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표 뉴스 방송에서 상세하게 방영한 민비 시해 사건
어느 나라든 역사를 말할 때에는 자국 중심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 인식은 많은 갈등을 겪어 왔고, 식민지 지배를 받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그 분노와 아픔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도 문제나 교과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필자는 정치적인 이슈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시골 중학생들의 축구시합 같은 민간 교류까지 단절되는데에 많은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가리지 않고) 때만되면 극소수 우익단체의 기사나 데모 등, 소수의 언동을 일반화시켜 보도하는 미디어와 거기에 낚여 흥분하는 네티즌들의 댓글도 안타깝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8월24일 방영된 일본 메인 뉴스 프로그램인 "보도 스테이션"의 15분 정도에 걸친 민비 시해 관련 보도는 필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기도 하고, 지금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인 나 자신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아래는 뉴스에서 보도한 내용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국의 "반일"이란 어떤 것일지, 정치권과 민간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의 갭이 얼마나 되는지, 또는 같은 역사를 바라보는 일본인의 관점은 어떤지 등을 생각해 보고, 자기 나름대로도 다시 한 번 식민지시대의 아픈 기억이지만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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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특히 일본과 이웃인 한국. 한일관계라는 것이 중요시되는 국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피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14년전의 일입니다.
당시의 조선왕조의 왕비, 민비라는 인물이 살해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민비 암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한국 사람들의 반일감정의 원점에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학교에서는 거의 이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것을 가르칩니다.
그 가운데 이 사건에 관여했다고 보이는 상호의 자손이 만나서 손을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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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구마모토.
이곳에 일본과 한국 역사의 사이에서 오랫동안 마음에 십자가를 짊어져온 남성이 있다.
가와노 타쓰미씨. 87세.
“초등학교 4학년쯤에, 어머니로부터 ‘이것은 할아버지가 조선의 여왕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것을 너에게 준다’고..죽였던 때의 증거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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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노씨가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암살 사건. 조부가 관여했다고 한다.
그것은 지금부터 100여년전.
19세기말의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왕비인 민비였다.
군대를 이끈 일본인 일단은 경복궁에 침입해서 왕비를 살해한다.
왕비는 사후에 “명성황후”라고 불려졌다.
“제 어머니가 말한 건데.. 누가 민비인지 몰랐는데, 결국 모두(12명이) 민비를 둘러쌌던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중심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조부가 왕비를 살해한 증거라고 들었다.
가와노씨는 어린 마음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손에 들고 지켜보았다.
“집안 사람에게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옷장 속에 넣어 두고 가끔씩 꺼내 보았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이후 80여년, 가와노씨의 마음 속에서 무거운 십자가로 되어간다.
신문기자였던 가와노씨의 조부. 도대체 왜 민간인이 암살에 가담하였는가.
19세기말. 일본은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조선반도를 거점으로 대륙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선반도도 싸움의 무대가 된다.
한편 민비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남쪽으로 진출하는 남하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민비를 암살하게 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일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를 직접 상대로 해서 싸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조선내의 인물은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을 상대로 해서 국가적인 폭력을 자해한 것이 바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고 볼 수 있죠.”
사건은 조선주재의 전권공사, 미우라 고로가 지휘했다고 한다.
가와노씨의 조부는 한성, 지금의 서울에 있는 신문사에 일하고 있었다.
사장은 미우라 코시와 알고 있던 사이로 계획 단계부터 가담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사장의 출신지가 구마모토였던 것으로부터 사건에 많은 구마모토 현민, 주로 신문기자가 관여하게 되었다.
현지의 일본 영사가 작성한 조사보고서 등에 의하면 당시의 미우라 공사는 조선인에 의한 쿠데타로 보이게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건은 궁내에 있던 미국인이나 러시아인에게도 목격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는다.
일본 정부는 미우라 공사 등, 관계자를 구속해서 조사를 했다.
현재, “나라의 어머니”라고 연모되고 있는 민비의 암살 사건은 한국인의 반일 감정의 원점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선생님)“명성황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다.
(학생)“1895년에 일본 공사 미우라 부하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사건 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 반도의 식민지 지배를 시작했다.
114년의 긴 시간, 한국인은 계속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인은 그 원한의 정체를 알 수조차 없다.
“저는 조부가 그렇게 했다고.. 그렇지만 경복궁의 그림에 바로 조부가 칼을 들고 있는게… 그것에는 저도 죄를 느낍니다.”
가와노씨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상처를 지니고 온 사람이 있다.
이에이리씨의 종조부, 이에이리 가키치도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 18세. 조선에서 일본어 교사를 하고 있었다.
이에이리家에 전해지는 일본도.
“칼집(사야)만 있어요. 안은 그러니까.. 남편이 대나무로 만들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들어가니까.. 따로따로 되어 있었습니다. 종조부는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갔다고 말은 안해요. 안하지만, 안이 없다는 것은 가져가지 않았는가..하고”
이에이리 가키치는 귀국할 때에 증거 인멸을 위해 칼을 일본해(동해)에 버렸다고 보여진다.
“자손으로서 정말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무거운 십자를 짊어진 두 사람.
가와노씨와 이에이리씨는 하나의 큰 결심을 했다.
구마모토에 있는 역사연구회의 요청에 역사의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했다.
명성황후, 민비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서울에서 버스로 1시간. 홍릉이라는 묘의 입구에 도착했다.
“저의 할머님, 명성황후 시해를 했던 낭인들의 후손들이 여기와서 백배 사죄를 한다고 하길래. 민간차원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민간차원에서 하는 건 얼마든지 황실의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반길 수 있는 일인데, 그 뼈저림, 역사는 우리 황실에서는 잊을 수 없는 겁니다. 그건 분명히 밝혀둡니다.”
자손인 가와노씨가 방문한 것은 한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가와노씨는 사전에 참배 허가를 받아다.
이것이 홍능이라는 명성황후 민비의 묘.
묘를 관리하는 측으로부터 한국의 예의에 따라 지면에 무릎을 꿇고 3회 절을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조부를 대신해서 사죄합니다.”
“앞으로 일본도 한국과 사이좋게 지냅시다. 그런 기분으로 참배했습니다.”
“이웃이니까 사이좋게 지내는게 당연하지요. 후유노 소나타(겨울연가)라든가, 한류라든가.. 저희들의 마음을 초월하는 듯한 친근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가와노씨은 이날 하나 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80년전에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민비의 향낭을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향낭은 언젠가 잃어버리고 말아서 가와노씨는 이날을 위해서 도감 등의 자료를 조사해서 똑같은 것을 만들었다.
가와노씨.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십자가를 드디어 내릴 수 있었다.
“흥분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말이죠.. 이것으로 저는 죽어도 좋아요.”
그 후에도 가와노씨는 참배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전해졌는지, 명성황후의 묘를 지키고 제례를 담당하는 조선왕조의 자손들이 일본으로 향했다.
일행은 구마모토에 도착.
가와노씨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가 온 이유는 지금 사죄를 받고, 사죄를 하고, 그런거보다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과거에 있던 역사를 다시 가르키고 다시 깨우치고 해서 양국간의 국민감정을 해소하는 게 저거(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문제로 하나하나 씨를 뿌려 나가기 위해서 온 것이죠.”
“저는 오히려… 나쁜 짓을 한 조부였지만, 한국은 좋아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비 암살로부터 114년.
지금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열리려고 하고 있다.
(메인 앵커 후루타치)
“잇시키씨, 역시 복잡한 생각이 서로 있어도 이겨내려는 첫걸음이라는 기분으로 걸음을 내디딘 것이 아닌가 하고 저는 봤습니다.”
(코맨테이터 잇시키)
“그렇죠.. 일본인으로서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알아두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원래 일본의 역사 교육이란 것이 메이지 이후의 근대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얘기를 자주 하는데요, 정말은 이 근대야말로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메인 앵커 후루타치)
“국가가 강한 국가가 되려고 타국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쟁을 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역시 한국 사람들로부터 보면 이런 오래된 원한은 갑자기 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일본도 인정하고 이렇게 해서 민간 레벨에서 움직여서 우선 서로 손을 잡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맨테이터 잇시키)
“그렇죠. 정말 전진해 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일개 공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아직도 일본은 사건을 은폐, 축소해버리고 있네요.결국 개인적 사적인 문제처럼 교묘하게 처리하고 있네요. 우리같으면 당시 천황이나 정부차원의 도발로서 반드시 그 진상을 철저히 밝혀야 한일관계도 개선될 것이라는 정도의 결론을 내렸을텐데 참으로 일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기들 책임을 회피하는 뻔뻔함은 그대로이군요...
이런 치욕을 당하는게 이씨왕족들의 무능과 일부양반들의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한 답답한 안목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