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1일(목)
* 시작 기도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주님...
주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태워드리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란 창세전부터 언약하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며 교제와 사귐을 뜻합니다.
이는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통한 실제적인 앎입니다.
이 종 역시 성경적인 지식으로 주님을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그것은 나의 의만 드러낼 뿐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을 아는 교제와 사귐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주의 긍휼로 덮으시고 그 덮으심의 은혜 앞에서 낮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달라는, 보아스를 향한 룻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갈 6:11-18
제목 :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막을 내린다.
최종 결론 부분에서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거짓 교사로서 율법을 지키게 하고 할례를 받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밝힌다.
그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핍박을 면하고자 함이다.
할례를 받은 유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들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의도는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육체로 인하여 자랑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 앞에서 선언한다.
내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혔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할례나 무할례 곧 모든 율법을 통일하시고 완성하셨으며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할례를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곧 생명으로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 것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충만하기를 원한다.
세상에는 예수를 믿어 자기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곧 구약 시대 때에도 그러했다.
구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어 그들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을 하나님을 잘 믿는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 1차 목적이 아니었다.
만약 이것을 안 하면 자신에게 어떤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하곤 하였다.
이것이 율법의 약점이기도 하다.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지키는 것이다.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율법이 등장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사하고 율법을 행하는 모든 일들에 이러한 사랑은 온데 간데, 없어졌다.
그리고 오직 억지로 행하는 행동만 남아 있다 보니 그것이 어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 하겠는가?
결국 이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는 것도 그렇거니와 다른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는 것 또한 자기들의 육체로 자랑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13절).
그러나 바울은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바울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 그는 그 흔적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 흔적은 십자가의 흔적이요, 고난의 흔적이며 또한 자신의 긍지이기도 하다.
예수의 흔적이란, 헬라어로 ‘스티그마’라 하는데 이는 주를 향한 거룩한 불구자의 모습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멋지고 듬직한 육체를 자랑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한다.
그 연약함이 단순히 먹지 못해 빼빼마른 연약함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당한 고난으로 인하여 약해진 연약함이다.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십자가 죽음, 무덤에 장사됨, 그리고 부활)에 연합된 삶을 살았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빛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를 자랑하고 할례 받은 육체를 자기의 의로 드러냈던 자이다.
그래서 할례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고꾸라져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수 년이 지나면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갖고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랬던 바울이 오히려 이들을 함께 박해하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이것을 본 같은 동족 유대인들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저 사람이 어제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던 자가 아니냐?
그런데 이제는 왜 그들 편에 서서 우리에게 저 예수를 전하느냐면서 어리둥절 하는 것이다.
이런 바울은 이제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핍박과 박해의 여러 종류가 나열되어 있다.
옥에 갇힘, 매 맞음, 죽을 고비, 49대씩 5회, 태장을 3회, 돌로 맞음, 바다에서 파선, 그런 과정에서 하루 밤낮을 물속에서 지냄,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자지 못함, 주리고 목마름, 굶고 춥고 헐벗음 등등...
그런데 이 모든 고난 중에서도 가장 자신을 누르는 금심 중의 근심은 다름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한 근심이었다.
(고후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런 바울이 가장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약함이다.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시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도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물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다.
그 주님께서 행하시고자 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의 뜻이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다.
이 영생을 주시고자 당신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에서 고난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에 스스로 오르셨다.
또한 온갖 고난과 수욕을 당하셨으며 골고다로 오르시기 전에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 채찍을 맞으셨다.
그 채찍으로 인하여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으셨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피를 쏟으신다.
그런 와중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정상으로 올라가시려니 그 건장한 30대의 예수님일지라도 올라가실 수가 없는 것이다.
언덕 중간쯤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이끌고 골고다 정상에 오르셨다.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 대못을 박으셨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으며 창에 옆구리를 찔리시고 결국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왜 이런 고난과 고초를 겪으셔야 했는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요 완전히 부패하고 썩어서 도무지 소생의 가능성이 없는 나와 같은 자로 인함이다.
그저 이렇게 몇 글자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님에도 이것 외에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내가 나를 보면 도무지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
날마다 반복하는 습관적인 죄들, 내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나의 의, 내가 했노라 자랑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과 낙심에 좌절하고 마는 나는 진짜 죽은 흙이요 벌레만도 못한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 나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확인한다.
나로서는 할 수 없지만 오직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썩어 냄새나는 쓰레기장이요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똥통과 같은 존재이다.
이런 돼지 똥냄새가 풀풀 풍기는 그런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다가 먼저 알아보시고 달려와 아들을 와락 끌어안으시는 아버지가 바로 나의 하나님 아버지시다.
나를 바라보면 아무런 소망이 없지만, 날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 분으로 인하여 소망이 생긴다.
이 소망은 나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이요, 또한 아들의 소망이다.
아들에게 소망이 있기에 나도 양자로서 소망을 가진다.
나도 내 안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기 원한다.
피부에 나는 상흔이 아닐지라도 오늘도 아담 안에 있는 본성인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리하여 거룩한 불구자로 절뚝절뚝거리는 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를 다시 아들 삼아 주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린다.
영광을 받으소서.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게 주신 아들의 생명으로 인하여 오늘도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죽어 마땅하며 죽기에만 합당한 죄인 중에 괴수를 주의 십자가로 회복시키시고 교정시켜 주셔서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심도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내 안에서 썩은 똥냄새가 아니라 예수의 향기가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의 흔적을 지닌 자로 살기 원하오니 나를 주의 오른손으로 장악하여 딴 길로 걸어가지 않게 하소서.
오직 주님만 나의 모든 것이오니 나를 받으소서.
주여 나의 영혼을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