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룡사(靑龍寺 : 종로구 숭인동 17번지)
이 절은 보문사보다 늦게 세워졌다 하여 새절 승방이라고도 부른다. 전일에는 새절 승방은 보문동의 탑골 승방,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곳 니사(尼舍) 중의 하나였다.
이 절 옆에는 18세의 단종비 송씨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귀양을 떠나는 단종과 애?는 이별을 하고 세 시녀와 함께 여생을 보낸 작은 암자인 정업원(淨業院)이 있었다. 새절 승방은 고려 태조 5년(922)에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되면서 낙산이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함으로 이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하여 청룡사라 하였다. 그 후 혜원(慧圓)이 주지가 되어 후3국의 통일을 위한 기도를 올렸고, 고려 초 정종 2년(1026) 만선이 퇴락해진 이절을 처음 중창하였으며, 이어서 의종 12년(1158), 충렬왕 25년(12990에도 중건하였다. 조선 건국 후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고려왕실의 멸망을 슬퍼하면서 스님이 되어 이 절에 주석(住錫)하였다. 조선 초 태종 5년(1405)에 무학대사가 상왕 태조 이성계를 함흥에서 서울로 모셔오자 태종이 그 감사의 표시로 무학대사가 머물고 있던 이 절을 중창하도록 하였다. 연산군 때는 이 절이 폐사되었으나 중종 7년(1512)에 법공(法空)스님이 중창하였고, 조선 후기 인조 2년(1624)에는 예순스님이 인목대비의 명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었으며 절 전체를 새롭게 중창하였다. 그 뒤 영조 47년(1771)에 왕이 이 절에 둘러서 「정업원 구기비」를 세우고, 절을 중창하게 한 뒤 비명에 죽은 사도세장의 명복을 빌게 하엿다. 순조 13년(1813)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곧 중창하고, 10년 뒤인 순조 23년(1823)에 청룡사로 이름을 고쳤다.
▶▶청룡사 중창사적비기◀◀
삼각산 한 줄기 맥락이 십 여리 떨어져 내려오다가 우람하게 일어선 곳이 곧 서울의 외청룡(外靑龍)이다. 삼각산 중턱 기슭에 하나의 절이 있는데, 그곳이 청룡사이다. 산자락이 두루 감싸안고서 나름대로 하나의 형국을 이루고 있으니, 서울에서 가장 으뜸가는 곳이라 하겠다. 이 절의 개창(開倉)은 신라 경명왕 6년(992)에 있었으며, 고려 태조가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유언으로 서울 청룡 기슭에 절을 세우고, 혜원(慧圓)비구니를 주지로 임명하여 조석으로 종을 울려 삼국통일을 축원하게 하였다. “이는 쇠는 나무를 이긴다(金克木)”라는 원리를 취한 것이며, 또한 비구니 사원으로서는 가장 으뜸가는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세월과 풍운무상(風雲無常)의 변태로써 정종 2년(947)에 만선(萬善)비구니가 퇴락한 사원을 중창하였고, 의종 12년(1158) 회정(懷正)선사가 국태민안을 위해서 어명을 받들어 중창하였고, 충렬왕25년(1299)에 지환(知幻)비구니가 몽고의 병란으로 인한 것을 중창하였다. 이조에 들어서는 태조가 즉위하자 고려말 공민왕의 혜비(惠妃)가 나라를 잃고서 승려가 되어 이 절에 주석하였고, 또한 태조 즉위 7년에 세자 책봉에 불평을 가져 왕자의 난이 크게 일어나자, 계비 강씨(繼妃 康氏)가 낳은 경순(慶順)공주는 부왕의 지시에 따라서 이 사원에 들어와 삭발하였고, 태종 5년(1405)에 무학대사의 주청에 의해서 어명으로 중창하였고, 세조 2년(1457)에 단종이 유배를 가자 왕비 송씨는 후궁 2인, 시봉 3인과 함께 이 절에서 삭발한 채 백 년의 한을 품고일생을 보냈으며, 중종 7년(1512)에는 연산군의 폐사(廢寺)와 훼불(毁佛)로써 법공(法空)비구니가 중창하였다. 인조 2년(1624)에는 예순(禮順)비구니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명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명복을 빌고 또 다시 이어 중창을 하였으며, 영조 47년(1771)에 이르러서는 영조가 단종과 정순왕후를 위하여 옛 사원터에 새롭게 중창하도록 명하였고, 또한 왕비가 일생 거처했던 곳은 일반 사원의 명칭으로 부를 수 없다고 하여 이에 청룡사를 정업원(淨業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는 옛날 궁중의 비빈(妃嬪)과 궁녀들이 출입하였던 내불당(內佛堂)의 명칭을 취한 것이다. 또한 정업원이라는 비문을 쓰고, 옛터전에 “앞 산의 봉우리 뒤 언덕 바위여! 천만 년이나 영원하리라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峰後巖 於千萬年)”이라는 현판 액자를 하사 아였다.. 이는 모두 어필(御筆)로 기록하여 비석과 누각을 세운 것인데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국가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순조 13년(1813)에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사원이 전소되어 그 이듬해에 묘담(妙湛), 수인(守仁) 두 비구니가 협력하여 중창하였고, 23년(1823)에는 순조왕비에게 때마침 생각치 않은 병환이 있어 그의 생부인 김조순(金祖淳)이 정업원을 찾아가 기도하자 병환이 곧 회복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김조순이 주청하여 다시 어명으로 정업원을 청룡사로 환원하여 부르게 되었다. 고종 광무 6년(1902) 정기(正基), 창수(昌洙) 두 비구니가 함께 발심하여 창수의 회갑기념으로 이를 중수하였고, 일제치하 무오년(1918)에는 상근비구니가 사재를 내어 요사채 1동을 창건 하였고, 임신년 회갑을 맞이하여 전 사원의 건물을 하나같이 세롭게 중수하였다, 을유해방 이후 경자년(1960)에는 현주지 윤호(輪浩)비구니가 옛 터전을 확장하여 십왕전(十王殿), 심검당(尋劒堂), 우화루(雨花樓), 극락전(極樂殿), 등을 하나같이 새롭게 중창하였다. 창건시의 절터(寺址)는 모두 299평에 지나지 않았는데, 상근비구니가 주지를 할 때 대지 180평을 매입하여 현재의 절터는299평, 대지 453평, 임야 120평에 이르고 있다.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아버지가 일을 일으켜 세우면 자식이 이를 전승한다”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사원을 처음 개창한 이후로 고려 조선 두 조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창과 중수를 거듭한 것은 모두 11회이며, 몇 년이 안되는 사이에 단청과 새로운 누각과 법당이 위엄스럽게 높고 빼어난 것은 하늘에 힘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 주석한 스님들이 이에 선정(禪定)으로써 뼈를 삼고, 경전을 보는 것으로써 살을 삼고, 죽과 밥으로써 가죽을 삼고, 행실과 지혜가 구족한 것으로써 안목과 수족을 삼는다면 한 사찰의 안에 의젓한 법왕의 몸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법왕의 몸이란 텅 비어 있고 오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신령하고 밝아서 일만 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도 변하지 않으며 고금이 다하도록 하나인즉 어찌 가을 털끝을 크다 하지 않을 것이며, 태산을 작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일찍 요절한 사람을 장수를 누렸다 하지 않을 수 있으며,장수한 팽조(彭祖)를 요절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후세의 사람들이 오늘을 보는 것은 마치 오늘날의 사람들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며, 후대의 사람이 후대를 보는 것 또한 후대의 사람들이 오늘날을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렇다면 도선국사의 개창(開倉)과 윤호주지의 중창은 같은 일일까, 다른 일일까? 만일 같다고 한다면 소뿔은 있어도 쓸모가 없는 것이며, 다르다고 말한다면 토끼의 뿔은 없어도 쓸모가 없는 것이니다. 말해 보아라, 필경 어떤한 것인가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도안(道眼)이 열리지 않으면 한 방울의 물도 녹이기 어렵다고.” 말하였다. 이 사원을 찾는 이들이 항상 자신의 몸이란 한낱 물거품과 같고 사람의 운명이란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등불과 같이 위태로움을 생각하고, 또한 법성은 비어 있으며 지혜의 태양은 길이 밝음을 항상 생각하여, 이와 같이 부지런히 자신을 채찍질하고, 이와 같이 깨우쳐 들어간다면 중대한 네 가지 은혜를 일시에 모두 보답할 뿐 아니라, 또한 오늘날 외호의 공덕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불기 2999년(1972) 임자 4월 초파일 오대산인 탄허 택성은 기록하다.
◈ 정업원 구기(淨業院 舊基 : 종로구 숭인동 17번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
청룡사 구내 남서쪽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 정업원구기(淨業院 舊基)가 있다. 현재 사방 2.4m 정도되는 1칸 집의 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는 영조대왕이 친히 쓴 정업원구기비가 있다. 애석(靄石)으로 된 비신 전면에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씌어있고, 후면에는 단종비 송씨가 세상을 떠난 1521년 이후로부터 251년이 되는 1771년에 왕이 친히 글씨를 썼다는 내용의 33자가 새겨져 있다.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창덕궁에 갔다가 이 곳 연미정동(燕尾汀洞)의 정업원으로 가서 단종비 송씨의 옛일을 물어보았다. 이 때 전 참판(參判) 정운유(鄭運維)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이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하였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하였다. 동대문 밖에서 단종과 눈물의 이별을 한 송씨는 영월쪽을 바라볼 수 있는 청룡사 부근에서 머리를 깎고 희안(希安) ? 지심(智心) ? 계지(戒智) 세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 암자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지냈다. 조정에서는 근방에 집을 지어주고 이 곳을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나 송씨는 끝내 그 집에 들지 않고 정업원에 머물었다. 송씨는 조석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평안을 빌었으나 헤어진지 4개월 뒤인 세조 3년(1457) 10월 4일, 영월에서 노산군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자 이후부터는 동망봉에 올라 단종의 고혼(孤魂)이 헤매는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다.
◈ 동망봉(東望峰:종로구 숭인동 58번지, 성북구 보문동 6가 209번지)
청룡사 동쪽 앞에 우뚝 솟은 바위 산을 동망봉이라 한다. 청룡사에서 낙산으로 올라가다가 능선에서 남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산 정상에 이르는데 이 곳에는 동망산신각(東望山神閣), 숭인공원(일명 동망산공원)이 있다. 숭인동과 보문동의 경계가 되는 동망산 서쪽 부분은 일제 때부터 광복 후까지 채석장으로 사용하여 산의 반쪽은 사라져 절벽이 되었다. 단종비 송씨가 근처의 정업원에서 시녀와 같이 지내면서 매일 조석으로 이 산에 올라 동쪽 영원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冥福)을 빌었기 때문에 동망봉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영조 47년(1711)에 청룡사에 들렀던 왕이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으나 일제 때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가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사라졌다.
◈여인시장터(女人市場址)
조선초 수양대군이 그의 조카 단종을 내?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실권을 장악한 세조가 왕위에 오르고 어린 단종은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리고 정순왕후도 단종의 귀양과 더불어 송씨부인으로 신분이 격하된다.
단종과 청룡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정순왕후는 영도교 다리에서단종과 이별을 하며 단종은 영월로 떠나고 정순왕후는 지금의 서울 숭인동 정업원 이라는 작은 초가를 짓고 살았다. 그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거처를 따로 마련해 주었지만 송씨부인은 끝내 마다하고 초가에서 살았다.
송씨부인은 세명의 시녀와 함께 댕기,옷고름 등을 만들어 팔고, 집 근처에서 먹을 것을 구해 끼니를 연명했지만 시녀와 더불어 생활하기에는 어려웠다. 이런 송씨부인의 소식을 들은 동네 여인들은 그녀를 위해 반찬거리를 날라다 주었다. 하지만 그녀와 가깝게 지내면 조정에서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게 되므로 동네에서는 쉽게 송씨부인에게 먹거리를 제공해 줄수가 없었다.
동네 여인들은 송씨부인을 돕기 위해 절묘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한꺼번에 많은 여인이 모이는 곳 바로 여인들만 드나들수 있는 여인시장을 여는 것이었다.여인들의 기발한 생각이었다.얼마뒤 동네 여인들은 정업원 근처에 모여 채소와 곡식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여인시장은 남자들은 들어올수 없는 곳이라고 못을 박았다.이렇게 여인시장으로 관원의 눈을 피해 송씨부인에게 갖은 음식을 가저다 주었다.송씨부인은 동네 여인들의 지혜와 도움 덕분에 82세까지 단종의 몫 까지 함께 장수하다가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영도교(永渡橋) -위치 : 영미교길 -제원 : 폭 26.2m, 연장 30.1m -특징 :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주변 : 동묘공원, 종로 문화의 집, 숭인공원, 벼룩시장, 종로구민회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지는 전설에서 유래된 교량명 이다.
숭인동 234번지와 상왕십리 748번지 사이 현 동묘(東廟, 숭인동 22번지)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다리이다. 동대문 옆에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어서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이 다리의 교통량은 몹시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은 절의 중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전관교)와 함께 이 곳에 돌다리로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규모가 크고 특징이 있었으리라 보인다.
한편 이 다리에 얽힌 전설로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세조 4년, 1458) 그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이 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을 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 전해진다. 그 후 정순왕후 송씨는 지금의 청룡사 새절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현 숭인동 17번지)에 들어가서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불도(佛道)에 바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도교의 돌다리는 고종초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헐어다가 석재로 썼기 때문에 이 때 없어졌다 한다. 그 뒤 나무다리가 놓여졌으나 가끔 떠내려 갔는지 그 옆에는 ‘띠엄돌’이라고 해서 개천 바닥에 돌을 띠엄띠엄 놓아서 이것을 밟고 건너게 한 때도 있었다.
▶청계천 영도교 단종 부부 생이별 상징으로 부활 등록일 : 2010-03-17 13:56:23 | 연합뉴스
유배지 영월 동강 하천석 설치…`500년만의 해우' 상징물도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기자 =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비(妃) 정순왕후의 슬픈 이별 이야기를 간직한 서울 청계 7가와 청계 8가 사이의 영도교(永渡橋)에 전설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되고 문화행사가 열린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가던 날 정순왕후 송씨가 따라와 이생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고한 곳이 바로 영도교이다.
당시 단종의 나이는 겨우 열여섯이었고 정순왕후는 열일곱이었다.원래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는 이름의 이 다리는 단종 부부의 생이별 이후 영영 건너가 이별한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7일 서울시설공단에 따르면 영도교 아래에는 영월 동강에서 가져온 하천석이 놓인다.단종과 정순왕후의 슬픈 사랑이 500여년만에 다시 이뤄지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다.
공단과 영월군은 18일 영도교에 얽힌 사연을 알리고자 다양한 협력사업을 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한다.이에 따라 영월군은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장릉(단종의 능)의 홍보를 위해 영도교 주변에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연이 담긴 조형물(가칭 `500년만의 해우')을 설치하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관할 예정이다.
영도교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궁궐의 석재로 쓰고자 부숴 현재는 이름과 위치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단종 유배 당시의 다리 모습은 없다.이후 홍수로 인한 유실과 복원을 반복하다 청계천 복개로 완전히 사라졌으나, 2005년 말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됐다.pan@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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