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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 무릎으로 산 사람
창 17: 1-8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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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미국에서 살고 있는 목사님으로부터 e-메일을 받았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자기는 도저히 올 형편이 못 되니 저더러 대신 가서 좀 문상을 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메일을 읽고 나서 가봐야 하겠다...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마음을 먹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미국에 가서 그를 만나고 함께 공부하고 생활을 하는 동안에 느닷없이 그가 나를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꼼짝을 못하거든요.
나이 차가 불과 두 살밖에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나이에 오히려 제게 형 노릇 하려는 목사들도 많은데... 깎듯이 형님처럼 모시겠다니... 좀 얼떨떨하기도 하고... 약간의 감동도 먹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면 그가 개척한 어려운 교회에 가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설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니까 꼭 가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다른 이유는 만일 내가 문상을 가지 않는다면 초상집이 너무 쓸쓸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녁 무렵에 시간을 내어서 다른 후배 목사 한 사람과 함께 안산을 찾아갔습니다.
병원을 잘못 찾아가기도 하는 과정을 거쳐서 장례식장을 찾아갔는데...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아들이 미국에 있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자칫 잘못하면 목사인 우리들이 가서 예배라도 드려 주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갔는데 장례식장에 도착하면서부터 내 생각이 참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차장에는 문상 온 차가 얼마나 많던지. 알고 보니 그 모든 사람들이 그 집에 문상을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종합병원의 장례식장을 전세 내어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화환은 어찌 그리 많던지... 수백 개는 되어 보였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들의 화환도 자주 보였습니다.
검은 양복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요소요소에 서서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던 분위기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이지요.
“잘못 왔나...” 어리둥절하면서 다시 보아도 상주에는 그 목사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의아해하면서 문상을 하고. 그 형편을 알고 보니까 형이 한 분 있는데, 그가 바로 안산시장이라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 말고 형이 또 있다니...’ 이런 생각도 들었고. 이렇게 찾는 사람이 많은 장례식이라면 길을 물어가면서 여기까지 꼭 와야 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특히 자기 형이 아주 잘 나가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꼭꼭 숨긴 채로 마치 내가 아니면 그를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간곡한 마음으로 부탁하던 그가 좀 응큼한 사람처럼 다시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난 후에 나는 그로부터 또 하나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 목사님 감사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것이었지요.
문상을 다녀온 데 대한 감사와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그의 아픈 마음이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자기의 형이 아주 높고 대단한 자리에 있다든지... 그런 것은 일절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이렇게 사람의 뒤통수를 쳐도 되는 것이냐...’며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를 마치 나 아니면 그를 도울 사람이 없는 대책이 없는 동생처럼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의 이름이 아직 아브람으로 되어 있지만 이제 곧 그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으로 불리게 되지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처음 듣는다든지 그를 아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 만큼 그는 우리들의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오늘 저는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면서 여러분들께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175세가 되어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약 백 년 동안의 그의 여정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특히 기억에 남는 아브라함! 아브라함하면 서슴없이 생각나는 그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우리는 그가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본토와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난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에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어려운 결단을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가 25년 만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려하는... 우리들로서는 상상하기가 힘든 모리아산의 아브라함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조카 롯을 위해서 기름진 땅을 양보하는 넓은 마음도 가졌지만, 그가 위험에 처했을 때에는 318명의 군사를 이끌고 기습을 해서 그를 구해내는 군사적인 재능과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 아브라함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좋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는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자기 아내인 사라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하갈을 통해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했던...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겁쟁이기도 하여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 적도 있는... 전혀 남자답지 못한 연약함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을 주지 않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가진 섭섭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기도 하는... 우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아브라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여러 아브라함의 모습 가운데서 여러분들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은 어떤 때의 아브라함인가요?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이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면서 되어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아브라함이 구십 구세가 되었던 때였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거기에도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때에는 아브라함이 몇 살이라고 밝히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느 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흔 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유독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의 나이를 밝히는 까닭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너무 늦었다... 이제는 끝장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과 사라는 오래 전에 아브라함의 남자로서의 능력이 사라지기 전에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로부터도 14년이나 지난 때였으니 아무래도 이제는 모든 것이 늦어버린 아브라함이 처음 길을 떠날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가졌던 기대나 희망이 다 식어져버린 그런 때라는 것을 우리는 이 대목에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던 여호와 하나님도 그것을 이미 알고 계신 듯합니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렇게 자신을 그에게 소개하십니다.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소개하시는 여호와... 이것도 다른 부분에는 찾기가 힘든 생소한 대목입니다.
‘너는 이미 끝났다고...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전능한... 불가능해 보이는 일조차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면서 도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어떤 특별한 태도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요?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엎드린대...’ 아브라함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뿐이었습니다.
이 대목에 제게는 아브라함의 삶의 모든 여정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제게 제가 여러분에게 물었듯... 그렇게 물어본다면... 저는 이 대목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보면 엎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의 비결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편할 수는 없습니다.
99세가 되도록 이제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이 다 끝나도록... 하나님은 그와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약속에 걸고서 길을 떠났는데 이제껏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실망만을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브라함에게 다시금 예전의 약속을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네가 심히 번성하게 할 것이며 너와 네 후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다... 나는 너와 네 후손이 살기에 충분한 넉넉한 땅을 주어서 그것이 너희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을 하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에게는 이런 여호와께서 보여주시는 청사진이 별로 마음에 와 닿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이름도 바꾸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언약의 증거로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도록 하십니다.
이러한 제안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v.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이렇게 아브라함의 반응을 전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아마 도저히 불가능 한 일을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반응인 것이지요.
‘이제 내 나이가 백살인데요 하나님... 사라는 아흔이구요...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이제 그런 기대는 절대로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다른 허황된 약속을 하지 마시고 이스마엘이나 잘 키워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이것이 아브라함이 가지는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은 지금 살아오는 가운데 가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것은 자꾸만 약속을 지연시키시고 자기에게 실망만을 안겨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이 진지하게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셔도 믿지를 못하고 오히려 감히 비웃음으로 반응을 하는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저는 그 해답을 바로 이 대목에서 찾았습니다.
‘아브람이 엎드린대...’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그의 행위가 삶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 찾아온 위기를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는 전환점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이 말씀을 읽은 후부터 제게는 아브라함의 여러 모습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아브라함이 가장 강하게 와 닿습니다.
비록 마음속에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온갖 갈등과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의 비결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항상 엎드리는 사람... 비록 실망스럽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누군가가 불러도... 항상 그 앞에 엎드리려 하는... 여호와라는 이름 앞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엎드리며 무릎을 꿇는...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 이런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비결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아브라함처럼 여호와 앞에 항상 엎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 여호와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여기에 바로 우리의 모든 비결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간단한 원리가 아니겠습니까?
엎드리는 일... 무릎을 꿇는 일처럼 쉽고 간단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만약에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행해보시오... 그러면 그것은 참으로 하기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위기를 해결해 보시오...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들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를 모를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오시오... 그렇게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하기가 참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완전한 행동을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듣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무릎을 꿇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자꾸만 자기를 내세우려 하고 자기를 주장하려 한다면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려 하지를 않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능 하신 하나님 앞에서 단지 엎드리기만 한다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는 참으로 무능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단지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의지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려 한다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친히 일하십니다.
백세나 되어서 도저히 자식을 낳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너무 인생이 괴롭고 실망스러워서 무슨 희망적인 말을 들어도 항상 비웃음으로 반응 할 수밖에는 없었던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쁨의 웃음을 웃게 하시는... 그런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엎드리는 순간에 시작하신 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린대 오늘 말씀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순간... 자기의 힘으로 이루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고 자신의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그 순간... 이것이 실망으로 일관하던 그의 삶에 새로운 길이 열리는... 하나님 없이 홀로 걸어가는 삶이 아니라...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진정 행복한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 가운데 이러한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즘 우리는 참으로 불안하기 그지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어떤 분의 권위로 보험회사>에 보험을 들어 놓고 지금도 매달 7만 몇 천 원씩 어김없이... 제 허락도 받지 않고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제가 병에 걸렸거나 노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가입을 한 것인데... 이제는 오히려 제가 그 회사가 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 회사를 걱정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우리의 운명과 미래를 맡길 수 없는 불확실한 혼돈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그 분에게 우리가 직면한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행동이라는 것은 단지 그 분 앞에 엎드리는 것뿐입니다.
다른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거나 의지하지 말고... 내 의지나 생각대로 하려고 하지도 말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오직 그 분만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모든 일을 새롭게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결단이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에 보면 여기에도 아브라함이 엎드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번에는 대상이 좀 다릅니다. 그는 아주 뜨거운 한낮에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엎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18장 1-2절에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서두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이야기라고 소개를 하는데, 정작 이야기의 전개는 낯선 나그네 세 사람이 불쑥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이야기가 맞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나타난 나그네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하는 대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 나그네들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라는 견해에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진 매력을 보게 됩니다.
비록 그는 우연히 자기 집을 지나가나 나그네들이었지만 그들을 향해서도 몸을 땅에 굽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이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잘 보이기 위해서 마치 굽신거리는 양... 그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지 이 뜨겁고 고통스러운 시간에 나그네들이 허기진 채로 계속 길을 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해서 그들을 잘 먹여서 다시금 길을 가게 하는 생각이 그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나그네들을 향해서도 몸을 굽힐 줄 아는... 다시 말하면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초대해서 좀 쉬게 하고 잘 대접해서 다시금 길을 떠나게 하는 그런 배려와 보살핌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그네들을 정성을 다하여서 대접합니다.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몸을 굽혔고 아주 겸손한 어조로 그들이 잠간이라도 집 앞에 있는 나무그늘에서 쉬어 갈 것을 권합니다.
‘당신들이 발을 시는 동안에 물과 떡을 조금 가져올 테니 그것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길을 떠날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그가 그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은 그가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떡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직접 골라서 잡게 합니다.
버터와 우유를 곁들여서 그들의 식탁에 내놓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마치 하인처럼 세 나그네가 식사를 다할 때까지 식탁을 떠나지 않고 직접 그들의 시중을 들어 줍니다.
이 나그네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그 후의 일인 것이지요.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사랑이 넘치고 멋진 사람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만 엎드릴 줄 알았던 것이 아니라 자기 집을 지나치던 나그네를 향해서도 몸을 땅에 굽힐 줄 알았던... 그러면서 말을 건네는 일부터 그들을 대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그들을 대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였는데... 그는 오히려 그들이 나그네였기에...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그들은 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어려운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서둘러서 이러한 일을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 엎드린다는 것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려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몸을 굽힌다는 것은 그에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가 조회를 이룰 때에 우리는 그 신앙을 건강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오늘처럼 살기가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이웃을 향하여서도... 특별히 고달프고 힘들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에... 그런 이들을 향해서도 몸을 낮추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잊지말아야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