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은 인내와 행동들이 준비되었을 때 가능하다.
모든 것에 대한 준비를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기가 하고자 하는 혹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필요한 것들은 내공으로 만들어 두어야 한다. 전화위복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다. 모진 고통과 어려움을 먹고 위복으로 환생하기 때문이다.
81년 어느 겨울날, 달러를 벌기 위하여 출장을 계획했다. 나는 롤빽 3개에 순모 스웨터와 내가 페이턴트를 가지고 있는 대님 지퍼빽 등 견본들을 넣어가지고 처음으로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나는 교포 (지금은 동포)들과는 큰 인연이 없어 수출거래를 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날, 한국 사무실로 찾아 온 그 사람과 특히 아들에 넘어가서 일스킨 007가방 40 foot 컨에이너 하나를 선적했다. 신용장은 선적 후 곧 부도가 났고 그 사람은 약 70%에 해당하는 새로운 신용장을 열어 결제를 하였으나 약속같이 나머지 30%에 대한 지불은 차일 피일 미루기에 마침, 이민을 가는데 결정적인 큰 도움을 받은 지인도 뉴욕에 있었기에 직접 가서 만났으나 그가 보여준 집은 요즈음의 렌트였고 상품은 다 팔았는지 없었다. 또한 그 사이 부도가 났다고 한다. 하여튼 그런 인연이 있었던 뉴욕을 미국 수출을 위한 교두보로 하기 위한 모험적 시도였다. 뉴욕에서 다시 템파와 튜산쪽으로 바이어를 만나로 가야했다.
문제없이 뉴욕에 도착하여 친구같은 지인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샤워까지 했는데 일어나 눈을 뜨니 5일이 지났다. 그동안 고열로 정신을 못차리고 자고만 있었던거다.
놀라 일어나 약속 스케쥴을 보니 템파쪽 약속일은 이미 하루가 지나갔고 튜산쪽은 2틀 시간이 있었다. 지인들은 아직 젊으니 돌아갔다 건강회복 후 다시 해도 될 것이라 권했다. 난감하였다.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들었다. 하루를 더 쉬며 몸을 추스렸다.
다행히 템파 일스킨 바이어는 오랜 바이어였고 마침 휴가중이라 자기가 더 미안해 하였다. 나는 친구들이 돌아가라며 견본 스웨트를 사며 보태 준 몇 백불을 쥐고 la로 향했다. 그때 복장이 패딩 점퍼에 첼시 부츠였다.
록빽 3개와 일스킨 007가방을 들고 la공항에서 땀을 비오듯 쏫으며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죤 웨인 에어포트로 데려다 주겠다는 백인 할아버지의 링컨 콘티넨탈 택시를 탓다. 평생 처음 타는 그 링콘에 않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 할배가 나에게 물었다.
"니, 지금 그 곳에 왜 가는지 물어도 돼냐? 그곳은 사막에 덜렁 비행장만 있다. 그 가서 모할래?"
나는 금방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돌아 갈 수는 죽어도 없기에. 대님 지퍼가방 샘플 컨펌만 받으면, 바로 원단 재단하고 지퍼 캇팅하고 작업장을 돌릴 준비를 다 한 채 공장장 이하 알라들이 기계 앞에서 작업대 앞에서 굿 소식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그 알라들을 살릴텐데...
나는 죽어도 안되고 빈손으로 돌아 갈 수는 더 더구나 없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직 바이어 오더장만 획득하는게 사명인데... 나는 눈물을 닦고 마음을 추스리고 난 뒤 대답을 기다리며 앞을 보고 운전하는 할배에게 당연히 모를거라 생각하며 물었다.
"할배요. 코리아 압니꺼? Do you know about South Korea?"
"니, 한국서 왔냐? 확실하냐? 니, 인천 아냐? 멕아더 장군 아냐?"
이런 젠장!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질문이 큰 소리로 튀어 나왔다.
"내가 바로 인천 옆 동네 서울서 왔오. 625참전 용사시군요."
"마. 디게 반갑다. 니 이제 걱정 뚝이다. 가자! 어데로 간다꼬?"
일단 로정(路程)은 의외의 용사에 의하여 쉽게 풀렸다. 나는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죤 웨인 공항 옆 작은 모텔에 방을 잡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메르린에게 전화하였다.
"헤이! 스퍼라이즈! 니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노? 내가 엘에이 공항으로 가려했는데... 잘됐다. 딧따 반갑다!"
"미투다!!! 살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는 링콘 택시의 월리암에게 갔다.
그는 이미 지불한 돈하고 지 돈 좀 보태서 억지로 다시 나에게 안겼다. 나는 핸드 메이드 스웨터 5장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마주 보며 우리는 포옹을 하였다.
그를 보내고 3시간 거리에서 출발하는 메르린과 전화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벤츠를 타고 나타난 메르린을 만났다. 그녀는 만나자 말자 행거에 매달리고 바닥에 늘부러진 지퍼빽 사이에 서 있는 표지의 타임지를 나에게 주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이쁘고 섹시하고 간에 이제는 뺄 수없는 관계임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서울 하이얏트 호텔에서 3번이나 걸쳐 만나며 휴대용 재봉틀로 견본을 자르고 봉합하고 하여 만든 마지막 견본 Sample을 서로 확인하고 떠났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견본을 만들어 왔다. 그 견본을 본 그녀는 입이 벌어졌다.
나는 그곳에서 하루를 잔 후 그녀에게서 55만불 오더와 L/C 신청서 카피를 받았다.
템파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며칠 사이의 우여곡절과 반전에 의한 일단 성공, 그리고 한국의 회사 가족들과 두 아들을 생각하며 실컨 울었다.
그때 대한민국의 개인소득은 USD2,750- USD2,500- 사이였다.
*The Economic Organization of East Asian Capitalism - Page 115
*Societal Culture and Management - Page 244
Theodore D. Weinshall - 1993 ?
템파에서는 Eel-skin bags 의 주문과 함께 USD15,000- 을 현금으로 받았으며, 50%는 check & L/C for 50% 를 받았었다. 그 후 모두 잘 끝냈다.
이 사실들은 이제서야 공개하지만, 내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누구에게도 말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여기서 지금 생각하는 것은, 그때 힘들어 포기하고 돌아갔거나 다른 방법을 찾았더라면, 두 건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어쩧든 딸라를 벌어 들여야 한다 와, 회사는 지속하며 성장해야 한다 와 그리고 내 가족이 바닥에 깔린 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 후 숱하게 많은 이런 유사한 경우를 여러 나라에서 많이 겪었다.
이것은 우여곡절의 1/100도 안된다. 언제나 나는 한국법과 내가 있는 곳의 법을 먼저 공부했고 가능한 한 그 법의 테두리 안에서 무엇을 했다. 끝.
첫댓글 참 대단하시네요
상남자 스타일~~
멋진 삶을 응원합니다!
함께 해 주신 정아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늘 즐겁고 건강한 생활 되시길 바랍니다~
@제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