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지난 주말 목포, 해남을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언제 시간이 나시면 해남 땅에 꼭 한 번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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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포의 눈물
'공식적인 코스'(홍보위원회)를 끝내고 드디어 버스는 목포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내리는 목포 바다를 창너머 바라보니 왜 '목포의 눈물'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구성진 가락을 흥얼거리면서 문득 오랜 세월동안 쌓이고 쌓인
민중의 팍팍한 삶의 한 자락이 손에 잡힐 듯 합니다.
26만의 인구가 산다는 목포시. 지명도에 비해 의외로 적은 인구라는
김 과장님의 설명이 아니라도, 갈수록 침체되어 가는 지방도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가슴이 싸아해 옵니다.
한정식 집으로 안내되었습니다.
경상도내기, 서울내기들 할 것 없이 모두 그 말로만 듣던 남도의
음식을 앞에 두고 군침을 삼키랴, 탄성을 지으랴, 안 그래도 바쁜
입이 더더욱 바빠집니다.
'삼합'이니, '홍탁'이니, '세발낙지'니 하는 특산음식의 맛은
반은 말잔치가 차지한 듯 시끌벅적 거나한 시간들이 묵혀 두었던
정을 다독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맹랑한 것이 술기운인 건 세상사람들이 다 알듯이, 지위고하를 막론한
한바탕 굿판이 이어졌음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이들 중에 반란을 꿈꾸는 자 없을 리 없고, 목포를
평정하겠노라 출정하는 반란자를 굳이 막을 이 또한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반란을 일으켰는 지, 과연 성공은 했는 지 또한 알 길
없지만, 의기충천한 그 기개야말로 우리 홍보맨이 가져야 할
미덕이라 여기고 그들이 실토(?)할 때까지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2)아, 대흥사!
이틀 째 아침.
어쨌든 튀어야 산다는 우리 홍보맨들을 늦게까지 뒤치다꺼리하느라
핸드폰까지 흘리고 귀가했던 두 김 과장이 '멀쩡한' 혈색으로 우리의
아침을 챙기러 왔습니다.
'개미새끼 열 마리 줄 세우고 가는 것보다 기자놈들 열 명 데리고
다니는 게 더 힘들다'는 홍보실 속설이 있고, 늘 그렇게 외치고
다니던 우리의 '홍보맨'들. 이 날은 '기자놈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삼호에서 마련한 버스에 올라 일정표 속에
들어 있는 '문화답사'를 떠났습니다.
비가 개어 맑은 날씨 덕분인 지 머리도 맑았습니다.
컨디션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를 들뜨게 했던 건 답사코스에
'대흥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 1권에서 말한 남도의
봄과 대흥사의 누렁이, 차의 비조(鼻祖) 초의선사와 추사(秋史)의
일화를 보면서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진도대교와 울돌목(명량)을 둘러 보고 해남을 향했습니다.
잔물결이 일듯 순하디 순하게 드러누운 황토밭은 유홍준 교수의
말마따나 '~잉'하는 남도 사투리의 여운과 같고, 끊길듯 이어지는
육자배기 가락과 닮아 있습니다.
차라리 시뻘겋다고 해야 할 그 황토밭에 파랗게 넘실대는 봄마늘의
싱그러움, 거기다 샛노란 유채의 자태까지 갖춰지면서 남도의 봄은
눈물이 나도록 찬란하게 채색되고 있었습니다.
대흥사에 다다랐습니다.
비온 후에 더욱 장엄해진 시냇물 소리를 귓전에 달고 만산에 연두빛을
눈자위에 얹어 천년도량의 품 속에 안겨 봅니다.
천왕문을 들어서니 인간사 시끄럽다 말하지 말라는 듯 치마저고리의
풍성한 자락을 베고 누운 듯한 절집이 한 눈에 아늑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기기묘묘한 고목과 그윽한 대웅보전의 자태는
산세의 편안함과 어울려 이곳이야 말로 '전란의 화'를 입지 않는
천하의 길지(吉地)가 될만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서산대사의 금란가사와 발우를 봉안했다는 표충사를 앞질러 일지암으로 향했습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조차도 거기에 그것들이 있음이 가장
적절하다고 몇 번이나 되뇌면서 30여분을 제쳐 오르니 아담한
초가가 산허리에 안겨 있습니다.
초의선사가 차의 도를 일깨우고 추사 김정희같은 당대의 기라성들과
다담(茶談)을 나누었다던 곳. 초막의 마루에 걸터앉아 먼 옛날 이
자리에서 작설을 우려내던 노선사의 풍취를 한 장의 사진으로
대신했습니다.
지금도 비탈진 작은 텃밭에는 차나무가 곡우의 자양분을 듬뿍 받고
자라고 있었고,키 큰 동백은 일지암을 에둘러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일지암(一枝庵) 이름 붙인 그대에게 묻노니, 작설의 一枝인가,
동백의 一枝인가?
초막의 뒤로 돌아가니 산 샘물을 받아내는 대롱이 3개의 돌확을 이어
흐르게 하였는데, 그 위에 표주박 하나가 나그네의 갈증을 손짓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렇게 깜찍한 퍼포먼스를 연출한 그 사람이야말로 일지암의
주인이었으리니, 천하의 유홍준도 초막의 뒤뜰은 보지 못했구나
생각하니 통쾌감마저 들었습니다.
동백꽃 떨어져 점점이 붉은 길을 내려 오면서 서서히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선여관입니다. 일지암을 안내해 주던 누렁이가
있었다는 그곳. 그 누렁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문화유산 답사기'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누렁이는 아니라도 백구는 있더군요. 그것도 두 마리 씩이나....
오는 사람마다 하도 그 누렁이 소식을 물어대니 '대흥사에 가서
개소리하지 마라'는 말까지 생겨 났다고 합니다.
남도의 가지각색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주인남자에게 유선여관에
대해 물었습니다.
자기는 2년 전에 경매로 넘어온 이 여관을 사서 2억을 들여 수리해서
사업을 하고 있으며, 전 여관 주인은 82세의 전직 기생 출신인데,
지금도 가끔씩 들른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나야 뭐 여기에 특별한 추억이 있을 것도 없고, 아쉬울 것
또한 없으니....
단지 그 여관이 품고 있는 그윽한 분위기가 좋아서 보고 또 보고,
기약은 없지만 명함도 한 장 챙겨 두었습니다.
== 정말 좋은 봄날 한 때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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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그리고 대흥사,,,,,
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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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22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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