다 한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려 전해오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어느 해에 장마가 달이 넘도록 계속돼 지붕이 새어 빗발이 삼(麻) 줄기처럼 방으로 새어 내렸다. 공은 우산을 펴 들고 비를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고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이 장마를 어떻게 견딜까’ 라며 걱정하는 것이었다. 부인이 ‘우산 없는 집에서는 다른 준비가 다 되어 있답니다.’며 짜증을 내자 공은 빙긋 웃기만 하였다.” 이렇게 청빈한 생활로 일관하다가 죽음에 임하여서 남긴 유언은 “내가 남길 유산이랄 것이 없으니, 청빈(淸貧)을 대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바란다.” 이 한 마디뿐이었다 한다. 유관이 살던 집터는 그 후 그의 4대 외손인 이희검(李希儉, 1516~1579)이 이어 받았다. 이희검은 외가 쪽 선조인 유관의 인격과 청빈생활을 그리워하던 나머지 굳이 그 초가집에서 살았다. 그는 태종의 아들 경녕군(敬寧君)의 현손(玄孫)으로 성품이 고결하고 도량이 넓었다. 그는 승지, 호조?병조?형조판서와 장단부사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청빈하게 살았다. “옷은 몸을 가리면 족하고, 음식은 배만 채우면 그만이다.”라는 것이 그의 생활신조였다. 죽을 때 병조판서에 지경연사를 겸하였으나 집에는 곡식도 돈도 남은 것이 없어서 친지들이 추렴하여 겨우 장사를 지냈다 한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유관의 집터는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에 의해 청빈철학의 성지로서 복원되어, ‘비우당(庇雨堂)’이란 당호를 지어 달았다. 이수광은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지어 당호를 짓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집은 흥인문 밖 낙봉(駱峰) 동쪽에 있다. 적산(?山)의 한 자락이 남으로 뻗어 고개를 숙인 듯 지봉(芝峰)이 있고, 그 위에 수십명이 앉을 만한 넓은 바위와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비스듬이 있다. 누봉정(樓鳳亭) 아래 백여 묘의 동원(東園)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청백(淸白)으로 이름을 떨친 유관(柳寬) 정승이 초가삼간을 짓고 사셨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온다. 이 분이 나의 외가 5대 할아버님이다. 아버님이 이 집을 조금 넓혔는데, 집이 소박하다고 누가 말하면 우산에 비하여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하여 듣는 이들이 감복하였다. 나는 이 집을 보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에 없어진 이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다. 비바람을 겨우 막겠다는 뜻이다. 우산을 받고 살아오신 조상의 유풍(遺風)을 이어 간다는 뜻도 그 속에 담겨 있다.”
하였다. 이수광이 이곳 옛터에 비우당을 짓고 생활한 이후로 사람들은 이 동네를 항용 우산각골(雨傘閣洞)이라 불렀다. 진정 비우당은 청빈낙도하던 우리 나라 선비정신을 이어 내린 자랑스러운 보금자리였다. 이곳을 우산각골이라 하게 된 것도 사람들이 그들의 정신을 우러러 높여 부르던 이름이었다. 이수광은 명종 18년(1563) 생으로 태종의 6대 손이 된다. 선조 15년(1582) 진사가 되고 3년 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된 후 홍문관?사헌부?사간원 등 삼사(三司)에서 관직에 올라 청년 준재(俊才)로 이름을 떨쳤다. 임진왜란 중에는 경상도방어사의 종사관이 되었고, 함경도 선유관(宣諭官)을 지내며 구국활동에 힘썼다. 임진왜란 후 대사헌과 대사간 등을 지내고, 광해군 때에는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임금을 강화까지 호종하고 이듬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다시 환로(宦路)에 오르기는 했으나 벼슬에 연연하기보다는 당시 사회의 갈등과 모순?피폐 등을 스스로 깨달았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한 대책 강구와 해결 방법 등을 사상적으로 심화시키면서 『지봉유설』을 저술하여 실학사상을 개척하였다. 백과사전과 같은 대저서인 『지봉유설』을 이곳 비우당에서 집필하였다는 사실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수광은 시문에도 뛰어났다. 그는 비우당에 살면서 이곳의 여덟 경치를 손꼽고 ‘비우당 팔경’ 시를 읊었는데, 그 여덟 경치는 다음과 같다. 동쪽 연못의 실버들(東池細柳), 북녘 고개의 성긴 소나무(北嶺疎松), 낙산의 맑은 구름(駱山晴雲), 아차산의 저녁비(峨嵯山暮雨), 앞 시내에서 발씻기(前溪洗足), 뒷밭의 영지버섯(後圃採芝), 바위골의 꽃구경(岩洞尋花), 산 정자서 달맞이(山亭待月). 한편 비우당 뒤쪽에는 1994년 서울시 기념표석위원회에서 설치한 ‘자주동샘(紫芝洞泉)’이란 표석이 있다. 표석에는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는 샘’이라 적혀 있다. 곧 이 샘물로 빨면 옷감이 자주색으로 염색된다 하여 이 일대를 자줏골 또는 자주동이라 하였다. 단종의 비 송씨(정순왕후)는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정업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명주로 댕기?저고리 깃?옷고름?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청룡사에서 300여 m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명주를 빨았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에는 ‘紫芝洞泉’이라고 새겨져 있고, 자주바위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인근에는 청룡사?동망봉 등 단종애사에 얽힌 명소가 산재해 있다.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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