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남자들이 육중한 임원용 의자나 회의탁자에 붙들려 있는 동안 여자들에겐 해치워야 할 일들이 많다. 육아, 가사뿐 아니라 컴퓨터, 의약, 우주과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현장에서의 문제 해결은 여자의 몫일 경우가 태반이다.
남자들에겐 없는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실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넘쳐난다. 이런 아이디어로 '대박'을 터뜨리고 인생을 역전시킨 여자들이 많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생활전선으로 뛰어 들었다가 발명품 하나로 대기업을 일구어낸 엄마들, 학교 숙제로 만든 발명품으로 백만장자가 된 소녀들, 실직과 이혼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뒤바꾼 여자들, 거창하지도 않은 실용적 아이디어로 우리의 삶을 바꿔놓거나 거대한 시장을 확보한 예는 이외에
도 많다.
이 책은 이런 아이디어 여성들의 숨겨진 창의력이 어떻게 세상과 시장을 움직였는지를 풍부한 실례를 통해 밝혀주고 있다. 삶의 새로운 기회를 꿈꾸고 있는 여성들에게 이 책은 성공의 모범이 되어 줄 것이다.
▣ 차 례
1. 바로 실용될 수 있어야 '대박'이 된다
2. 재미로 성공하자
3. 대자연은 우리가 지킨다
4. 여자만이 할 수 있다
5. '집안일'은 아이디어의 보고다
6. 컴퓨터 혁명의 주역들
7. 치료의 최전선에 서다
8. 우리에게 지구는 너무 좁다
9.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아이디어
1. 바로 실용될 수 있어야 '대박'이 된다
아이디어로 미숙함을 보충하다 - 수정액(Liquid Paper)
책상 위의 필수품들이 있다. 스테이플러(1868년 찰스 헨리 굴드가 발명), 종이 클립(1900년 요한 발러 발명), 수정액(1951년 베티 네스미스 발명) 등이 그런 것들이다. 베티 네스미스 그레이엄은 2차 대전 후 텍사스 주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아들(이 아들은 나중에 인기 로큰롤 그룹인 몽키스의 멤버가 된다)을 키우던 홀어머니였다. 베티는 수정액을 발명하여 4천 7백 5십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그녀의 이야기는 미국 기업사의 전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51년, 베티는 댈러스에 있는 텍사스 신탁은행에 근무하고 있었다. 베티는 승진을 거듭해서 당시로서는 은행에서 여자들에게 허용된 가장 높은 직책이었던 비서실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 시절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베티 역시 전쟁터로 나가게 된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와 서둘러 결혼했다. 하지만 1946년 이혼한 베티는 어린 아들 마이클을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만 했다.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텍사스에서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자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베티의 직장 생활을 더욱 악화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IBM이 최신 전동타자기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이 새로운 전동타자기는 자판을 살짝 건드리기가 무섭게 번개처럼 글자들을 찍어냈다. 그 때문에 이전의 타자기보다 훨씬 많은 오자들이 생겼고, 이것들을 수정하는 작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비서실장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베티는 타이핑과 같은 비서업무에 별로 능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남
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생해야만 했다.
베티는 자기가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에서 힌트를 얻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레터링 작업을 할 때 화가들은 틀린 부분을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덧칠해서 없애거든요. 화가들의 이 방법을 사용하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흰색 그림물감을 병에 담아 가지고 수채화 붓과 함께 사무실로 가지고 갔지요. 타이핑하다 생긴 오타가 생기면 그걸로 수정했습니다." 베티는 장장 5년 동안이나 이 흰색 물감을 자기 서랍에 숨겨놓고 혼자서 몰래 오타를 수정하는 데 썼다. 물감으로 타이핑을 수정하는 것이 자신의
부족한 실력을 감추는 부정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상사가 바뀌면서 비밀이 드러나게 되었다. "내 편지들에 이 하얀 것들 좀 쓰지 마세요." 새 상사가 이렇게 꾸짖었던 것이다.
비록 그 상사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타이핑을 하는 아가씨들은 베티의 비책에 무릎을 쳤다. 동료들은 너도나도 '마법의 액체'를 나눠 달라고 부탁했고, 베티는 병에다가 '미스테이크 아웃(Mistake Out)'이라고 직접 손으로 쓴 라벨까지 만들어 붙이기 시작했다. 베티는 아들 마이클의 화학 선생님에게 자문을 구해서 보다 커버력이 우수하고 빨리 마르는 수정액을 개발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수정액은 어느 사무실에서나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1979년 질레트가 어마어마한 가격에 인수해 갈 무렵 베티가 세운 리퀴드 페이퍼 컴퍼니는 2백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매년 2천 5백만 병의 수정액을 전 세계 31개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베티는 이후 남은 인생을 종교와 미술에 대한 열정을 만끽하며 너무나 행복하게 살았다.
2. 재미로 성공하자
틈새를 찾아내다 - 바비인형(Barbie Doll)
미국에서는 한 명의 소녀가 평균 8개의 바비인형을 가지고 있다. 바비는 114개국에서 팔리고 있다. 1994년 장난감 제조회사 매텔이 판매한 바비인형과 바비의 옷, 액세서리 등의 총 매출액은 32억 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루스 핸들러가 1959년 뉴욕 장난감 박람회에 인형을 처음 선보였을 때만 해도 바비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루스 핸들러는 자신의 어린 딸 바바라(애칭 바비)가 종이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고 바비인형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여권운동이 활발해지기 전인 1950년대에 여자아이들은 흔히 엄마가 되는 상상을 하면서 놀았다. 그래서 장난감 회사들은 소녀들을 위해 아기 인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핸들러는 딸이 멋진 옷을 입은 어른 인형을 더 좋아하는 것을 보고 여자아이들이 엄마 놀이뿐 만 아니라 어른이 되는 상상을 하면서 놀기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루스의 남편인 엘리엇과 그의 동업자 해럴드 매트 매트슨은 장난감 회사 매텔(매트와 엘리엇에서 따온 이름)을 운영하고 있었다. 루스도 마케팅을 맡아 처음부터 함께 일했다. 루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회사의 디자이너들에게 얘기했다. "종이인형처럼 생긴 인형을 만들어 봅시다. 하지만 우리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로 만드는 겁니다. 가슴이 있고, 허리가 가느다랗고, 손톱에 매니큐어도 칠한 인형을 만들어보자고요." 그것은 바로 여자아이들이 장차 되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어른 모습의 인형이었다.
결국 매텔의 기술자들이 루스의 지시에 따라 바비를 만들어냈다. 그 때문에 바비인형에 대한 특허는 루스 핸들러가 아니라 이 기술자들이 가지고 있다. 매텔 사는 패션 디자이너들을 고용해 바비의 의상들도 만들었다. 뉴욕 장난감 박람회에서 전문가들로부터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비는 이후 공전의 히트를 쳤다. 처음 10년 동안 바비와 켄(루스의 아들 이름을 따서 붙였다)이 벌어들인 수입이 5억달러에 달했다. 1964년 매텔 사의 주식총액은 4천 4백만 달러에 달했으며 루스는 총부사장에서 사장을 거쳐 공동회장의 직위까지 올랐다. 1960년대에 이런 타이틀은 여자가 꿈도 꾸기 힘든 것들이었다.그녀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이사, 미국경영인협회 회원, USC와 UCLA 등 유명한 대학의 객원교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루스의 삶이 언제나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1970년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차례로 양쪽 가슴을 모두 절제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연방은행의 고발 등 일련의 사업 실패에 낙심한 루스와 엘리엇은 1978년 매텔 사의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루스는 바비의 초기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던 페이튼 메세이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처럼 유방절제술을 받은 여성들의 고통을 덜어 줄 '니얼리 미(NearlyMe)'라는 이름의 인공 가슴을 만들게 했다. "그에게 이렇게 말했죠. 누구나 사서 쓸 수 있는 인공 가슴을 만들고 싶어요. 오른쪽과 왼쪽이 각각 따로 있고, 브래지어처럼 사이즈별로 골라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예요. 그는 나보고 미쳤다고 했지만 결국은 도와주기로 했죠." 루스가 만든 작은 루스튼 주식회사는 니얼리 미의 생산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루스는 1991년 킴벌리-클라크의 자회사에 루스튼을 매각했다.
발명가로서 루스 핸들러가 일하는 방식은 언제나 간단했다. "무엇이 필요한지를 관찰합니다. 그리고 시장의 빈틈을 찾아냅니다. 그 다음에는 그곳을 채울 제품을 만들어내는 거지요."
3. 대자연은 우리가 지킨다
오염물질, 그 정체를 밝혀내다 - 대기오염 정밀 측정법(PollutantScanner)
로리 토드 교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대기 중의 오염물질 측정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유독물질의 종류와 농도를 알아보기에 충분할 만한 샘플이 얻어지기를 빌면서 손에 쥔 측정기로 공중을 휙 훑어내리는 것이 다였다. 이렇게 얻어진 샘플을 분석하는 데 대개 일주일 이상이 걸렸다. 그러니 분석이 끝날 즈음이면 이미 오염물질의 흐름은 바뀌고 난 다음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환경에 대한 '스냅사진'뿐이었다. 사실 진짜로 필요한 것은 움직이는 동영상이었다.
"사람들은 단시간의 측정 결과를 사용해서 장기간 지속되는 현상을 알아내려고 했죠. 내가 개발한 방식은 엑스레이 단층 촬영법과 비슷한 것입니다. 엑스레이를 투시하여 신체 조직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적외선 광선을 여러 각도에서 투사하여 대기의 화학적 조성을 실시간으로 알아냅니다."
과학자들은 처음으로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오염물질들이 어떻게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세밀한 도표를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손에 잡히는 오염물질만을 측정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로리의 대기오염 측정법은 각각의 물질이 저마다 다른 파장으로 빛을 반사해내기 때문에 수백 종의 물질들을 동시에 탐지해낼 수 있다.
이 연구는 매우 시의적절하게 이루어졌다. 1990년도 이전까지 미 환경보호국은 7종의 대기오염물질만을 관리했으나 1990년 미국 의회가 환경보호국에 189종의 오염물질들을 관리해달라고 요청했다. 토드가 개발한 신기술의 가치를 깨달은 환경보호국과 미국 산업안전보건공단은 그녀의 초기 연구자금 마련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 토드 교수의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미국 과학기금에서 나온 5십만 달러의 지원금이었다.
"내가 처음 대기를 단층촬영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건 말도 안 된다고 했죠. 왜냐하면 그때는 그렇게 할 만한 장비가 없었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럴듯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를 계속했죠. 내가 꿈꾸던 일이었기 때문에 부수적인 다른 것들은 모두 쉬웠어요."
사라 브리드러브는 1867년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있는 한 소작농의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노예해방 이후 이 집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이였다. 여섯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그녀는 열네 살에 결혼을 하고, 열일곱에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스무 살에는 과부가 되었다. 그러나 마흔여섯 살이 되었을때 그녀는 미국 최초의 흑인 백만장자이자 최초의 자수성가한 여성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다.사라가 발명한 것은 흑인 여성들의 머리카락을 반짝거리게 하고, 뽀글뽀글한 곱슬머리를 부드럽게 펴 주는 헤어 릴랙서인 원더풀 헤어 그로우어였다. 사라는 자기 집 빨래대야에 여러 가지 재료들을 집어 넣고 섞어서 최초의 헤어 릴랙서를 만들었다. 사라는 세탁부였는데 스트레스와 고된 노동, 세탁장에서 나오는 알칼리성 증기 등으로 인해 그녀의 머리카락은 형편없이 부스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헤어 릴랙서를 사용하면서부터 그녀의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났다. 그러자 사라 자신이 걸어다니는 광고판이 되었다.
1905년 무렵에는 마담 C.J. 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미국 중서부 전역의 워커 에이전트들에게 뜨겁게 달군 빗과 머릿기름 등을 사용해 흑인 여성들의 머리를 손질하는 법을 교육시켰다. 1911년 워커 컴퍼니의 여자 영업사원 수는 950명에 달했다. 깔끔한 흰색 셔츠와 검정 롱스커트 차림이 이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918년에는 회사의 연간 수입이 25만 달러에 달했다. 전성기 때 워커 컴퍼니(마담 C.J.가 평생 동안 이 회사의 유일 주주이자 사장이었다)는 미국 전체에 3천 명의 워커 에이전트들을 두고
있었다. 그 시절 워커 에이전트는 자립을 원하는 미국 흑인 여성들에게 최고의 직업이었다. 워커식 헤어 스타일의 유행은 파리까지 퍼져나갔다.
자수성가한 후에 마담 C.J. 워커는 자선사업가, 예술 후원가, 민권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1917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과 만나 담판을 짓기도 했다. 그녀는 51세이던 1919년 흑인들의 영웅으로 생을 마감했다.
5. '집안일'은 아이디어의 보고다
빚더미 탈출작전이 대히트를 치다 - 자동 식기세척기(Automatic Dishwasher)
자동 식기세척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에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물건을 가장 필요로 할 사람이 그밖에 또 누가 있겠는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일상용품의 발명자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제핀 코크런은 자동 식기세척기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사람도 아니고, 최초 특허자도 아니다.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자동 식기세척기 특허는 매리 허브슨이라는 다른 여성이 가지고 있다. 조제핀 코크런의 1886년 모델 이전에 이미 12개의 자동 식기세척기 특허가
출원되어 있었다. 12개 모두 여자들이 낸 것이었다. 하지만 대량생산 및 판매가 가능한 실용적인 식기세척기를 처음으로 설계한 사람은 조제핀이었다.
조제핀과 남편은 미국 일리노이 주 쉘비빌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던 조제핀에게 골칫거리라고는 가정부가 가보인 도자기들을 종종 깨뜨린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1883년 남편이 죽고, 조제핀에게는 1,535달러의 재산과 그것보다 훨씬 많은 2,769달러의 빚, 그리고 자동 식기세척기의 아이디어뿐이었다.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바로 수압이었다. 비눗물을 접시에 분사함으로써 그릇을 세척한다는 것이었다.조제핀은 오두막집에 틀어박혀 구리 배관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접시와 컵들을 꽂을 수 있도록 만든 커다란 유리상자 모양의 개리스-코크런 식기세척기는 발로 페달을 밟아 작동시키는 소형 모델과 증기로 작동하는 대형 모델 두 가지가 있었다. 대형 식기세척기는 2백 장의 접시를 단 2분 만에 깨끗이 닦고 말릴 수 있었다. 이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것으로서, 1892년 컬럼비아 박람회에서 일대 센세
이션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기계의 값은 매우 비쌌다. 대당 가격이 250달러로 당시로서는 대형 식당 등에서 상업용으로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코크런은 죽기 얼마 전인 1913년 한 인터뷰에서 슬프게 말했다. "실제로 설거지를 하는 사람은 여자들인데 비교적 거액이었던 이 기구의 구입에 아무런 결정권도 가질 수가 없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리스-코크런 식기세척기 회사는 호텔과 식당 등에 제품을 팔아 충분히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이 회사는 1926년에 매각되어 키친에이드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현재는 월풀의 한 사업부로 포함되어 있다.
6. 컴퓨터 혁명의 주역들
하드웨어에 도전하다 - 유틸리티 장비(Utility Equipment)
여성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 전반에 걸쳐 맹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하드웨어 부문에서도 굵직굵직한 공헌들을 남겼다. 전기 엔지니어 에디스 크라크는 송전선의 문제를 해결한 '그래픽 계산기'를 발명했으며, 벨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에드나 슈나이더 후버는 전화국 컴퓨터 교환 시스템을 개발했다.
미국 메릴랜드 주의 작은 농장에서 태어난 에디스는 바사 대학을 나와 수학 교사로 재직하다가 1911년 위스콘신 대학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을 마치고 방학 때 AT&T에 컴퓨터 보조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에디스는 이곳에서 컴퓨터에 완전히 매료된 나머지 아예 전공을 바꾸어 버렸다. 에디스는 여자로서는 최초로 MIT 대학에서 전자공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졸업 후 GE에 입사했다. 2년 후인 1921년 에디스는 자신이 발명한 장비의 특허를 신청했는데, 이는 그야말로 황금의 타이밍이었다. 당시 전기 시스템이 급속도로 복잡해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래픽 계산기'가 엔지니어들의 난해한 수식을 그래프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에드나는 예일 대학 수학 박사 출신으로, 아기를 낳고 병원에 누워 있던 중에 컴퓨터 전화 교환기의 초안을 스케치했다. 에드나는 1971년 11월 이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 에드나가 고안한 이 교환기의 원리는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당시 벨 연구소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전화트래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기존의 기계식 교환 장비를 보다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하루 빨리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에드나의 발명품은 컴퓨터로 통화량을 주기적으로 모니터링하여 통화 연결률을 적절하게 조정해줌으로써 장비 과부하의 위험을 제거해주는 것이었다.
7. 치료의 최전선에 서다
최초의 에이즈 치료약 - AZT
자넷은 버팔로에 있는 뉴욕 주립대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따자마자 버로우즈-웰컴에 이력서를 보냈다. 자넷을 고용한 것은 훌륭한 결정이었다. 자넷은 이곳에서 최초의 에이즈 치료약인 AZT를 개발해 냈다. 이 약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연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버로우즈-웰컴사에 연간 4억 5천만 달러 가량의 수익을 안겨주었다.
AZT는 현재 HIV(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데 쓰이는 '칵테일 요법'의 한 요소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AZT를 인간의 면역결핍 바이러스에 시험해보자고 처음 제안한 것은 자넷이었다. AZT는 20년 전에 처음 만들어진 실패한 항암 치료제였지만 자넷은 다른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스승인 거투르드 엘리언 박사가 개발한 혁신적인 테스트 방법을 사용하여 자넷은 AZT가 RNA 종양바이러스와 싸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AZT는 바이러스를 속여 DNA 속의 비활동성 요소와 결합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마치 생식능력이 없는 지중해 열매파리를 풀어서 해충을 막는 것과 비슷한 방법이다.
1984년 미국 국립보건원은 50종의 다른 약물들과 함께 AZT의 약효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했다. 이 가운데 AZT만이 치료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ZT는 1987년 FDA로부터 사용승인을 받았다. 1988년 2월, 미 특허청이 자넷 리디어트와 4명의 동료 과학자들에게 AZT에 대한 특허를 주었다.
그러나 자넷과 동료들은 이 약품으로 인해 회사가 벌어들인 수익에 대한 배분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보너스조차 받지 못했다. 부서의 우두머리인 데이빗 배리가 대부분의 이익을 독차지한 것이다.
자넷은 미국 화학자협회의 간부로 활동해왔다. 자넷은 북캐롤라이나 화학자협회로부터 최우수 화학자상을 수여받았으며, 현재 뉴욕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기도 하다. 1998년 자넷은 최첨단 연구기관인 인스파이어 파마수티컬즈의 부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거기서 자넷은 생물학과 화학 분야 전반을 총괄한다. "이곳은 작은 생명공학 회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빠르게 착실한 성과를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특허 신청 중인 그녀의 신약들이 만성 기관지염을 완화시키고, 낭포성 섬유증을 앓는 어린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넷은 생각하고 있다. "이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들의 생명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8. 우리에게 지구는 너무 좁다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구하다 - 화성 탐사로봇(Mark Rover)
도나 셜리의 이야기는 미국 오클라호마 주 한 곳 작은 마을에 사는 별에 미친 열두 살짜리 소녀로부터 시작된다. "아서 C. 클라크의 소설『화성의 사막』을 읽은 후 화성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
죠.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한다는 이 책의 아이디어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쭉 화성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1997년 7월 4일, 마침내 그녀의 30년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도나가 발명한 화성 탐사로봇 소저너 트루스는 화성의 거친 표면 위로 굴러갔다. 이동 지질학자의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이 바퀴 6개의 화성 탐사로봇은 지구 외의 다른 행성에서 자동으로 움직인 최초의 기계였다. 캘리포니아 파사데이너에 위치한 나사의 로켓추진 연구소 JPL에서
도나와 동료 과학자, 엔지니어들은 2년에 걸친 노력 끝에 전자레인지 만한 크기에 무게가 10kg 나가는 탐사로봇을 완성했다.
소저너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것은 도나의 천재성과 탁월한 관리 능력이었다. 그녀는 1966년에 JPL에 들어왔고 1971년부터 화성착륙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화성 착륙 프로젝트는 의회의 결정으로 취소되고 말았다. 1980년대 후반 들어 JPL에 돈이 넘쳐나자 화성 프로젝트는 다시 부활되었다. 1991년 화성 프로젝트의 지휘를 명령받았을 때 도나는 소행성, 혜성, 토성을 탐구하는 16억 달러 규모 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직을 맡고 있었다. 당시 화성탐사 임무의 소요 예산은 1백억 달러까지
불어났고, 더 이상의 자금을 끌어들일 길도 막막했다. 문제는 커다란 탐사선을 우주공간으로 띄워 올리는 데 필요한 로켓의 비용이었다. 도나의 남자 동료들은 프로젝트 자체를 아예 폐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나가 크기 자체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탐사선 자체를 이동수단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렇게 해서 소저너가 탄생되었다.
도나는 대닐 모튼과 공저로 자신의 화성착륙 프로젝트에 대한 경험을 『화성인 관리하기』라는 책에 썼다. 도나가 만일 별에 푹 빠지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기업가나 군 지휘관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부족한 예산, 촉박한 데드라인, 동료들과의 치사한 경쟁 등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그녀의 능력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관료적인 경영자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9.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아이디어
세밀한 부분에 집중한다 - 자동차용 유색 왁스 매직 샤인(Magic Shine Colored Car Wax)
1991년 열두 살의 바네사 헤스는 과학 선생님이 내준 숙제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한 달 안에 무엇이든 발명품을 한 가지씩 만들어 오는 것이었다. 바네사는 도저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F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네사는 아버지를 도와 자동차에 왁스칠을 하게 되었다. 차에 바른 왁스를 마른 걸레로 닦아내자, 긁힌 부분마다 왁스가 하얗게 끼어
두드러져 보였다. 그때 바네사의 머리 속에 왁스가 흰색이 아니라 자동차와 같은 색깔이라면 차 표면의 긁힌 상처들을 오히려 감춰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네사는 색소를 섞어 만든 자동차용 유색 왁스를 전미 발명 컨테스트에 출품했다. 바네사는 장난감 자동차에 자신의 발명품을 시연해 보였고, 컨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탔다. 한 자동차용품 제조업체가 신문에 실린 기사를 읽고 바네사에게 연락을 해왔다. 이 회사는 바네사가 만든 새로운 제품을 '매직 샤인'이라는 이름으로 TV에 소개했다. 바네사는 순식간에 미국 전역의 TV에 등장하게 되었고, 그녀의 아이디어는 돈을 갈고리로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첫댓글 으음... 한국에서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