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없다.
… 존재하는 것의 일부는 우리 눈에 영원히 맹점으로 남는다.”
수수께끼와 불확실성을 사랑하는 이론물리학자,
그가 낚시를 하며 길어 올린 삶의 비밀
― 꼭 모든 것을 알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과학자이면서 과학의 한계를 말하는 이가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마르셀로 글레이서다. 그는 브라질에서 유년을 보내고 이후 영국과 미국에서 이론물리학자로 성장했다. 어릴 적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처음으로 대어를 낚아 올린 후 낚시에 대한 강렬한 추억을 가지게 되었지만, 공부와 일 그리고 어쩌면 파도보다 매서운 삶의 역랑에 밀려 낚시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산책 중에 플라이낚시를 하는 한 무리를 본 후 그가 잊고 있던 낚시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짜릿한 긴장감과 자연과의 교감이 그리워진 그는, 각종 학회나 콘퍼런스, 대중 강연 등으로 출장이 잡힐 때마다 매 일정에 플라이낚시 강습을 끼워넣기로 한다. 이로써 영국, 브라질, 이탈리아, 아이슬란드를 누비며 과학과 낚시, 우주, 생명, 자연의 신비를 통찰하는 그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영국에서는 ‘고전장 이론’과 ‘솔리톤’이라는 과학적 개념이 레이크디스트릭트에서의 플라이낚시 경험과 자연스레 뒤섞인다. 브라질에서는 과학 이전 시기와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우주에 관한 과학적 관점의 변화를 주제로 강연을 한 후 열대의 송어를 낚아 올린다. 르네상스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는 우주의 외계 지적 생명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회의를 가지고 난생 처음 밤낚시를 배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지구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해 강의하고 송어와 연어의 땅이라 불리우는 그곳에서 생애 최고의 낚시를 경험한다. 저자가 설파하는 과학 이론과 개념, 용어는 일견 어려워 보이지만, 물고기와 강 그리고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 비유의 거름이 되어 독자를 충만한 앎의 세계로 인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가 강조하는 건 ‘앎’보다 ‘알지 못함’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알 수 없음’이다. 빅뱅 이전의 우주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왜 하필 지구에서 극적인 돌연변이가 일어나 지적 생명체가 진화했는지, 다중우주가 실존하는지, 그렇다면 우리 우주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등.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활동 범위가 넓어질수록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도 동시에 넓어져간다. 저자는 이를 ‘지식의 섬’으로 비유한다.
“만약 세계에 대한 축적된 지식이 하나의 섬을 이룬다면, 그 섬은 우리가 더 많이 배울수록 커진다(가끔씩 작아질 수도 있는데, 오류가 있는 이론이나 설명을 버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섬이 그렇듯이 이 섬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이 바다는 무지의 바다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다. 섬이 커지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경계인 무지의 해안선도 커진다. 달리 말해서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무지를 낳는다. 자연에 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탐구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무지의 바다 곳곳에는 알 수 없음의 영역들, 즉 과학 탐구의 영역을 넘어서는 질문들이 존재한다.”(34)
비밀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인간에게 지식의 섬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어떤 과학자들은 한계에 불복하고 과학의 전능함을 주창한다. 모든 현상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납득할 만한 과정과 결과가 있으며 이를 꿰뚫는 근본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는 “아웃사이더”를 돌연변이 취급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려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아인슈타인, 플랑크, 슈뢰딩거 같은 과학자들도 무작위적인 현상의 근본적 이유를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다. 더 나아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주장,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열등하다는 주장, 지구가 평평하다는 주장처럼 분명 과거 어느 시점에서는 과학적 진실이라고 여겨졌던 이야기는 그 당연함을 깨뜨리고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에 의해 유물이 되고 말았다. 세상의 진리를 꿰뚫고 있다는 착각은 종종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는지. 기존의 진리가 우주의 법칙을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수록 그 파괴력은 쉽게 커진다. 저자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겨져 왔던 맹목적 광신이 어떻게 과학으로 침투하는지 살펴보며, 꼭 모든 것이 명료하게 설명되어야 할 필요는 없음을, 또 그럴 수도 없음을 재차 강조한다.
“과학은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차갑고 냉정한 학문에서 보살피고 아우르는 학문으로
누군가는 저자의 이러한 태도를 “패배주의”라고 여긴다. 하지만 과학의 한계를 논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의 한계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사랑이라는 해답으로 이끄는 지혜이다.
“과학의 한계를 드러내는 내 주장을 두고 위험한 패배주의로 여기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과학의 한계를 아는 것은, 과학이 볼품없다고 꼬리표를 붙이는 짓이나 성경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들과 같은 반反과학 집단의 비판에 과학을 노출시키는 짓과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과학을 궁리하는 이들을 홀가분하게 해준다. 신처럼 전지전능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과학을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더불어 과학자들의 많은 주장들이 그걸 주장하는 이들에 의해서든 언론매체에 의해서든 무턱대고 부풀려질 때에 과학의 진실성을 보호해 준다. 적절한 예를 들어보자. 빅뱅 너머의 물리적 메커니즘을 우리가 이해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또는 생명이 우주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우리로선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하는 말과 말하는 방식에 무척 신중해야 한다. 이들의 발언은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36)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는 일은 지식의 섬을 확장시킬 수 있지만 또한 더 많은 미지의 것, 어쩌면 아예 알 수 없는 것들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 그리고 사랑이 이런 관점으로부터 의기양양하게 등장한다.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 너머의 힘으로서 말이다. 과학은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제로 과학은 자신의 씨앗으로서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성장을 위한 핵심 에너지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과학을 과도하게 감성적으로 대하는 태도와 무관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신비에 이끌리는 마음, 그리고 내가 말하는 미지에 이끌리는 마음은 다름 아닌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144~145)
인간과 자연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세계 각지를 떠돈 끝에 저자가 내린 놀라운 결론
“우리는 자연을 망가뜨리지 않고도 자연에 가까워질 수 있다.”
영국과 브라질, 이탈리아, 아이슬란드를 거쳐 어느덧 능숙한 플라이낚시꾼이 된 저자는 문득 불편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알 수 없음의 두려움조차 상쇄시키는 사랑이, 그런 사랑으로써도 결코 합리화할 수 없는 지점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온정적인 낚시란 게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터무니없게 여겨져 혼자 웃음이 났다.”(244) 몇 년간 플라이낚시를 하고, 그렇게 잡은 물고기는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급히 물속으로 돌려보내 왔지만 한 번 떠오른 불편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른다. 인간이 자연을 억지로 잡아 세우고, 끄집어내고, 망가뜨리지 않고도 자연과 교감할 수 있다고. 이제야 저자는, 주는 대로 되돌려주는 충만한 강에게 비로소 사랑으로 대답할 수 있게 된다.
낚시와 과학, 우주, 생명을 관통하는 깨달음의 여정은 일종의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여정을 묵묵히 따라온 독자들에게 이러한 용기 있는 변절은 충격을 줄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음’에 대답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종교에 의존하기, 과학을 맹신하기, 불가지론자가 되기. 혹은 미지를 사랑하기―사랑해 버리기. 그 답이 무엇이든, 이 책을 읽은 독자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뜻밖의 것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한걸음 다가가길 바란다.
“나는 부러운 눈빛으로 낚싯대와 허공을 아름답게 가르는 형광 초록색의 플라이 낚싯줄을 바라보았다. 낚싯줄은 50미터 남짓 앞쪽에 날아가 떨어졌다. 계곡 물가에서 아주 긴 지휘봉을 든 지휘자가 단원들에게 공연 리허설을 하는 장면 같았다. 원인과 결과가 있었고, 흥분과 결합된 규율이 있었으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해변에 혼자 있는 소년의 모습이 스쳤다. 그 모습이 나를 사로잡았다.”
--- p.18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지적인 약점이나 사고력의 결함이 아니다. 대신에 일종의 해방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식의 불완전성 덕분에 우리는 궁극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 없이 자유롭게 미지의 바다를 탐험할 수 있다.”
--- p.98
“과학은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제로 과학은 자신의 씨앗으로서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성장을 위한 핵심 에너지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과학을 과도하게 감성적으로 대하는 태도와 무관하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신비에 이끌리는 마음, 그리고 내가 말하는 미지에 이끌리는 마음은 다름 아닌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법일 뿐이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에게 느끼는 끌림보다, 그 사람이 없으면 작은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 신세처럼 인생이 불완전해질 것이라는 확신보다 더 신비로울 게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사람”은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자연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망각이다.”
--- p.145
“자연은 우리에게 경이와 겸손을 선사한다. 우리가 과학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려고 할 때 또는 손에 낚싯대를 쥐고 강에 나가거나 산길을 뛰어오르면서 자연과 만날 때, 우리는 우리가 파악한 것이 보이지 않은 전체와 연결된 가느다란 실 한 가닥임을 알게 된다. 존 뮤어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무언가를 따로 떼어내려고 하면, 그게 우주의 다른 모든 것에 묶여 있음을 알게 된다.” 알려진 것, 알려지지 않은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이 함께 모여 우리가 속해 있는 불가분의 전체를 이룬다.”
--- p.197
“아마도 어딘가 생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적인 생명체에 관해서라면 사실상 우리가 바로 그 생명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외계의 지적 생명체들이 인사를 해오거나 방문하러 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몇 십 년 지나면 외계 지적 생명체에 관한 증거를 찾으리라는 아주 희박한 가능성을 무시해 버리면 사실상 우리는 혼자다. 달리 말해서, 지적인 생명체가 어딘가에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를 모르며 예측 가능한 미래까지도 줄곧 그럴 테다. 이런 결론은 판도를 뒤바꿀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와는 물론 우리가 사는 행성과, 그리고 여기의 다른 생명체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우리 각자를 비롯해 인류 전체에게 새로운 윤리를 마련해 줄 것이다. 모든 존재와 그 행성을 포함해 다른 이성적 존재들을 존중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확장시킬 것이다.”
--- pp.205~206
“낚시는 늘 나 자신을 넘어선 차원과의 관계를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내게 낚시는 명상의 한 형태이자 자아를 내려놓는 방법이며, 가장 충만해 있는 존재의 비움 상태에 접근하는 길이다. 무위의 길. 전율과 함께 나는 깨닫는다. 행위의 최종 결과인 물고기 잡기가 나를 방해하고 있음을. 짜릿한 입질, 낚싯대의 휘어짐, 휙휙 움직이는 낚싯줄, 아드레날린의 솟구침 등은 나를 현재로, 현실 속의 순간순간으로 돌아오라는 신호였다. 역설적이게도 막상 물고기를 잡고 나면 나의 낚시 경험, 시간을 벗어난 상태를 찾는 일은 망가진다.”
---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