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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서 막
끝없는 바람
#1-14.
“....하하하!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가 왜 그랬냐고 다그쳤더니 글쎄-”
꿈결이라 여기기엔 현실감 짙은 풍경들이 펼쳐져 나는 한참 두 눈을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다. 살짝 열어둔 창밖으로부터 재잘거리는 새 소리 만큼이나 조잘대는 계집아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기분 좋은 미풍이 불어와 침상을 가리운 미색의 천들을 춤추게 만들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알맞게 꾸민 방 안에는 그림처럼 가구들이 자리 잡고, 나는 그 안에 같은 풍경이 되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나를 깨운 수다스러운 목소리들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어쩌면 대하성으로 돌아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너무도 편안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풍경도, 처음 맡아지는 풀꽃 내음도, 처음 듣는 귀를 자극하는 모든 소리들도 익숙한 양 그러했던 느낌이었다. 혹시 나는 전장에서 죽은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 공포가 아니라 그저 생각으로 그치게 하는 평화 속에 감싸여 있었다.
바닥에 발을 딛고 침상위에 손을 짚어 일어나려던 순간 짧은 어지럼증이 스쳐갔다. 분명 경험한 적이 있는 익숙한 느낌에, 그제야 내가 정신을 잃던 순간 멈춘 기억이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지러움이 걷히기를 기다려, 문을 열고 그 아기자기한 방을 나왔다. 아니, 사실은 문을 열고 한 발 내딛기도 전에 탁 트인 시야에 펼쳐진 풍경들에 넋을 놓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닥까지 여과 없이 훤히 비쳐 보일 것만 같은 옥빛 호수가 유유히 내 앞을 흐르고 한 쌍의 이름 모를 작은 새가 망중한을 즐기는 뒤로 흐드러지게 핀 꽃나무가 미풍에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큰 숨을 들이쉬며 나도 모르게 스스로 양 팔을 끌어안았다. 지금 이 눈에 끼치는 풍경이 마치 살아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인 양 느껴져 다시금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이 풍경이 마음에 들었느냐.”
생각지 못했던 사람의 기척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의 무리에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이미 이만큼의 사람이 와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니 누구나가 보면 한 눈에 신분을 알 수 있는 그런 고매함과 화려함조차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다.
“당장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지 못할까.”
황금의 실로 용이 수놓인 검은 비단포 자락.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그 화려함 뒤에 선 나이 지긋한 노상궁이 내게 명령하고 난 뒤에야 망치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과 함께 온 몸을 낮추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폐.. 폐하를 뵈옵니다.”
왜, 어째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생면부지의 황제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입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황궁? 이 사람은 대진원국의 황제?
“이쯤이면 깨어날 것이라 하여 와보았더니, 짐의 예상이 맞았군.”
“.......”
“수태의가 말하길 응급처치가 없었더라면 생명이 위험한 지경이었을 것이라더구나.”
황제의 말에, 막사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잔상들이 급히 뇌리를 스쳐갔다. 쓰러진 나를 향해 다가오던 누군가의 손길. 그 장면들에 이어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너는 수오국의 사람이라지. 워낙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대장군이 전리품을, 그것도 사람을 데리고 왔다하여 짐이 궁금한 마음이 들어 너를 궁으로 들였다. 친히 대장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에서 수태의의 입진을 받게 한 것이니 감사하도록 하여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바닥과 대면한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답하자 나이 지긋한 황제의 목소리가 너그러운 양 포장된 소리로 주변이 울리도록 한참을 웃었다. 고개를 들고 일어나라 명하기에 자리에서 일어서고보니 황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태주의 말처럼 ‘영감’이라던지 ‘늙은이’라는 말에는 아직 어울리지 않는 중년의 나이 같았다. 비록 대장처럼 숱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아닌 듯 했지만 그리 작지 않은 키에 ‘가진 자’ 특유의 압도적인 인상을 풍겼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듯 사람을 향하는 시선은 태생적으로 길러진 나쁜 습관임을 알 수 있었다. 박덕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인자함만은 느껴지지 않는, 그것이 황제의 첫인상이었다.
태주가 농담처럼 ‘망할 늙은이’라고 하던 말들에 내 멋대로 상상해왔던 황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것을 되새겨보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무런 말이 없기에 슬몃 고개를 들어보니 이번엔 그 쪽에서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적지 않은 세월을 입증하듯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주름들 사이로 황제의 탐욕과 무의미한 권력욕 같은 것들이 보이는 것 같아 나는 먼저 시선을 피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 적국의 사람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자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예사이거늘.”
“.......”
“말해보아라. 너는 수오국 어느 가문의, 얼마나 명망 있는 집안의 규수이더냐.”
대장이 데려온 전리품이니 응당 내로라 할 가문의 계집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듯한 황제의 착각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태주가 말했던 것들의 일부를 몸소 느끼는 중이기도 했다. 뭔가 알아내고자하는 집요한 눈빛, 대장을 경계하면서도 그로부터 무엇이든 빼앗아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류의.
“소인은..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 때문에 너를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 이 제국에서 대대로 짐에 대적할 부를 깔고 앉은 대장군의 가문이니. 허면 무엇이냐, 그를 홀려놓은 것은. 특별한 방중술이라도 가지고 있는 게냐?”
낮게 귀를 파고든 황제라는 자의 저속함에 치를 떨었다. 혹자들이 이 사람에 대해 황제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 한 가지의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골을 타고 온 몸으로 소름이 번져가는 것을 느끼며, 아까 처음 눈을 떴을 때의 천국 같던 이 풍경마저 당장에 빠져나가고 싶은 소굴 같단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황제는 제멋대로의 상상에 만족했던지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원한다면 널 그 자에게서 데려와 궁에 살게 해 주마. 이 별궁인들-”
“가당치 않으신 말씀은 거두어 주시지요, 폐하.”
황제의 말을 자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별궁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황제와 시선을 맞추고도 두 걸음을 멈추지 않은 그, 대장의 얼굴이 이다지도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는 우리 앞에서 걸음을 세워 황제를 향해 짧게 목례를 건넸을 뿐이었다.
“‘가당치도 않다?’”
“이 사람은 폐하께서 곁에 두실만한 주제가 못됩니다.”
“별 핑계를 다 대는 군.”
“다만 서주와 장천을 거쳐 오는 과정에서 계집의 이용가치가 있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런 계집을 저택까지 데려가 치료하려 하였단 말이지?”
“내로라하는 가문의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신 폐하께서 적국에서 데려온 하찮은 계집 따위에 이리 자꾸 욕심을 내시면 지켜보는 아랫것들이 폐하를 어찌 여길지 심히 염려스럽습니다만.”
그의 뼈있는 말에 주변의 수행들을 돌아보는 황제의 낯빛이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그를 향해 곱지 않게 되묻는다.
“여긴 또 어쩐 일인가.”
“물론 제게서 데려가신 사람을 다시 데려가고자 왔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되찾은 것 같으니 마땅히 그리 해야지요.”
황제는 단단히 마음이 상한 얼굴로 대장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마지막 수라도 두겠다는 듯이 비열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허나 짐은 자비로운 군주로서 이 여인에게 거처를 정할 자유 정도는 주고 싶군. 자, 어떠하느냐. 네가 넋을 잃고 바라보던 이 별궁에서 생활하고 싶지 않느냐?”
계집이라면 어찌 이 커다란 부귀영화를 마다할 수 있겠냐는 듯, 황제는 얼굴의 온갖 주름과 더불어 물욕에 가득 찬 누런 눈자위를 내게 집중했다. 황제가 가진 이 이승의 것을 넘어선 듯한 아름다운 별궁을 대답 한 번이면 곧 내 것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대한 답은 쉬웠다. 대장을 향해 어찌해야할지 눈으로 묻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이었다.
“황공한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황제는 웃었다. 나는 대장의 건조한 어투를 흉내 내어 답했다.
“물론, 싫습니다.”
그 답을 끝으로, 대장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나를 데리고 별궁을 빠져나왔다. 성큼성큼 앞장서는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작은 손을 힘주어 쥔 채였다.
* * *
궐문 앞, 우릴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 그의 저택까지 당도하는 길은 그가 이 대진원국에서 가진 부와 권력과 명예를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기도 했다. 별궁에서 그와 함께 궐문으로 나오기까지 마주친 수많은 궁인과 관리들이 어떠한 존경과 경의로 예를 표하는지, 궐문을 지키는 문지기 병사들까지도 얼마나 경외하는 시선으로 그를 배웅하는지, 적어도 궐 안에서 황제의 실상을 마주하는 사람들만은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심지어는 저택에서 그를 마중 나온 마차조차 어찌나 화려하고 웅장하던지, 그런 것들을 보고 나서야 태주의 이야기가 현실로 와 닿았다. 그가 충분히 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비단 그가 가진 절대적인 무용(武勇)때문이 아니다.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 그 자리를 이끌어 갈 능력을 갖춘 사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았을 때 대장이 황제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고작 오늘 황제를 처음 본 나조차도 알 수 있을 만큼 확연히 드러났다.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황제를 대하는 그것에 이미 다를 바 없었다. 마차를 몰고 가는 하찮은 마부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는 그에게선 태연함만이 느껴졌을 뿐 자만도, 과잉한 반응도, 그 어떤 거만한 만족 따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저렇듯 유연히 창밖을 응시하는 시선조차 그러했다. 정신을 잃은 이후로 지금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난, 마주앉은 대장의 얼굴이 새삼 반갑고 생경하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옆얼굴에 자리했던 상처도, 흔적은 남았지만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다 나았네요. 눈가에 상처.”
“이런 상처는 그대로 두면 자연히 나아.”
또 시작됐다, 저 무뚝뚝한 말투.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말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 때문에 생긴 상처에 책임을 느꼈었던 죄책이 무색하게 참 밉게도 말을 한다. 그 익숙함이 반가운 한편, 그에게 응석이라도 부리듯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 상처에 매달린 사람들 수고가 얼만데, 조금은 고맙다는 생각도-”
“이만한 상처쯤에 전갈에까지 물려가며 수고할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야.”
곱지 않은 눈으로 그를 흘겨보던 내가 민망해지도록 그는 짐짓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그것이 저 말수 적은 사람의 인사법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내 걱정, 했어요?”
어렵게 꺼내어 물은 말에 그는 다시 말을 아낀다.
“그 때, 당신이었어요?”
나의 이어지는 질문에는 그도 의미를 구하듯 시선을 맞춰왔다. 좀 전 황제에게서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막사에 쓰러져 있을 때 와 준 사람, 당신이었어요..?”
“그런 것에 의미를 두는 성격인가.”
“궁금해요.”
내 집요함에서 아이 같은 고집을 읽었는지 그가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으며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내가 모르는 상황들을 되새겨보기라도 하듯 아득하게 깊어지는 그의 옆모습이 다시 심장을 전율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의 답을 기다리는 찰나가 숨 막히게 저릿했다.
“가벼웠어. 혹시 속이 비어있는건가 착각할 정도로.”
적을 베어버릴 듯한 칼날 같은 눈빛이 아닌 평화로운 시선, 한 일자로 곧게 좀처럼 긴장을 풀지 않았던 입매에 걸린 여유로운 호선, 부대를 호령하던 천둥 같았던 목소리가 내는 달콤한 어투.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지금 다시 한 번 그에게 반하게 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피 묻은 검을 노련하게 휘두르던 익숙한 그 모습, 그 이상으로.
첫댓글 대장이랑 행복해져야 할텐데요 ㅜㅜ
곧 대장이랑 러브러브 모드가 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