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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서로 다른 생각.
생각에 빠져 무작정 걸어가던 율은 문득 이상한 예감에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연못에 놀라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녀는 자신이 또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이그! 길치!!"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던 율은 곧 눈 앞 있는 연못이 홍연당 꼬맹이가 빠졌다는 그 연못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 옛날 용이 놀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질만큼 넓은 연못에 가득 피어있는 연꽃을 보자 율은 하연의 말이 떠올랐다. 저 꽃으로 술을 담근다고 했었다. 아니다. 술을 꽃속에 넣어 향기를 더한다고 했었다. 율은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왜 쓸데없이 그런걸 하냐구? 그냥 마트에서 사먹지."
"한 부장님 아니십니까?"
갑작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율은 두 명의 나인과 함께 서 있는 정 하연을 발견했다. 산책을 나온 하연은 연못에서 율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다가서다 그녀의 깊은 한숨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 마마?"
"어찌 그리 한숨을............무슨 근심이 있으신 것입니까?"
"에? 아...... 아니요. 그냥.......... 그냥 힘이 좀 들어서."
대답을 얼버무리던 율을 문득 걱정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하연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연꽃과 어울리는 그녀는 마치 연꽃에 쌓여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대충 그림을 그려봐도 자신보다는 대장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에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개 뼈다귀 같은 상상이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그림들을 지우려는 듯 휘휘 허공에 손을 내젓는 율을 보며 하연과 나인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이던 율의 귀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누구십니까? 한 부장님 아니십니까?"
소리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율은 일전에 만난적이 있던 백연당의 이 윤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더럽게 예쁜 기집애지만 또 더럽게 재수없는 기집애다. 하필이면 이곳에서, 하필이면 이런 삼자대면을 하게 될줄이야, 율은 욕지꺼리가 튀어나오는 걸 겨우 눌러 참았다.
어젯밤, 영찬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율의 아버지 한 대감에게서 전해들은 혼례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더구나 폐하께서 먼저 그들의 혼례에 대해 언급하셨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폐하께서 왜? 지금 이렇듯 중요한 시기에 왜 율이와의 혼례를.........."
7년 전에도 율과의 혼례가 정해졌던 적이 있었다. 두 집안이 자연스럽게 혼기에 들어선 두 사람의 혼례날을 정하였고, 당시 스승이셨던 호위대장 역시 여인인 율을 궐에서 내보내는 것이 옳다 생각하여 찬성한 일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선왕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일들이 그 모든 일들을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도는 영찬과 율을 수족과도 같이 여기며 자신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게 하였고, 이후 보위에 오른 뒤에도 반대 세력과 궐에 남아있던 비빈들을 수청하는 일을 함께 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일에 힘을 쏟았었다. 그러는 동안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고, 율과의 혼례에 대해 이야기가 나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 왕이 갑작스럽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대체 뭘까?
"폐하!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그대와 부장의 혼례 문제 때문이냐?"
이 도는 아침 일찍 자신을 찾아온 영찬을 보며 이미 그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눈치채고 있었다. 바로 엇그제 두 집안의 어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필시 그것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그러한 명을 내리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갑자기는 아니지 않는냐. 원래대로라면 그대와 부장은 7년 전, 이미 혼례를 치뤘어야 했었다. 갑작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미뤄졌던 두 사람의 혼례를 이제라도 치뤄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허나 지금은 폐하의 국혼을 앞두고 있사옵니다. 이런 때에 굳이......"
"국혼은 아직 정해진 것이 아니다. 두 사람 중 먼저 회임을 하는 쪽이 왕후가 될 것이라 했으니 적어도 1년이라는 시간이 걸릴터, 굳이 1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지 않느냐."
"허나 폐하! 폐하도 아시다시피 지금 부장은......"
"알고 있다. 사람이 바뀌었다는 걸, 하지만 영찬, 부장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이냐?"
"네?"
"그 두 사람, 바뀐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렸지만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지 않느냐."
"그것은....."
"만일 이대로 부장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느냐? 부장이 돌아오지 않는다해도 모두들 그 아이가 부장이라 알고 있으니 그대는 그 아이와 혼인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
"그리고 부장이 돌아온다하여도 문제 될 것은 없지 않느냐. 그 누구도 부장이 바뀐 걸 알아채는 이가 없는데, 지금 그 아이와 혼례를 올리던, 돌아온 부장과 혼례를 올리던, 다른 이들의 눈엔 모두 같은 사람인것을, 짐이 보기엔 문제 될 것이 없다 생각하는데."
"허나........."
"나만 그러한 것이더냐?"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 아이.........분명 부장과는 많이 다른 아인데, 나는 왠지 그 아이가 처음부터 이곳에 있던 것처럼 여겨지는구나. 앞으로도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고........"
"..........."
"말을 하지 않았지만 7년이라는 세월을 노심초사 기다린 양가 어른들을 생각하거라."
영찬은 더 이상 할말이 없다. 자신 또한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율과 혼례를 치룬다해도 원래 율과 치루는 혼례와 다를바 없다고, 만일 혼례를 올린 후 두 사람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간다해도 그와 혼인한 이는 율이 되는 것이다.
영찬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어젯밤, 혼례에 대한 말을 들었을때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바뀐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 한구석은 지금의 율과의 혼례가 싫지가 않았다. 내내 율을 따라다니는 자신의 시선을 깨달을 때마다 흠짓흠짓 놀라며 그 시선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걸 깨닫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찬성하지 않는다. 이 혼례를........나 역시 이 혼례를 찬성하고 싶지 않다. 마음을 가져간 이가, 그 마음과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가버리면 남은 나는 어찌하라고........'
"헌데 영찬! 지금 저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
"네?"
생각에 잠겨있던 영찬은 왕의 손 끝에 서 있는 율을 보았다. 홍연당과 백연당의 주인들도 보았다. 도대체 왜 저들이 이 곳에 함께 있는 것인지 이 도와 영찬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시선을 나누었다.
율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까닥해 보였고, 도도한 표정으로 그 인사를 받은 이 윤희는 율의 곁에 서 있는 하연을 힐끔 쳐다보았다. 갑작스런 이 윤희의 등장에 긴장한 듯 표정이 굳어져 있던 하연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비록 만난 적은 없으나 처음 본 순간 그녀가 백연당의 주인임을 눈치챘다.
"저........정 하연이라 하옵니다."
"정 하연이라.........홍연당에 있다는 아이가 너로구나."
"네? 네..........."
"한적한 시골 구석에서 자랐다던데..........그래, 어떠하더냐?"
"네?"
"궐에서의 생활이 어떠하냐 물었다."
"............"
"듣자하니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하던데?"
"그..........그것은........"
"훗! 이곳이 궐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경거망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태생은 어찌해도 감출 수가 없는 법이라지만 아랫 것들에게 흉 잡히는 일은 하지말았어야지!"
"........."
하연은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인 채 적의에 가득 찬 이 윤희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이 윤희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하연을 보고 있던 율은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 저런..........와~ 이 기집애 완전 싸가지네. 이쁘면 장땡이야? 이게 어디서 누구한테..........뭐, 태생이 어쩌고 어째? 이게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는 하지 못할 망정, 어디서 고개 빳빳히 쳐들고 훈계야!! 이런 개 싸가지!!!'
"소문에 듣자하니 심연의 눈을 가졌다 하던데..........."
"아.......아니옵니다."
"그렇겠지. 소문은 소문일 뿐. 세상에 심연의 눈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지."
"왜 없어? 여기 있는데.........그리고 태생이 어떻게 좋으면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고개 빳빳이 들고 있어?"
"!!!!!!!!!!!!"
보다못한 율이 하연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 윤희의 곁에 서 있던 상궁이 그런 율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지며 크게 놀랐다. 이 윤희는 예상치 못한 율의 태도에 놀란 듯 미간을 찌푸려 보였지만 도전이라도 하는 듯 턱을 치켜드는 율을 보며 심한 모욕이라도 받은 듯 입술을 꼭 깨물며 파르르 떨며 노려보았다. 눈을 부릅뜨고 무엄하다 호통을 치는 상궁은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따귀라도 날릴 기세로 율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기가 죽을 율이 아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하얗게 질린 하연이 상궁을 노려보고 있는 율에게 매달리며 만류했다. 겁에 질려 떨리는 하연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율의 속을 긁어 울컥 치밀어 오르게 만들었다.
"부.......부장님!! 어찌 그러십니까?"
"무........무엄하십니다!!! 감히 이 분이 뉘신줄 알고!!!"
"뉘신지 자기 소개를 안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깐, 자기 소개를 하라는 거잖아요!"
"한 부장님!! 언행이 지나치십니다. 이 분은 백연당 마마십니다. 이제 곧 왕후가 되실..........."
"헐!!!! 누가? 완전 김치국을 원샷으로 드링킹 하시네."
"뭐..........뭐라?"
"그거 정해진 거예요? 내가 알기론 아닌데...........후보는 여기도 있잖아요?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건데, 그 쪽 마마가 될지, 이 쪽 마마가 될지 어떻게 아냐구요?"
"가..........감히!!!"
"한 부장님!!! 말씀을 삼가하십시오.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마마의 아버님이 전 재무대신 이 경환 대감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겁니까?"
"누구요?"
"전 재무대신 이 경환 대감이 바로 마마의 아버님이십니다!!"
"이 경환? 아~ 생각났다. 폐하를 죽이려고했던 휘빈인가 뭔가하는 여자 오빠 랬지. 근데, 그게 뭐요?"
율은 그 동안 자신과는 별 상관없다 생각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 경환이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방금 저 상궁 아줌마가 침까지 튀기며 들먹거렸던 이름, 바로 왕을 죽이려했던 휘빈의 오라비이자 전 세자빈의 아버지인 이 경환! 게다가 재수없게 이쁜 저 기집애 아버지가 이 경환이라고 했다.
"무.........무엄하십니다. 어찌 그리 함부로!!!!"
율은 기세등등하게 호통치는 상궁을 향해 허리에 손을 얹고 턱을 치켜들었다. 이 경환 대감의 여식이라는 말에 한 풀 꺽일줄 알았던 부장이 오히려 눈을 똥그랗게 뜨고 턱까지 치켜드는 것을 본 상궁은 말문이 막힌다. 이 윤희 역시 거침없는 율의 말에 놀라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하연은 애걸하듯 율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부장님!! 어찌 이러십니까? 제발........."
"놔 봐요. 아니, 전 재무장관이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잖아. 근데 뭔 끗발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감히..........감히 부장 나부랭이 주제에 나의 아버님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하다니!!!"
"뭐? 부장 나부랭이?!!!"
발끈한 이 윤희가 파르르 독기를 내뿜으며 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겁먹고 물러설 율이 아니다. 율은 자신의 팔을 잡고 매달리다시피 만류하고 있는 하연의 손을 뿌리치고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한 발자국 이 윤희의 앞으로 다가섰다. 율의 기세에 당황한 상궁이 재빨리 이 윤희를 보호라도 하듯 가로막고 나섰다.
"이..........이 분은 백연당 마마십니다. 폐하의 승은을 입으신 분이란 말입니다!!!!"
상대는 별무대의 부장 한 율이다. 그녀가 맘만 먹는다면 이곳의 그 누구도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왕이랑 하룻밤 잤으니깐 알아서 기라는 거야?"
"부장님, 어찌 그리 무엄하십니까!!!! 감히 마마께........"
"아! 그러고보니 나 부장이네. 그 쪽은 그 뭐냐..........첩지!!!! 그거 받았어? 그거 없으면 아직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이런 무엄한........"
"계급으로 따지면 내가 더 높잖아요. 안 그래요?"
낙마 이후 종종 해괴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궐안에 자자하게 퍼지고는 있지만, 이렇듯 안하무인으로 방자할 줄은 몰랐다. 피가 꺼꾸로 솟을 것만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윤희는 입술을 꼭 깨물며 작은 주먹을 꼭 쥐고는 바들바들 작은 몸을 떨고 있었다.
"저.........저런 무엄한........."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영찬은 율의 어이없는 행동에 눈이 휘둥그레져 당장에라도 뛰어가려 했지만 곁에 있던 이 도가 손을 뻗어 그를 가로 막았다.
"기다려라."
"폐하! 지금 부장이 무엄하게........"
"틀린 말이 아니지 않느냐?"
"네?"
"부장의 말이 맞지 않느냐. 짐과의 하룻밤을 보냈다고는 하나 정식으로 내명부에 이름을 올린것도 아니고, 그의 아비 역시 이미 관직을 떠났으니 서열로 따진다면 부장이 가장 높지 않겠느냐?"
"하오나 마마께서는 폐하의........"
"아직은 아니다."
"폐하........."
영찬은 이 윤희를 보는 왕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홍연당으로 돌아온 율은 하연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의 떡에 침 흘리지 말라고, 왕한테 시집왔으면서 왜 한눈을 파냐고 대놓고 한마디 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마디 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정혼자를 사랑한다 고백한 하연의 편을 들어 이 윤희와 맞짱까지 뜨고 말았다.
'하여튼 이 놈의 성질머리는..........대장한테 쓸데없이 오지랖 넓다고 욕했으면서, 넌 왕후가 될 여자한테 그렇게 지랄을 하냐. 나중에 걔 돌아오면 영문도 모르고 당할건데, 어쩌지? 대장이 이 사실을 알면 그 자리에서 날 죽이려 들거야.'
하연은 어깨가 축 쳐져 울상이 되어있는 부장이 걱정스럽다. 하필 그곳에서 백연당의 주인을 만나 율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부장이 그녀에게 그런 막말을 해댔으니, 그녀가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결코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하연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
"내가.......... 좀 심했죠?"
"어쩌려고 그리하셨습니까? 그 분, 분명 오늘의 수모를 잊지 않으실 겁니다."
율은 의기소침해 있는 하연을 보자 괜시리 미안해 진다. 자신이야 떠나면 그뿐이지만 남은 사람은 어쩌라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앞 뒤 분간 못하고 나설때 안 나설때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일을 저지르고 보는 이 놈의 성질머리는 아마도 죽어야 고쳐질 고질병인가 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율은 갈증이 났다.
"에이~ 진짜 기분 꿀꿀하네. 시원한 맥주 한 캔 마셨으면 좋겠다."
"매.......주?"
"매주가 아니라 맥주! 술이요. 술!!!"
"술............ 술이 드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술이라도 마시고 팍 꼬그라져서 아무 생각 안하고 잤으면 좋겠어요."
"허면........"
잠깐 망설이던 하연이 이내 나인을 시켜 술상을 차려 내왔다. 기분이 영 좋지 않았던 율은 나인이 내온 술을 보자 이내 관심을 보였다. 비록 생각했던 시원한 맥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술은 술이다.
"담그셨다는 술이 이거예요?"
"네. 연잎주입니다."
"어~우!! 향이.......진짜 연꽃 냄새가 나요. 마마 솜씨가 꽤 괜찮나 봐요."
"어머니에 비하면 그저 하찮은 솜씨일 뿐입니다. 그럭저럭 겨우 흉내만 내는 정도인걸요. 드셔보십시오."
"나만 마셔요? 마마는 같이 안 먹어요?"
"저는 아직 술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이거 왜 만들었어요?"
"그냥 이곳 연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있어서.......꽃도 예쁘고, 그다지 할일도 없고 해서........"
하연의 미소가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줄 사람도 없는 술을 담그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연못으로 향했을 그녀, 그녀는 그 새벽 잠들지 못한채 고향에 남은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시지도 못하면서 담그긴 왜 담그고 술상은 왜 차렸데?"
"부장님께서 드셔주시면 되잖습니까. 한 두잔 정도는 근무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어차피 나는 할일도 없어요. 자꾸 사고만 친다고 미운 털 박혔거든요. 같이 마셔요."
"예? 아닙니다. 전 아직 술을 마셔본 적이 없는 걸요."
"그러니깐 마셔보라구요. 자기가 만들었으면서 무슨 맛인지는 알아야죠."
"허나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혹여 실수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술 한잔 마셨다고 큰일나지 않아요. 그리고 여기 나 말고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잖아요. 맨날 그날이 그날이고, 그러니깐 오늘 같은 날, 하루쯤은 취해도 상관없다구요."
"하지만......."
"지금 마마 기분도 바닥이잖아요. 나도 그렇고, 그러니깐 둘이 같이 한잔해요. 혼자 마시는 거 재미없으니깐."
".........."
하연은 망설였다. 여태껏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기에 선뜻 내키진 않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요 근래 마음이 심란하다.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사람이 생겼지만,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기만 했었다. 말 한마디는 커녕, 그날 이후 한번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 넓은 궐 안, 그 사람을 찾아 돌아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저 산책을 핑계 삼아 그의 흔적을 찾아 연못을 찾았던 것인데, 그곳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망설이는 하연을 보며 율은 지은이가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우울한 날, 술 한잔 같이 마셔줄 친구가 없다니.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지은이와 목이 아프도록 수다떨던 그때가 그립다.
"내가 뭔 짓을 하는 건지, 17살이면 아직 미성년잔데, 미성년자한테 같이 술 마시자고 꼬시고 있다니...... 아니지! 나이는 17살 이래도 결혼까지 했잖아! 결혼도 하고, 좀 있으면 애도 낳을건데 술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안그래요?"
"네?"
"그러니깐 술 마셔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다구요."
망설이던 하연은 결국 술잔을 들어 율에게 내밀었다. 율은 하연의 잔에 쨍강 소리가 나도록 부딪혀보이고는 은은한 향기가 스며나오는 연잎주를 홀짝 털어넣었다. 제법 도수가 높은 술인 듯 알싸하게 목을 타고 내려갔다. '캬~아!' 소리를 내며 율이 잔을 비우는 모습을 보던 하연이 조심스럽게 잔에 들었다. 하지만 반잔도 채 넘기지 못하고 금새 얼굴을 찌푸리며 잔에서 입을 뗐다. 생각보다 그 맛이 독하게 느껴진다.
"쿨럭!쿨럭!"
"어머나, 괜찮아요?"
금새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기침을 해대는 하연을 보던 율은 피식 웃음이 났다. 고 2였었던가? 정환이 마시던 맥주 캔을 슬쩍해 한 모음 마셨다가 된 통 혼이 났었다. 처음 접하는 알콜올에 놀라 지금의 하연처럼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기침을 해댔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침을 해대던 하연이 율과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듯 배시시 웃어보였다.
"생각보다 꽤 독한 듯 합니다."
"원래 처음엔 다 그래요."
율은 반쯤 남은 하연의 잔과 비어있는 자신의 잔을 다시 채웠다. 잠시 망설이던 하연이 조심스레 잔을 들어 비우며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런 하연을 보며 율은 가슴이 답답해진다. 자신의 정혼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미워할 수가 없다. 차라지 하연이 아니라 재수없게 이쁜 그 기집애였다면 대놓고 미워라도 하겠는데, 뭔놈의 일이 이렇게 대책없이 꼬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정혼자라는 놈은 혼인을 한다 어쩐다 사람 마음 심란하게 만들어놓고는 종일 코빼기도 볼 수가 없으니 정말 답답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제기럴!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뭐가 이렇게 자꾸 꼬이기만 하는 건지........"
"네?"
알아들을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율은 그렇게 연이어 석잔을 비워냈다. 취기가 도는 것인지 율의 혀가 살짝 꼬여든다.
"마마, 대장한테 좋아한다고 말 안할거예요?"
"네? 무슨 그런.......... 그랬다간 목이 열개라한들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부장님을 믿기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저는 물론이고, 저희 가문 역시 무사하지 못할테니깐요."
뜬금없는 율의 물음에 하연은 펄쩍 뛰며 놀란다. 창백한 얼굴로 행여나 말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노심초사 안절부절 어쩔줄 몰라 목소리를 낮추며 안절부절하는 그녀를 보며 율은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아니 왜?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게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그렇게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 왕이면 다야? 지는 왕비 따로, 후궁 따로면서 왜 마마는 그러면 안되는 건데? 여기가 아프리카야, 아랍이야? 뭔놈의 법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냐구? 진짜 개떡같은 세상이네."
"부장님! 제발 말씀을 삼가 하십시오. 잘못하다간 목이 달아날수가 있습니다."
"뭐만 하면 목이 달아난대. 사람 목이 무슨 럭비공인가?"
"부장님!! 아무래도 술이 과한신듯 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밖에 지키는 얘들 다 내 밑에 있는 애들이야. 어디다 이르고 그러지 않아."
"그렇다해도 말조심 하셔야 합니다. 이곳에 오기전 아버님께서는 항시 말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답답하죠? 외출도 못하고, 그래서 친정에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친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발갛게 달아오른 하연의 얼굴이 금새 굳어졌다. 쓸쓸한듯 고개를 숙이던 하연은 잔을 들어 천천히 비워냈다. 처음과는 달리 입안 가득 연꽃향이 퍼지는걸 느끼며 고향집의 연못이 떠올랐다.
"이곳의 법도가 그러한걸요."
"그러니깐 개떡같은 법이라구!!! 그런 개떡같은 법은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한다구."
"부장님........ 저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분은 부장님 뿐이신듯 합니다."
"에~이, 무슨 그런 소리를........동변상련! 사실 나도 내가 살던 곳이 그립거든요."
"본가가 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나보군요."
"멀죠. 그것도 아주...........사실은 내가 요즘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파요. 내가 좀 있으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데, 그 주인공이 내가 아니란 말이지. 왜냐하면 나는 돌아가야하니깐."
"그게 무슨.........어딜 가시는 것입니까?"
"원래 살던 곳으로, 사실 여기 주인공이 걔거든요. 근데, 걔가 지금은 나야. 그러니깐 결혼은 내가 해야하는 건데, 실제로는 걔가 결혼하는 거지. 아이고 헷갈려. 내가 말하고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무튼 중요한건 걔는 그 사람 사랑 안한다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깐 내 말은.........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지."
"은애하는 분이 계시단 말씀이십니까?"
"은애? 아! 그렇지, 여기선 그렇게 말하지."
"헌데 무엇이 문제란 말씀이십니까? 혹 저처럼 마음에 두어서는 안되는 분이십니까?"
"마마처럼.........그렇죠. 나는 돌아가야하는 사람이고, 내가 가면 걔는 돌아올거고, 그럼 걔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데, 근데 걔는 그 사람 사랑 안해!! 그래도 결혼은 해야하고.........아~ 진짜 열받네. 그렇게 보면 차라리 마마가 더 나을수도 있겠다."
"무엇이 말입니까?"
"차라리 마마가 대장한테 좋아한다고 말을 해요!!"
"예? 아니 어찌 그런 말을....."
"왜요? 여자라서 창피하다고? 용감한 자가 미인을.......아니, 남자니깐 미남인가? 아무튼 사랑은 쟁취하는 거란 말이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평생을 사는 거보다 차라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 달을 사는 게 훨씬 행복하잖아."
"그야그렇지만, 지금의 제 처지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왜 못해? 말을 해야 알지, 말을 안하는데 어떻게 아나? 대장이 독심술을 하는 것도 아닌데, 가지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게 뭐든지 간에 말을 해!"
"하지만...."
"말을 안하면 확률은 제로라구요. 하지만 일단 입 밖으로 말을 끄집어내는 순간 확률은 50%가 되는 거예요."
"예?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아들을수가 없습니다."
"후회할거예요. 지금이 아니면........대장, 좀 있으면 혼례 치룰거거든요."
"혼례!!! 대장께서.......혼례을 올립니까?"
대장이 혼례식을 올린다는 말에 하연은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굳어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인데,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한채, 이대로 다른 이의 지아비가 되어버린다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질것만 같다.
"대장께서.....혼례를......"
"할거예요. 할건데, 문제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해야 한다니깐 그게 문제지."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신 혼사라면 따르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순리? 아니 집안 어른들이 그걸 왜 결정하냐구. 자기들이 데리고 살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데요?"
"부장님......"
"차라리 파혼이 났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평생을 그렇게 사느니 파혼하고 혼자 사는 게 백배는 낫지. 받아주는데 없으면 어때서, 호위 부장인데, 이 시대에 이런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된다고, 집에서 쫓겨나면 무술도장 하나 차려서 애들 가르키면서 혼자 살면 되지. 마음에도 없는 사람이랑 사느니 그게 백배는 낫겠다!!!"
"어떤.........어떤 집안의 규수인지 아십니까?"
"어떤 집안? 어.....그게......."
"하긴 어떤 집안의 누구인지 말씀을 하신들 제가 알리가 없지요."
낙심하는 하연을 보며 율은 죄책감이 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 괜한 죄책감이 짜증스러웠던 율은 홀짝 잔을 비워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하연 역시 잔을 비워낸다.
"그렇다니깐!! 그러니깐 늦기 전에 고백하라구. 왕은.....햐! 그러고보니 그 놈의 왕이 문제네. 근데 내가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용기내서 고백해요. 나는.....나는 돌아갈 사람이니깐 그러면 안되는데, 마마은 아니잖아요. 평~생을, 궐에서 살면 평생을 대장 봐야하는데, 어떻게 그 마음을 숨기냐구."
"허나 폐하께서 아시는 날엔......."
"내가 그 동안 대장을 겪어봐서 좀 아는데, 절대 안 일러요. 일러 바칠 사람 아니야. 그러니깐 괜찮아. 비밀로 하고 고백해 봐요."
생각했던거보다 독했던 연잎주는 하연과 율, 모두를 취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문밖에 서 있는 이들에게도 모두 그 소리가 들려왔다. 문 밖에서 두 사람의 혀꼬브라진 소리를 듣고 있던 나인들은 어찌해야할지를 몰라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시루와 부영 역시 안에서 들리는 부장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기가 막히다.
"야, 도대체 우리 부장 왜 저려냐? 여지껏 부장이 술 마시는 거 처음 본다."
"그러게. 저러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어? 저........저........."
부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옆에 있던 시루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사색이 된 시루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간 부영은 그 손끝에서 왕의 모습을 보았다. 그 뒤를 따라오는 대장의 모습과 함께.
첫댓글 어후 어쩐대요!!! 율이가 기여히 사고를 치네요~~ 왕이랑 대장 앞에서 하연이랑 율이랑 엄청 사고 칠거 같아요~ㅠㅠ
등골이 서늘해집니다~ㅎㅎ 하연이가 계시받은 사람 같은데~ 저럼 안되잔아요~ㅋㅋ 넘 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작가님!!!
미루님! 기온이 점점 올라가고 있네요. 계속 즐감해주세요^^
오호호..드뎌.. 율과 영찬도 홀로 짝사랑중??? 진도좀 나갑시다... 현대에 간 율은 그래도 키스까지는 했든데~
2초동안님! 답답한 시국에 같이 젖어 진도가 안나가요ㅠㅠㅠ 힘을 내야겠지요? 다 같이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