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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 완전히 하나 되는 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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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완전히 하나 되는 법
완전히 하나가 되는 법.
오늘 제자들을 떠나시며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법에 대해 자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라는 생각으로 즉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도 사랑은 누구를 내 안에서 밀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사랑은 누군가를 내 안에 품는 것이고,
주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시듯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지 않으셔도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만 우리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지 않고 우리도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 되기를 포기하고 사는 것이 또한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한때는 우리가 하나 되기를 그리도 열망하고 애도 썼지만
언제부턴가 하나 되는 것을 포기하고 살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왜 포기했을까요?
그것이 싫어서?
아닙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말 하나 되기를 바랐고 애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하나가 아닌 우리를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과 이웃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다가
더 이상 이 문제로 미워하고 괴로워하기 싫어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가 되는 데 최대의 적은 ‘완전한 하나’에 대한 열망입니다.
다르게 얘기하면 ‘완전, Perfect’에 대한 열망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완전에 대한 열망이 욕망 또는 욕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불완전하지만, 특히 하나 됨에 있어서 많이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하나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완전한 하나에서 부족한 하나가 더 아쉽고 불만입니다.
100%의 하나에서 1%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고 불만이고,
숫제 10% 부족한 것보다 더 아쉽고 불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으로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이어야 하고,
주님께서 완전히 하나 되기를 바라신 것도 이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무엇보다 바라시는 것이고,
이것이 신앙적인 방법이고 가능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서로 안에 머물기보다 하느님 안에 같이 머무는,
독탕에 들어가기보다 같이 욕탕에 들어가듯이
하느님 사랑 안으로 같이 들어가는 우리가 되는,
그런 꿈을 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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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많은 교육으로 성인이 되어 쉽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지요.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지식의 성장에는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영적 성장에는 외면하는 부모가 많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은 “지금은 공부 때문에 성당 다니기 힘들지만, 어렸을 때 복사도 했으니, 성인이 되면 열심히 나갈 것입니다.”, “자녀의 종교 자유도 존중해 줘야죠.”라고 하십니다. 좋은 것이라면 아이가 싫다고 해도 챙겨주는 것이 부모 아닐까요? 그렇다면 신앙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자신의 회칙 ‘생명의 복음’에서 현대인이 죽음의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숫자가 늘어나고, 생명을 존중하지 못하는 많은 모습에서 죽음의 문화는 그 세력을 더 넓혔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생명의 복음을 주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당신 스스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시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죽음의 문화 속에서만 있으면 생명의 복음을 지루하고 오래된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학협회의 정식의학회지에 발표된 연구가 인상적입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종교의식에 참석하는 미국인의 경우 자살할 확률이 5배 이상 낮다는 것입니다. 또한 각종 연구에서도 정기적으로 교회나 회당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살할 성향이 적다는 발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 곧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적 성장만 무조건 ‘OK’를 외쳤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의 대상은 바로 주님을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이 믿는 이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루면, 아버지의 사랑을 매 순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으며,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도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영적 성장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분명히 훨씬 더 큰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는데도, 세상의 풍요로움과 안락함만을 추구합니다. 참 생명을 얻기 위한 삶이 아닌 겉으로만 보기 좋은 것만을 향해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되어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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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때때로 우리가 작고 미미한 방식으로 베푼 관대함이 누군가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을 수 있다(마가릿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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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렇다면, “하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라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속해’(소유됨, 곧 계약의 실현) 있음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들 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부자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 ‘하나 됨’이란 곧 ‘사랑 안’에서의 이루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영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됩니다.”(에페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리하여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이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알게 하는 것이 ‘대사제 기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누구나 당신이 계신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당신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나’ 되어 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서로가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똑같아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 오직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오니,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길 바라오니,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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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에 응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유의하시는 것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들을 생활 실천으로 옮겨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이고 영혼의 힘이며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히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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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감동적으로 읽은 ‘동화’가 있습니다. ‘의좋은 형제’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형은 이제 막 혼인한 동생을 생각했습니다. 동생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을 거로 생각한 형은 늦은 밤에 추수한 벼를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주려고 나섰습니다. 동생도 형은 아이들이 많으니 필요한 것들이 많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늦은 밤 추수한 벼를 형의 논으로 가져다주려고 나섰습니다. 둥근 달이 바라보는 가운데 형과 동생은 추수한 벼를 지게에 지고 만났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았습니다. 제가 이 동화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더 차지하려고 형제들이 법정에서 다투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아픈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형제들이 핑계를 대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내 것을 나누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형제가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난’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형제들끼리도 죽고, 죽이는 싸움을 합니다. 재물을 위해서라면 형제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합니다.
며칠 전입니다.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날은 성당에 일이 많았습니다. 오전에 장례미사가 있었고, 오후에는 구역미사와 본당미사가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꾸르실료 모임과 전례분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구역미사를 마치고 식사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꾸르실료 모임과 전례분과 모임의 방이 겹치는 것입니다. 그 방에 영상을 볼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 두 단체 모두 그날 영상을 이용해서 모임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전례분과는 꾸르실료에게 방을 양보하려고 하였습니다. 꾸르실료에서 영상을 이용한 교육을 하기 때문입니다. 꾸르실료는 전례분과에게 방을 양보하려고 하였습니다. 모임이 겹치면 본당전체 행사를 준비하는 모임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양보하려 하니 문제 해결은 쉽게 되었습니다. 영상을 볼 수 있는 다른 방을 알아보았고, 꾸르실료 모임이 그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감정이 들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욱하는 마음에 말이 거칠어지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내가 먼저라는 이유를 찾으면 문제가 복잡해지곤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는 부활에 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부활이 있다고 하였고, 천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두가이는 부활이 없다고 하였고, 천사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이 있다고 하면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서로 갈등하고, 분열하게 하였습니다. 천인대장은 바오로 사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안전한 곳으로 바오로 사도를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오로 사도가 지혜롭게 처신한 것을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의좋은 형제처럼 자신의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상대방에게 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기 마련입니다. 집에서 새지 않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누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빵이 되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나눔은 우리가 하나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면 그런 모든 것도 기쁨으로 변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증거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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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특히 사순시기를 지내며 꼭 보게 되는 명작 중의 명작입니다.
저는 이 영화 안에서 몇 장면을 아주 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누려 하는 부분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바로 직후의 장면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마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그 순간 골고타 언덕을 바라보던 저 높은 곳에 계신 분께서 눈물 한 덩이를 떨어뜨리십니다. 저는 그 눈물 한 덩이를 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 앞에는 슬피 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 한 방울은 다른 어떤 눈물보다 강하고 깊었습니다.
그 눈물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눈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주님과 함께 계신다는 뜻은 그러한 아픔을 함께 나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도 주님과 하느님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그 고통을 나눌 때 시작됩니다. 고통을 함께 지고 걸어갈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우리와 주님의 사랑이 늘 한결같기를 바랍니다. 지금처럼 늘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분의 고난을 기억하며 사랑으로 걸어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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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상처받는 사람들에게….
유독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독 이타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상처를 자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만약 그대가 쉽게 상처받는다면 그대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따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상처를 입고
그것을 견뎌내고
아물게 하고
그렇게 삶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대에게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대의 따뜻한 마음은 하늘에서 보화로 쌓여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상처를 받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슬기롭게
그리고 따뜻하게
상처를 피하고 잘 다독이며 지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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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일치의 여정
-사랑의 일치 공동체 예찬-
공동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공동체에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늘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공동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요셉 수도공동체에 산처럼 정주하기 36년째, 날로 깊어지는 공동체와의 사랑입니다. 공동체와의 사랑은 주님과의 사랑을 뜻합니다. 저에게 참으로 위대한 스승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배우는 것이 참 많습니다. 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있기에 매일 강론 쓰기도 가능합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얼굴들이요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분열시키는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일치입니다. 사람이 흩어버리면 하느님은 모으십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공동체 일치의 비결을 말합니다. 역시 사랑의 일치입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다.”(성규72,4-7)
이 또한 아가페적 순수한 사랑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공동체에서 사랑을 배워가는 형제들입니다. 서로 건들이지 않는 것, 그냥 놔두고 묵묵히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요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랑입니다.
무한히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사랑의 계명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은 “존재는 관계이자 사랑이다”라는 장시가 생각납니다.
“존재는 관계이자 사랑이다
혼자서는 못산다
혼자꾸면 꿈이요 함께꾸면 현실이다
잘났든 못났든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안에 ‘홀로’여야 한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들이
그를 잡아주어야 한다
흙속에 묻힌 뿌리들처럼 좌우사방 보이지 않게 뿌리내려야 한다
뿌리내림의 관계다
단절고립된 혼자가 그대로 지옥인거다
땅을 보라
평화로운 공존의 사랑이 아닌가
보금자리 공동체는 땅과 같고
사람들은 땅의 품에 뿌리내린 초목들과 같다
뿌리내릴 너와 나의 공동체가 없다면
그 삶 얼마나 위태롭겠는가!
예전 철없을 때는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며 순수를 고집했지
참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껍데기없는 알맹이가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어디 가능이나 하겠는가
내가 껍데기라면 너는 알맹이고
네가 알맹이라면 나는 껍데기인거다
알맹이 있어 껍데기이고 껍데기 있어 알맹이다
네가 있어 나이고 네가 있어 나이다
이렇게 알고 보면
우리는 서로 ‘짐’이 아니라
서로가 하느님의 ‘선물’인거다
평범하나 이보다 더 깊은 진리, 깊은 지혜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너와 내가 함께 사랑의 공동체 이루어 살아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함께한다 하지 않으셨나
혼자서는 살지도 못하고 절대로 사람도 못된다
십중팔구 괴물이나 폐인이다
때때로 내 공동체의 땅을, 내 관계들의 뿌리를 점검해 볼 일이다
너무다 자명한 진리, 까맣게 잊고들 산다”-2005.5.
19년전 이때쯤의 장시의 깨달음의 글이지만 지금은 더욱 공감합니다. 공동체 예찬 같은 시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대변하는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도 그대로 사랑의 일치에 대한 간곡한 기도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고별기도의 내용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참으로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기 위하여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요 바로 우리가 그 대상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일치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일치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상호내주의 사랑안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삶과 사랑 따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자체가 사랑입니다. 저절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마음이 시선은 늘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매일의 사랑의 성체성사가, 공동체의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이 중요합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평생 날마다 바치는 사랑의 공동전례기도 찬미와 감사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평생 사랑의 전사로, 사랑의 달인으로 만드는 평생 사랑의 훈련입니다.
제가 볼 때, 사랑의 전사, 사랑의 달인이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랑의 지혜로 위기를 돌파해가는 바오로의 시야에는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공동체라는 의식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바오로의 증언이 결정적 해결의 열쇠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부활을 주장하는 바리사이들과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천인대장의 기민한 개입으로 바오로는 구출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정말 하느님의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뿐이 없고, 일단 이들의 격렬한 대립에서 탈출에 성공한 바오로입니다만, 여전히 이들은 하느님께 맡기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치의 선교 여정에 오르는 바오로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부활의 증언, 사랑의 증언, 일치의 여정에 항구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일치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참 많이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공동체는 내가 누구인지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공동체 자체가 나를 비워가는 겸손의 도장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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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 됨을 향하여>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나
내 안에
그대 들이리니
그대
그대 안에
나 들이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나
그대 안으로
들어가리니
그대
내 안으로
들어오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나
그대 안에
있으리니
그대
내 안에
있으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나
나이며
그대이리니
그대
그대이며
나이소서
나
그대에게
그러하듯이
그대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와 그대
그 너머
모든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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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한 17,20)
그리스도께서 사랑받으시듯 우리도 사랑받고 하나 되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안에서 하나이며,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십니다. 우리는 앞에서, 본성이 아니라 은총에 따라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하나라고 말한 바 있으며, 진실을 좀 더 상세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마니교도들이 끊임없이 내세우는 것과 달리 인간 영혼의 본질과 하느님의 본질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성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은총의 영역에서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께 사랑받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기에 그 몸의 지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요한 1,12-13 참조).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처음에 엑카르트는 바울로의 이 권고를 본문으로 삼아 이 설교를 작성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구절도 덧불인다.
“때가 차자 하느님이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으며,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이 속량되도록, 곧 우리가 아들 자격을 받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아들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셨으며 그 영은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이처럼 그대는 이미 종이 아니라 아들이요, 아들이라면 또한 하느님이 세우신 상속자입니다“(갈라 4.4-7).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도 닮았음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여러분 안에도 있다- 을 규명한다. 또한 그는 충만한 시간에 입각한 새로운 시간 감각도 규명한다. 엑카르트가 이러한 주제를 앞에 인용한 성서 구절들에서 따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엑카르트는 “충만한 시간”을 일컬어 영원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지금 당장 경험할 수 있는 이 영원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움이다.(170)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읽는 법을 배워라”
이때부터 마리아 로사는 올린삐아와 의논하여 아이들을 마을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 뒤진 신입생이 다른 생도들이나 선생들의 무례하고 부끄러울 지경의 호기심과 신기한 구경거리로 관찰되었으리라는 것쯤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총명하고 공부하기 좋아한 세 아이는 뛰어난 진보를 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에게 있어서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한 시일이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휴게 시간이 되면 두 소녀는 재미있게 노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성당에 가서 성체 조배를 했다. 히야친타는 늘 말했다.
“난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돼요. 성당에 가면 거기에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난 혼자서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싶은데 사람들은 조금도 자유롭게 놓아 두질 않아요”
그 사람들이란 거의 모두가 이웃 사람들이었고 각자의 근심 걱정을 부탁하고 싶어서 아이들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가정의 슬픔이 되고 집안의 불행이 되어 있는 죄인의 회개를 부탁하면 세 아이들은, “우리는 그분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리고 회개하여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끔 희생을 바치겠어요" 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세 어린이는 특별히 교리 공부를 열심히 했다. 프란치스꼬와 히야친타는 부푼 가슴을 안고 첫영성체를 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첫영성체! 이것은 두 어린이의 유일하고도 가장 큰 희망이었다.
프란치스꼬는 자기는 공부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실한 데서 들었기에 가끔 공부 시간에도 성당에서 기도했다.
마을에 들어서면 셋은 먼저 성당에 가서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인사했다. 프란치스코는 때때로 루치아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넌 공부하러 가야 해. 난 여기 남을 거야. 머지 않아 난 천국에 갈 테니까 공부할 필요가 없어. 수업이 끝나면 알려 줘."
해가 기우는 저녁 때 루치아는 성당 구석에 성체를 모신 제대 가까이 있는 프란치스코를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다음 겨울 프란치스코는 병에 걸려서 집에 남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소년의 큰 슬픔은 예수님을 찾아 뵙지 못하게 된 그것이었다.
“제일 섭섭한 것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잠깐이라도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야. 성당에 가거든 예수님께 내 몫까지 많은 인사 드려 줘." 하고 루치아에게 부탁했다.(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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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17,21)
예수님은 어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오늘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수도 생활해 오면서 제가 깨달은 점 하나는 우리는 세상의 어떤 배움보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게 우선하고 중요하다고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홀로 살 수 없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며, 나와 다른 타인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함께 사는 법’을 먼저 터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안에 살고 당신과 하나 되어 가는 많은 삶의 양식 중에서 수도 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함께 살아가면서 다름 가운데서도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가를 보여 주고 싶으셨다고 봅니다. 수도 생활은, 하느님은 서로 위격이 다르면서도 한 몸으로 참된 친교와 일치를 이루신 것처럼, 세상 안에서도 ‘하나가 될 수 있음’ 드러내는 증거요 실현이라고 느낍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하나를 이루기 위해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려는 그 치열한 삶의 노력이 필요한 삶의 형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삶의 형태가 공동체 생활이며 많은 삶의 방식 중의 하나가 수도 생활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저만이 아니라 많은 수도자가 공감하는 것은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입니다. 공동체 생활이 원만하면 일단 수도 생활은 편합니다. 살다 보면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타고난 삶의 자리부터 성격과 외모, 생각과 감정, 말하는 태도며 행동 양식 등등. 모든 점이 다른 사람이 함께 모여 하나가 되는 길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요원하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분명 사람은 다 다르게 마련인데 어떤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지 몰라도 이 다름을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 비로소 인정하고 깨닫기 시작합니다. 엄청난 착각인 게지요. 하지만 착각은 대오각성을 위한 발판도 됩니다.
주님은 이렇듯 각기 다른 사람들을 한 공동체에서 살라고 불러 주셨으니 이 또한 신비입니다. 한 생을 함께 부부로 살아가도록 성사로 결합된 부부들마저 이혼이 늘어가는 세상에 한 성깔(?)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산다는 게 어디 쉽겠습니까? 친형제 자매도 서로 떨어져 살다 보면 몸이야 그렇다고 해도 정신과 마음으로도 하나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저는 제 가족 안에서 지금 겪고 있습니다. 하물며 여당과 야당, 남과 북, 영남과 호남, 강남과 강북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길은 어려운 일이며 신앙으로 모인 공동체에서도 하나가 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수도 생활이 지향하는 목적은 함께 사는 형제와 자매들이 조화로운 방식으로 함께 사는 것이며 함께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정신에 있어서나 마음에 있어서나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단순히 혼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다수가 하나가 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한다고 믿습니다. 함께 사는 형제 혹 자매가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사랑 안에 살아갈 때, 하느님 사랑이 서로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형제 혹 자매를 사랑으로 묶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 계신 곳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저희 안에 머물러 계시고, 그 사랑이 우리를 튼튼하게 묶어 주고 결합시켜 주어야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손도손 함께 모여 살아가는 그 자체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며 세상에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을 저희에게 주셨음을 감사하면서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산다면,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음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17,21) 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보여 주신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가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며 또한 아버지 안에 사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 안에서 언젠가 하나가 되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17,22)라고 기도하신 염원은 꼭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저희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저희 또한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으로 숨 쉬며 살아간다면 언젠가 우리는 하나가 되리라 믿습니다. 모리스 뒤뤼불레의 「자비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노래를 보냅니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시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찬양하고 즐거워 합시다.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경외하고 사랑합시다. 신실한 마음으로부터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자비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이 계시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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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 예수님의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 부분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일치’에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하나 됨은 사상의 강요나 이념의 주입으로 이루어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 안에 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치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계시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그 어떤 억지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자발적 일치는 어디에서 생길까요? 복음은 ‘사랑을 알게 됨으로써’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께서…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저절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를 무시하고 하나 됨을 강요할 때 나오는 결과가 ‘불일치’이며 ‘분열’입니다.
오늘 독서는 바오로를 고발하는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의 ‘불일치’를 묘사합니다.
바오로를 고발하는 일에는 담합하였지만 정작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그들은 결국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지고 맙니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천인대장은 바오로가 그들에게 찢겨 죽지 않을까 염려”하였을 정도로 그들의 입장 차이는 격렬하였습니다.
사상과 이념, 원칙과 엄격한 교의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알려 주고 그 사랑이 진심임을 믿게 할 때 서로는 상대의 마음 안에 하나 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라는 것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 하신 당부이고 기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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