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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보는 놈을 봐라(초롱 刊)
이 책은 서울대학교교수불자회인 불이회회장을 맡고 있는 전재근교수가 오랫동안 겸우스님의 법문을 듣고 기록한 것을
책으로 펴낸 것이라고 합니다. 책은 경전해석에 많은 내용이 오류가 있다고 비판을 하고 있으며 많은 선사들이나 스님들
께서 펴는 법문도 비판하는 내용이 상당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비판하는 내용이 너무 주관적이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만하다고 생각되어 오류를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안타까운 것은 책을 펴내신 분이 서울대학교 교수불자회 회장을 맡고
계신 분인데도 정법을 제대로 모르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아래 글에서 검은 색으로 적혀있는 원래 이 글은 네이버의 한 블로그에 올려져 있던 내용입니다. 간단히 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스님의 책에 내용을 읽고서 공감을 표하면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댓글을 달아 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워서
여기 다시 제가 붉은 색 글로서 제 짧은 견해지만 표시하여 올립니다. 혹시 책의 내용에 대하여 미처 제가 지적하지 못한
오류나 제가 적은 붉은 글에 대한 오류가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은 위험한 말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이것은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머무르는 마음: 즉 머문바 없는데서 생각을 낸다는 이 말은 금강경에 나오는 것으로 육조스님이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 겸우스님 역시 이글을 애용하시며 우리의 마음이 바로 여기에 주할 곳을 바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물질이나 사람이나 놓여지고 머물 것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일으키는 생각도 생겨나면 어딘가에 머물게 된다. 생각이 돈, 아니면 명예에 머물수 있다. 그러면 반야의 지혜를 갖춘 보살은 어떤 곳에 머물러야 하는가? 마음의 도달하는 경계인 견처에 머물 것이냐, 아니면 일체의 견처를 여의고 견처를 바라보면 주인의 견처(주시자)에 머물 것이냐? 견처로는 온갖 물질적인 것, 온갖 생각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런 경계들은 변화무쌍하다(心隋萬境). 그러나 이것을 바라보는 견처는 하나이며 바뀌지 않는다.
불이 : 반야의 지혜라 함은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로 나뉘어 지지 않음을 반야라 합니다. 그러니 가생이를 여의고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면 반야의 지혜가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견해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전부 진실하여 참이다. 그러니 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견처에 머물러야 하고 이 자리는 하나밖에 없다고 함은 안과 바깥이 있어 양변으로 사물을 보고 있으니 망상을 손에 쥐고 깨달음을 구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는 것이 불성이다. 그러면 이 불성은 어떤 곳이냐? 불성은 텅비어 있어 무엇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왜 아무 것도 없냐고 하면 무엇이 있다라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일념불기(一念不起)이기 때문이다. 무시이래로 본래 그런 것(본래무일물)이다. 아무 것도 없으니 굳이 있다면 공(공)밖에 없다.
불이 : 불성을 공이라고 하면 無記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이라고 해도 틀리고 아니라고 해도 틀립니다. 비었다고 해도 텅빈 것도 아니니 불성을 뜰앞의 잣나무에서 보게 됩니다.
스님은 자신의 주소를 겁외국 무위도 허공군 무착면 무주리라고 일러준바 있다. 육조스님이 無住로 본을 삼으라는 말씀이 그렇다. 흔히 애용하는 휘호인 隋處作主 立處皆眞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불자가 마음공부를 하면 가(변)을 여의고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본심자리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 본심자리는 눈감고 생각이 닿는 곳마다 견처에 머물러 살아서야 되겠는가라는 것이다.
불이: 수처작주 입처개진 (隋處作主 立處皆眞) 이 말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발을 딛는 곳마다 모두 진실하다“라는 뜻입니다. 바깥 경계에도 끄달리지 않고 안으로 마음이라는 한 물건에도 머물지 않아야 이 말의 뜻을 알수 있으며, 이 한 점의 일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말해도 어긋나게 됩니다. 본심자리가 따로 있고 가생이(邊)이가 따로 있다함은 불법을 알지 못한다고 자랑하는 격입니다.
야부선사의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크게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도 산과 물을 바라보는 견처를 놔두고 여의어야할 경계인 견처에 마음이 가게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말은 큰 원력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지옥에도 나타나 중생심을 물들이지 않고 흔들림없는 자비심으로 주인이 되어 중생을 구제할 경우에는 옳다. 그러나 업에 끌려다니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아주 위험하다.
불이 : 야부선사의 글은 산과 나, 물과 나라는 생각이 따로 나뉘어져 쓴 글이 아닙니다. 이미 시작에서 보는 놈과 보는 대상으로 나누니 그 끝은 태평양만큼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毫釐有差 天地懸隔) 이 한 점의 일을 모른다면 깨닫기 전의 일이니 경전이나 조사의 말을 이렇게 곡해해서 뭇 중생들을 오도하게 만든다면 뭇 중생들을 인도하여 함께 지옥으로 갈 노릇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보살에게는 천국도 지옥도 한 편의 영화속 세트장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도를 구하는 불자들이 이 업에서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쓴다. 수도의 목적이 무엇인가? 해탈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가? 무시겁으로 익힌 습(습)이 업(업)이 된 것이다. 사찰에서는 끊임없이 없이 염불을 하고 기둥이며 벽이며 글과 그림을 내걸고 있는 것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좋은 업에 젖어 들게 하자는 것이다.
불이 : 사찰의 벽과 기둥에 있는 주련은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업에 젖게 하자는 것이라고 했는데 불법은 선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업의 소멸과 해탈에 있습니다. 육조스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직지인심으로 경전의 한구절만 제대로 이해해도 육도윤회를 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처작주(수처작주)(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쥐구멍에 들어가 주인이 되면 쥐가 되어 살아야 하고 내가 뱀구멍에 들면 뱀으로 살아야 하고 시궁창에 들면 구더기로 살아야 하고 짐승에 들면 짐승으로 밖에 살수 없는데 사생육도를 윤회하겠다는 발원이 되니 아주 위험한 글귀입니다. 불교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종교인데 스스로 잘못된 업에 끌리거나 훈습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본심(본심)에서 먼 가지에 머물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것과 같으니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불이 : 육도윤회를 하는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깨닫지 못한 존재의 탐진치 때문입니다. 탐진치로 인하여 내생의 목적지와 등급이 정해집니다. 그러나 그러나 탐진치를 벗은 존재라면 정해진 목적지가 없으니 온 세상이 목적지 아닌 곳이 없습니다. 공과 색이 다 진실할 진데 그러니 발길 닫는 곳마다 참된다는 말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원력을 세워 중생구제라는 말도 할수 있습니다. 본심에 머물겠다고 해서도 안되고 바깥 경계에 머물러도 안됩니다. 양변을 여의어야 이 하나의 일을 마칠 수가 있습니다.
청정상(청정상)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계를 잘지키는 스님을 청정승이라고 한다. 겸우스님과 태백산 도솔암에서 잠시 같이 지냈다는 한 큰 스님은 겸우스님을 한국제일의 율사라고 할 정도로 계를 중시하셨다. 그런데 계를 강조하는 스님은 상자청정상 불자행도리(常自淸淨相 佛子行道理) 늘자신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불자가 행할 도리이다라고 하는 말이 어찌 틀렸을까라고 했을까?
우리는 자칫 근본행과 세행을 같이 보는 경우가 많으니 스님은 일념불기의 텅빈 마음을 주하여야 성불한다고 항시 말씀하셨다.
상자청정(常自淸淨) 늘 자신속에 깨끗이 닦아야 할 무엇인가를 갖고 살라는 말이니 근본자리에서 보면 틀렸다는 것이다. 아직도 마음속에 무엇인가 닦을 게 있다는 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본래 무일물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불이 : 깨닫기 전에는 탐진치로 인한 망상이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부단히 계를 지키고 下心을 하며 청정심을 유지하도록 애를 쓰는 것이 출가자이던 재가자이던 옳습니다. 특히 출가자는 세속을 떠난 목적이 해탈에 있으므로 한 소식을 얻기 전이라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함에도 현실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한 물건의 소식을 알게 되면 물론 보림이라는 기간이 필요하지만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성청정이 확인되고 망상이 저절로 쉬어지니 선사들이 하루중에 에 밥먹고 잠자는 일로만 육신을 번잡하게 한다고 하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화두타파
화두는 말보다 앞서 있는 것 또는 언어이전의 소식이란 뜻이다. 화두종류는 약 1,700종류가 있으며 공안(공안)이라고 한다. 공안이란 그렇게 따라하면 성불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두공부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고 있는 문답에 대해 의문을 일으켜 해답을 구하고자 참구하는 것으로 중국의 조사들이 만들어냈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수행법이 간화선이다. 간화선은 중국 임제종의 대혜스님이 발전시킨 것으로 조주스님의 無字話頭 狗子無佛性이 대표적이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을 찾아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 때 조주 스님은 없다라고 답하였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이렇게 의문을 일으켜 종국에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이 無字화두를 들고 수행하고 있다. 이 밖에도 유명한 것이 이뭣고(是心麽), 마른 똥막대기, 뜰앞에 잣나무등이 있다. 한국의 선은 간화선을 받아들인 고려의 지눌대사에게서 그 원류를 찾을 수가 있다. 그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통해 간화선사상을 유포하였고 그의 제자 혜심-지엄-휴정-경허-만공으로 이어졌다.
큰 스님들이 화두를 타파해주면 지옥간다며 입을 다물고 있는데 그것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본심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화두를 준 스님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상식을 뛰어넘는 그런 말로 중생을 구제하고 깨닫게 하지 않았어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했습니다. 왜 수많은 경전이 생겨났겠습니까? 육조스님도 수많은 제자들을 깨닫게 했지만 모두 혜능 스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깨치지 않았어요!
불이 : 먼저 화두를 주는 분이 그 화두 자체도 모르고 그 화두의 목적과 의의도 모르면서도 준다는 것은 같이 흙탕물에 빠지는 셈이 됩니다. 또한 화두를 타파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설명과 이해가 아니라 크게 의심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까막눈입니다. 경전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불성의 보았기에 체와 용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불성은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말이 끊어진 자리라 해서 언어도단이라고도 합니다. 육조스님도 본래무일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 불성은 온 세상에 충만해 있는 것이라 부처님께서도 꿈틀거리는 미물 중생 속에서도 불성이 있다고 했어요.그러할 진데 영리하기로 소문한 개에 불성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는 것,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불이 : 개의 불성은 분명히 조주스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인 즉은 조사의 서래의 까닭을 알아야 이해할수 있습니다.
화두는 자아를 찾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별의별 요상한 것들이 등장합니다. 부처님이 무엇이냐라고 하는데 “마른 똥 막대기”“뜰앞의 잣나무”“마세근”“이빨에 난 털”참으로 해괴합니다. 이런 말도 있어요 어떤 사람이 천 길 낭떠러지 높은 나뭇가지를 입으로 물고 매달려 있는데 부처가 무엇이요? 한번 일러보시오.“ 그런데 대답을 하자니 입을 벌려야 할 것 아닙니까? 입을 벌리면 떨어져 죽을 판이라, 어쩌면 좋으냐?
불이 : 하나같이 명품화두들이 이 스님덕분에 안타깝게도 요상한 것이 되고 맙니다.
겸우스님은 계속합니다. “ 또 이런 것도 있어요. 새알을 주둥이가 작은 작은 병에 넣었어요. 이것이 부화해서 새가 되어 몸집이 커졌는데 병도 깨지말고 꺼내어 보라.” 의문이 안생길수가 없지요. 그러나 이런 것 생각하느라 언제 한 물건도 없는 겁외소식을 알겠습니까? 방거사가 마조스님을 찾아가서 “만법과 짝하지 앟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때 마조스님은 네가 저 서강수의 물을 다 마시고 오면 일러주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묻는 방거사, 답하는 마조, 서강수 이 셋을 몽땅 여윈 놈, 자성을 보야야 하는 것입니다.
불이 : 모든 화두가 겁외소식에 바로 들어가는 티켓인데 눈이 어두워 이를 못보고 있습니다. 또한 방거사가 마조스님의 서강수화두 덕분에 단박에 깨친 것을 이 스님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無“ ”이뭣고“ ”마른 똥막대기“” 뜰앞에 잣나무“ 이런 것 생각하느라 언제 본심자리를 보겠어요. 화두와 화두를 준자, 화두를 받은 자, 이 셋을 몽땅 여윈 그 놈을 보아야 합니다.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의 자리(一念不起處)를 보아야 합니다.
불이 : 그 본래자리로 바로 들어가는 비행기 티켓을 버리고 걸어가겠다고 하는 격입니다. 이를 일러 일구에 깨달은 이는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하고 이구에 깨달은 이는 자기의 한 목숨을 구제할 수 있으나 삼구에 이해한 이는 지옥행을 면치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좌들은 하나같이 화두병에 걸려 화두없이는 공부가 안되는 줄 알아요. 나를 찾아와 자꾸 화두를 하나 내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살아 있는 화두를 몇 개 준적이 있어요. 내가 준 화두는 셋입니다.
*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 무몽무상시 주인공심하처(無夢無想時 主人公尋何處)
큰 스님들이 준 화두를 풀이해주면 지옥간다며 타파해주지 않는데 나는 그 바닥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불이 : 남이 설명해준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것을 일러 삼구라고 합니다. 삼구에 이해하면 지옥행이다라고 분명히 많은 선사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껏 이 겸우스님이 보여주신 살림살이는 알음알이도 옳은 것이 아니라 그룻된 것 밖에 없는데 누구를 지옥에 빠뜨리려고 화두를 풀이를 하시려 걸까요?
*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이것은 본심자리를 찾아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웬만큼 공부하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하나는 다시 만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법이 한 생각없는 무념의 일념불기처로 돌아가고 그 곳에서 한 생각 일으키면 만상이 나타납니다.
불이 :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일도 웬만큼 공부해서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알음알이를 버리면 단숨에 갈수도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가장 큰 병통은 일단 머리로 이해하려고 덤비는 경우입니다. 그러니 상기병이란 화두병도 생기지요. 게다가 이 스님은 아무리 살펴봐도 공과 본래면목을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누구나 태어나기전에 부모님이 계셨고 부모님전에도 조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말은 자신의 근본을 찾아가 보라는 것이니 공부할 만한 것입니다. 찾아 올라가다보면 겁외(겁외)로 이를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자신은 본래 없던 곳에서 본심자리가 자기의 근본임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과거 일곱부처님이전의 소식과 같은 말입니다. 겁외소식을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 : 무슨 전생퇴행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최면술을 연구하는 이도 아닌 즉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금강경에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고 했는데 무슨 겁외가 있습니까? 여기에는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니 바로 지금 눈앞에 현현한 이 일 한 가지 일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겁외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 무몽무상시 주인공심하처(無夢無想時 主人公尋何處)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의 주인공인 나는 어느 곳에 있나? “생각해봐라“라는 것입니다. 꿈도 아무 생각도 없는 무념의 자리가 일념 불기처(일념불기처)입니다.
불이 : 꿈도 아무 생각도 없는 무념의 자리를 일컬어 무기공에 빠진다라고 합니다. 꿈을 꾸고 있어도 꿈을 꾸지 않아도 이 하나의 일은 변함이 없고 망상이 즉 깨달음이라 둘로 나뉠 수가 없습니다.
이 세가지 화두는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타파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화두를 참구하려면 우선 자기를 버리는 공부부터 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는 공부는 열심히 염불기도를 하거나 금강경이나 반야심경과 같은 경전의 참 뜻을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 의정만 기르면 상기되어 공부가 안됩니다.
불이: 자기를 버린다고 화두를 순일해지지가 않습니다. 화두가 순일해져야 나라는 한 생각도 잊습니다. 그리하여 흰색과 검은 색이 다르지 않고 옳음과 그름 또한 다르지 않은 까닭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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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처작주 입처개진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서나 전력투구 를 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디서나 참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겸우스님의 법문을 교수님이 잘몾전달한 책이거나 스님생각을 적은독후감 같습니다
위의 블로그 내용을 읽고 책도 읽어 보았습니다. 원래 책내용에는 현재 불교의 문제점을 꼬집는다고 하여 이 보다 더욱 심한 내용이 있다고 전재근교수가 서두에 밝히더군요. 이를 밝히면 법정소송사태까지 일어날까봐 염려하여 내용을 많이 완화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위에는 빠졌지만 책에는 몇가지 스님의 주관적인 해석과 오류가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책들이 돌아다니면서 강정진 거사의 대자유인 못지않게 많은 불자들을 오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에
불이님의 견처가:[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일이 종착역입니다]라고 하셨는데, 전혀 가당치 않습니다. 어째서? 그 하나조차도 없는데 무슨 종착역이라 하시나요
돌아갈 것이 있으면 죄가 수미산같이 많지요.
혹시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이 하나의 일에 참여해보셨는지요? 혹시 만법귀일 체험에 참여해보셨다면 견처를 여쭤봐도 될런지요?
돌아갈 곳 없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진리님이 돌아갈 것이라 하셨는데 처소를 물었으니 돌아갈 곳......ㅋ 그리고 그 하나라는 것은 일원상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그냥 알음알이로 물은 것이 아닙니다. 혹 가진 살림살이가 더 없습니까? 질문을 오해하셨나보네요...만법귀일의 체험을 하셨다면 그 견처를 여쭌 것입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달리네
격외선지로는 어울리지만 만법귀일은 아닌 듯 합니다. 네...뜰앞에 잣나무에 대한 견처 여쭤봐도 될런지요?
입으로 장미꽃 피워내면 이쁘겠죠
만법귀일은 모든게 나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며 일귀하처는 처는 묘용이 맞는데 따로 생각하신거 있으시면 해주실수 있나요, 저 격외구는 일귀하처에 대한 제 소견인데요
뜰앞의 잣나무 ........암뜻도 없어요.......
^_^ 감사합니다. 제가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남풍이 부니 처마아래 풍경소리가 그윽하다.
법의 옳고 그름은 말에 있지 않습니다. 이 일을 안다면 어떻게 말해도 어긋남이 없고 모른다면 어떻게 말해도 어긋납니다. 좋은 문답 감사드립니다.
푸하하하~~~,
사자교인(( 獅子咬人)은 전무(全無)하고
수처한노(隨處韓獹)에 입처개오(立處皆誤)로다.
모두 귀가수(歸家修) "ㄹ"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ㄷ"에 加點 하리라.
-----(~*^)---()--
^_^ 감사합니다. 한문실력이 얕다보니 모처럼 실력을 뽐내셨는데 알아주질 못해서 미안합니다.
조주스님의 狗子無佛性 (개에게 불성이 있냐 없냐를 여쭸는데 스님왈 "無"라고 하셨지요?)
이 화두의 견처를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심심한데 제가 대신 격외구로 일러볼께요......불이에게 불성이 없다.......와 같은 도리입니다.....제가 어제바빠서 미처 불이님께 청해보지 못했는데요.......님의 즉흥적 3구오도게송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한 물건도 얻은게 없으니 읊을 것도 없습니다. 제가 한 마디 물어보겠습니다. 청봉스님의 "짚신은 있는데 사람은 어디갔나" 저서 중에서
한 일화입니다. 어떤 거사님이 한 보살님에게 지금 드시는 현미녹차맛이 어떻습니까하고 물어봤습니다. 보살님왈 "앞산에 연기나는 맛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혹 그 견처를 올려주신다면 저도 화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청봉스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귀로 맛보는 맛입니다...........["한물건도 얻은게 없으니 읊을거도 없다"].이미 구족되어있는데도 얻은게 없다라뇨...........이 구절을 대신하여 님의 게송으로 간주하여 받아들이겠습니다. ...얻은게 없다?라......따로 얻을것조차도 없다고 해야 할것이고 읊을것이 없다?.......묻는곳에 충실하지 않는군요......이하 화답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은 공부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