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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수많은 은총!
그 누구에게든 ‘최초 활동 무대’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의 베이스캠프로 당대 가장 잘 나가던 도시, 거룩한 도시의 상징 예루살렘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유다 지방에서 활동을 개시할 것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부들과 농부들이 어울려 살아가던 한적한 시골,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고, 종교적인 관습이나 전통, 신앙생활에 있어서 유다 지방과는 많이 고립되어 있었던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깡촌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을 선택하신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휘황찬란, 위풍당당한 당대 대도시들의 위선과 타락을 산산조각내기 위해 작고 낮은 도시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작고 낮은 도시에서 소박하게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잔뜩 부풀린 사람들, 자칭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서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성탄 대축제 기간을 끝내고 이제 다시 한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회개해야겠습니다.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은총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작은 것도 아름답고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고통이나 십자가도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온통 기쁨꺼리로 가득한 축제의 장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상처나 고통을 안긴 이웃들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새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력들, 아주 좋은 회개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 더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한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하셨다가 철퇴를 내리시는 징벌의 하느님의 아니라, 돌아갈 때마다 활짝 팔을 벌리시며 또 다시 안아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지난 삶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 사실은 선물이요 축복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 갖은 결핍과 죄투성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그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란 존재, 흙부스러기처럼 나약하고 머리칼보다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 같은 중죄인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안심하고 기쁘게 지상 생활을 엮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저 사람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그를 귀히 여기고 그라는 존재 안에 깃들어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나서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꽉 막힌 마음 여는 법: 작은 틈새 찾기>
복음: 마태오 4,12-17.23-25
어떤 분이 요즘 믿음에 불타 그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하려 하는데 거기에서 반작용이 너무 커서 조금은 힘이 빠지는 상황입니다. 그분에게 저는 ‘너만 잘났냐?’라는 반발의 마음이 들지 않게 살살 다가가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자세하게 이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습니다.
가끔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부모에게 떠밀리다시피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 청년이 들어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고해본 지 얼마 되었는지, 죄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꽤 오래 냉담하던 입이 반쯤 나와 있던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진짜 죄 없어요.”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을 읊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빛 자체이십니다. 빛이 의미 있는 곳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둠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굳게 믿게 하는 무언가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주려고 간암 말기 환자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고해성사를 거부하며 “나 죄 없어!”라고 외쳤습니다. 임 신부님은 속으로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하며 돌아섰습니다. 꽉 막혀 말해봐야 소용이 없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자신이 어둠임을 알지 못하여 스스로 빛을 거부해 목을 매 자살하게 된 상황이 아니라면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완전히 빛을 차단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항상 빈틈을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사탄만이 빈틈을 주지 않습니다.
저도 나름 잘 산다고 교만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저의 빈틈을 공략하는 말들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자비가 필요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고해성사를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 강론 때 조금 합당하지 않은 농담을 하는 것, 아주 가끔이지만,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새벽 미사를 했던 것, 감기 걸리고 마스크 안 쓰고 미사 하는 것 등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신부님은 회개하셔야 해요!”라고 말하면 저도 “본인이나 잘하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어린 관심으로 그러한 것들을 말해줄 때는 ‘아, 바꿔야겠구나!’라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가가야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비극은 잘못된 ‘믿음’ 때문에 시작되고 그 믿음을 파괴할 작은 틈을 찾아 누구도 빛을 넣어주지 못한 데서 비극으로 끝납니다. 예를 들어 ‘멕베스’를 생각해봅시다.
맥베스의 비극은 세 마녀의 예언을 맥베스가 맹목적으로 믿고, 주변의 누구도 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하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글래미스의 영주, 코더의 영주, 그리고 미래의 스코틀랜드 왕이라는 칭호로 인사를 건넵니다. 이들의 애매모호한 말은 맥베스의 마음에 야망의 씨앗을 심어줍니다. 마녀들의 말은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맥베스는 이 예언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가 코더의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를 들은 레이디 맥베스는 그의 야망에 불을 지피며, 맥베스가 직접 행동해 던컨 왕을 살해함으로써 예언을 이루라고 부추깁니다. 만약 레이디 맥베스가 던컨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점이나, 던컨이 친척이자 집에 초대받은 손님임을 상기시켰더라면, 맥베스의 결심은 약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조언은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운명이라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맥베스는 예언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마녀들의 반쿠오 후손에 대한 예언 때문에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는 반쿠오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암살하려 하지만, 반쿠오는 살해되었지만 플리언스는 도망칩니다. 누군가 마녀들의 말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나 예언이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더라면, 맥베스는 자신의 행동을 재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언의 확실성을 믿는 그의 집착은 그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맥베스의 불안감이 더욱 깊어지자, 그는 마녀들을 다시 찾아갑니다. 마녀들은 새로운 애매한 확신을 제공합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그를 해칠 수 없다.”라는 말과 “"버넘 숲이 던시넌 언덕으로 움직일 때까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러한 말은 맥베스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며, 그를 파멸로 이끄는 자만심을 심어줍니다. 누군가 숲이 인간의 위장으로 인해 움직일 수도 있다는 점이나,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 간주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을 지적했더라면, 그의 자만심은 누그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맥베스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맥더프 가족을 몰살시키는 등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한편 레이디 맥베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미쳐가며, 결국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목표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했지만, 그들의 행위가 가져온 결과를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콤과 맥더프가 이끄는 군대가 버넘 숲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위장하며 던시넌 성으로 진격하자,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는 마녀들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고, 맥베스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믿음을 굳게 유지합니다. 맥더프가 자신이 제왕절개로 태어났음을 밝히자, 맥베스는 마침내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습니다. 마녀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은 그의 행동과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태도는 결국 맥베스가 맥더프에게 죽임을 당하게 만듭니다.
맥베스의 비극은 마녀들의 예언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덕적 논리를 제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결과입니다. 그러나 제어되지 않은 야망과 운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맥베스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그의 길에는 파괴와 비극만이 남았습니다.
꽉 막힌 사람을 설득하려면 그가 믿는 믿음의 빈틈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해봐야 이미 세 마녀를 믿고 있는데 어떻게 그 생각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방법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녀는 하느님은커녕 사람에 대한 신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도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녀의 믿음을 조금씩 허뭅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남편과 살아도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참 생명의 물을 주는 분이 당신임을 알리십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그녀는 귀를 더 막아버렸을 것입니다.
항상 꽉 막힌 사람은 그 사람의 믿음을 깰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서 그 안으로 빛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어둠의 믿음을 깰 작은 빈틈으로 들어오는 믿음의 빛으로 자신이 어둠이었음을 깨닫는다면 차차 빛을 받아들이게 되어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4,12-17.23-25: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것을 아시고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때가 되었을 때, 수난 하시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유혹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님께서 유혹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다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셨고 이사 9,1-2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맨 먼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분노가 내렸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도 그들은 많은 빛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많은 예언자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이셨고 그 빛이 그 지방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큰 빛은 우리 주그리스도이시며 밝게 빛나는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백성”(16절)을 즉 무지라는 오류 속에 있는 백성들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16절)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의 힘에서 오는 것으로 아직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그들을 이미 그 빛이 비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붙잡히자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요한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참된 증인임을 알리고자 그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신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루카 17,21)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마에게 붙들린 육신을 풀어주시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신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24절)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질병은 육체의 병을 뜻하고, 고통은 영적 질병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병은 신성의 권능으로 영적인 병은 자비의 말씀으로 낫게 해 주셨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께 용서받고 하느님의 참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배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배움을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릇이 바뀌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중).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고 그릇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니라는 말에 큰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까지 본당에서 매주 성경 강의를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강의했던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즉, 앞으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며 성경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공부하기 전과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그릇이 바뀌어 지는 것이었습니다.
배움은 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움을 멈춰야 할까요? 아이들은 공부가 싫다고 말하고, 청소년은 공부가 지겹다고 합니다. 중장년은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노년이 되어서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합니다. 그릇이 바뀌지 않으니 계속 똑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이 바뀌어야 행복할까요? 바뀌지 않아야 행복할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새 물건을 사게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배움의 시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배움을 통해 바뀌게 되는 나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똑같은 삶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도파민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똑같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도파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다가설수록 새로운 배움이 계속됩니다. 그 새로운 배움으로 행복이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실제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고, 사람들이 데려온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역시 고쳐주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환자들만 치유하시는 의사의 역할만 하셨을까요? 항상 말씀이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그릇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알리게 됩니다.
우리의 그릇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 알아가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았느냐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오 헨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3,24)
주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쁨을 얻으시고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기쁨을 얻네.
우리가
계명을 지켜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 안에
그분께서 편히 쉬실 자리를
마련해드리기 위함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빛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가 대림 시기라면
성탄 시기는 그 빛을 머금고 있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갇혀 지낼 우리들이
더 이상 어둠 속에 갇혀 지내지 않고
밝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져 지내지 않아도 됩니다.
빛이 우리 안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죽음과 죄의 노예 상태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처, 슬픔, 아픔의
내면적 의미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둠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물리적 장소적 개념에 국한되지도 않고
물리적인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하루 잠시 멈추어 서서
그분을 더 깊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빛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김건태 루카 신부님 - 성사담당사제
마태오 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하는 소위 ‘성취인용문’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1,23; 2,15.17.23; 3,3; 4,14; 8,17 등등).
마태오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구약)성경에 친숙했던 신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저술하다 보니, 구약성경에 예고된 메시아가 바로 이분, 예수 그리스도임을 입증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에게 예수님에 관한 사건과 행적은 모두 구약성경에 이미 예고된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모든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메시아이시고 약속의 실현이라는 표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분은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당신의 사명을 펼치기 시작하십니다. 왜 이곳을 당신의 활동 거점으로 삼으셨을까?
갈릴래아(히브리어로 갈릴)는 하나의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에 앞서, (이방인)지역을 뜻하는 일반명사입니다. 이스라엘 북부 변방에 위치해 있어, 상당수의 이방인이 자주 드나들거나 거주했기에 이 지역을 갈릴래아라 낮추어 부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시대에 이 지역은 즈불룬 지파와 납탈리 지파의 영토였는데, 역사적으로 이 두 지파는 천한 하위 지파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첫 선교활동 거점으로서의 갈릴래아라는 지명에는 이처럼 이방인 선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불러 모아 선교사명을 내리신 곳도 바로 이 갈릴래아라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마태 28,16-20).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는 첫 말씀으로 복음을,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회개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라는 좁은 의미를 뛰어넘어, 생각과 의식을 포함한 행동의 변화, 삶의 변화를 말합니다. 마음을 바꾸면, 삶을 바꾸면 하늘 나라에 다가설 수 있다는 말씀이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그야말로 복음(福音)입니다.
구원은, 하늘 나라에 들어섬은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 전적인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도리가 바로 회개, 마음과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올 한 해, 시작부터 그리고 온전히 나 자신을 바꾸겠다는 다짐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두신 하늘 나라에 더욱 다가서는, 이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은 없다는 신념과 함께 그 안에서 신앙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 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1.06.월."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 17)
우리는
모든 나라
가운데
하늘 나라를
향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참인생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가까이 온
하늘 나라를
만나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얼룩진
거짓의
껍데기를
벗고 새롭게
만나는
하늘 나라의
기쁨입니다.
회개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하늘 나라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회개의 삶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 주시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의
마음은
하늘 나라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삶이
하늘 나라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공현은
우리네 삶의
새로운 생활의
물꼬를 트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축복은
우리들의
마음과 실천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하늘 나라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실천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새로운 오늘입니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하늘 나라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1.6)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예수님의 땀!'
오늘 복음(마태4,12-17.23-25)은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말씀'과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본격적으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면서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인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예수님의 첫 말씀은 '회개'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의 땀'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십자가 죽음에 이르까지 행하셨던 '예수님 공생활의 모습'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흘리셨던 '예수님의 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오셔서 겪고 있는 문제들에 함께하셨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 치유 기적의 소문을 듣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땀 흘리신 예수님을 믿고 또 그 삶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제들, 수도자들, 신자들인 우리의 지금 모습은 어떤지?
예수님처럼 땀 흘리고 있는지?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땀 흘리고 있는 이들과 사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치유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치유 받고 있는지?
한번 각자의 성소(삶의 자리)에서 나의 모습을 곰곰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3,22―4,6
사랑하는 여러분, 22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4,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4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자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6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