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배문학(流配文學)이라는 것
봄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는 이달 초 나는 남녁으로 내려가 여수, 순천, 하동, 남해지역을 답사했다.
열차와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여수의 향일암과 순천의 송광사를 거쳐 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 평사리, 그리고 남해 금산의 보리암 등 관광 명소를 둘러 보고 귀가차 남해읍으로 들어오니 유배문학관이라는 다소 생소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야릇한 호기심에다 시간 여유도 있고 해서 성큼 들어가 봤다.
유배문학관에서는 조선 숙종때 남해 노도라는 자그만한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한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 ~ 1692)을 비롯 다양한 사연으로 이곳 남해로 유배왔던 5~6명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숙종 때 기사환국의 희생양인 노론의 이이명(李頤命, 1658 ~ 1722)과 조선 4대 서예가의 하나인 김구(金絿, 1488 ~ 1534), 그리고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시조로 알려진 남구만(南九萬, 1629 ~ 1711)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유배 생활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하여 시조나 그림, 소설 등을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심정을 토해낸 흔적들을 보면서 당시 겪었을 고통에 애잔한 감정이 불현듯 솟구쳤다.
2. 꿈이야기 1 - 구운몽(九雲夢)
그런데, 이런저런 작품들을 둘러 보다가 문득 꿈을 소재로 쓴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 관심이 갔다. 한글과 한문 양편으로 쓰여진 소설이었다.
서포 김만중은 김장생의 증손으로 효종 1년에 진사에 급제, 벼슬길에 나선후 공조판서, 대사헌, 대제학에 오른 인물로 당파싸움이 극심했던 숙종 연간에 탄핵으로 남해에서 유배생활 중 구운몽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운몽은 주인공 성진스님이 용왕님께 심부름가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8선녀와 노닥거리다가 스승인 육관대사의 노여움을 받고 파문당한 후 속세에 양소유로 다시 태어나 8명의 낭자들과 부귀영화를 누리다 모두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꿈이야기를 그린 소설로서 유교적인 입신양명(立身楊名)과 불교의 공사상(空思想), 도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이 절묘하게 배합되어 인간의 욕심과 집착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비록 꿈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구운몽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국문소설의 하나로서 소중한 국문학적 보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금도 독자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오고 있다.
3. 꿈이야기 2 - 홍루몽(紅樓夢)
흔히 구운몽과 비교되는 소설로 청나라때인 1740년 조설근(曺雪芹)이 쓴 홍루몽을 들고 있다. 석두기(石頭記)또는 금릉십이차(金陵十二釵)라고도 하는 홍루몽은 몰락한 가문 출신으로 권세에 아첨하는 세상 인심에 염증을 느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던 조설근이 일상의 삶에 대한 관찰을 특유의 글재주로 풀어나간 애정소설로서, 도인들이 귀족 가문인 가씨 집안에 환생시킨 가보옥이란 주인공이 인생의 각종 희노애락을 겪다가 다시 선계로 돌아오는 내용으로 일상의 부귀영화를 넘어 인생의 덧없음을 일깨우고 있다.
소설 내용이 마치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을 연상하듯 도가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소설 집필 자체도 작가의 어려운 처지를 반영한 도피처로 이용된 느낌이지만, 방대한 등장 인물과 세심한 상류층 생활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어 이를 동경하는 중국인의 정서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오늘날까지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4. 꿈이야기 3 - 금오신화(金鰲新話)
또다른 몽환적 문학작품으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 가 생각난다. 여기에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남염부주전(南閻浮洲傳) 등 5편 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대부분 귀신, 저승, 꿈 등 현실과 동떨어진 몽환적 작품을 선보여 당시 그의 심정을 짐작케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실망,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절개를 지켜 우리에게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릴적부터 천재적인 문재로 촉망받았으며, 유교와 불교를 아우르는 폭넖은 사상으로 인간성을 중시하고 사회적 횡포와 이념적 허위를 적시하였다. 한때 환속했으나, 다시 불교에 귀의하여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서 김시습이 30세 무렵 지금의 경주 남산에 머무를때 지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5. 삶의 지혜
예컨대, 삶의 역경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는 종교적 가르침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글이나 그림 등에 집중함으로써 어려운 시간을 헤쳐 나가기도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현실 세계에서의 좌절을 꿈이야기에 실으면서 위안을 얻으려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싫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덧없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내려 놓아라"
하지만, 이번 여행 중, 하동 평사리에 있는 박경리문학관(朴景利文學館)에 들렀을 때, 중국 전한시대 역사가 사마천 (司馬遷)에 대해 쓴 그녀의 시가 벽에 붙어 있었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못떠나는 배' 의 첫번째 시 중에서)
2천년이 넘는 시공을 초월하여 그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을까. 그녀 역시 결혼 4년만에 남편을 잃고, 26년에 걸쳐 대하소설 '토지' 를 완성했다. 소설의 배경이 된 평사리를 한번도 가보지 않고~
어떻게 보면, 이것도 일종의 꿈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힘들고 혼란한 세상을 버텨가는 인간의 지혜는 위대한 법이다.
(금년 3월 여행명상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