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장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속임수와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말이란 사람에게도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도 우리가 한 말 지켜야하고, 말의 영향력하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의 영향력은 우리에게 매우 크다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배들을 보라. 그렇게 크고, 거친 바람에 밀려 가도
지극히 작은 키로 키잡이가 원하는 곳 어디로든지 돌려지느니라.
야고보서 3장 4절
우리에게 말이란 배의 키와 같아서 말에 의하여 우리의 모든 것이 이끌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가장 먼저 실행으로 나타나는 것은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생각없이 뱉는 말이고 아무도 듣지 않는 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고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내 자신이 먼저 듣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소리지르라 명하는 날까지
너희는 소리지르지 말며 너희 음성으로 소리도 내지 말며 너희 입에서
어떤 말도 내지 말고 있다가 그후에 너희는 소리를 지를지니라." 하더라.
여호수아 6장 10절
보라, 너는 벙어리가 되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될 그 날까지는 말을 할수도 없게 되리니
이는 네가 그때가 되면 이런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 말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누가복음 1장 20절
여호수아 6장의 말씀은 여리고성을 돌게될 백성들에게 여호수아가 음성을 내지 못하게 통제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장의 말씀은 사카랴가 아들을 갖게 될 것임을 천사로부터 듣지만 그는 벙어리가 되는 장면입니다.
말을 하는 것을 금지시킴과 벙어리로 만드심은 말로 실족하지 않도록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돌아 성을 무너뜨리는 백성들이 말로 실족하여 망할수 있었기에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사카랴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음을 말로 드러내 실수 할까봐 벙어리로 만드신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백성과 사카랴와 달리 우리는 말을 할수 있게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로 실족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말은 우리의 실행의 첫단계이자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함이 있으므로 말을 조심하고 필요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말로 실족하지 않게하는 방법으로 아예 말을 못하게 하는 방법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갓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이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위 말씀에서 갓난 아기들이란 말씀을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경험과 생각으로 인하여 우리가 접하는 일들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도움이 아니라 독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불쾌한 이전의 경험으로 인하여 어떤 상황을 이유없이 싫어하는 현상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하여 우리가 말씀도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토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그러한 경우가 심하면 이단으로도 나아가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믿음이 자라지 않는 정체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위 말씀에서 지적한대로 우리가 우리의 자신의 생각과 선입견을 버리고 말씀을 사모하면 그 말씀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우리이 믿음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더라도 말씀앞에서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버리고 순수한 갓난아이처럼 나아간다면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잘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느니라.
초신자 시절이 없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초신자때 많은 은혜가 주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지켜보곤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초신자를 아끼시는 것도 있겠지만 초신자는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초신자처럼 내 자신은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바라보는
어린아이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는 정녕 버림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귀중한 산 돌이신 그분께 나아와서
너희도 산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지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영적인 제물들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시고 우리도 산 돌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멜키세덱 계열의 제사장이시고 우리도 영적인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제시된 롤 모델로 구원의 길의 안내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며, 우리 모두가 영적인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인 제물은 곧 우리 자신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이뤄지려면 자신을 부인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곧 구약에서 희생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이 각이 떠져 피를 흘리고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사장이 따로 있었던 구약과 달리 이제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을 따라하는 제사장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으니 "보라, 내가 택한 귀중한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그가 귀중하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모퉁이의 머릿돌은 가장 드러나고 좋은 돌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이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자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또 실족하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으니, 곧 불순종함으로 말씀에 실족하는 자들에게니라. 그들은 또한 그렇게 되기로 정해졌느니라.
실족하는 자들은 곧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주권이 자신들의 주권과 충돌하게 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주이심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우리에게 영광이지만 불순종함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형국이 됩니다.
위 말씀에 그렇게 되기로 정해졌다라는 의미로 예정론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런뜻이 아니라 불순종함은 곧 말씀으로 실족하게 됨이 정해져 있다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음주운전을 자주하는 사람은 교통사고를 내고 감옥에 가는 것이 정해진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으로 인하여 실족하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자비를 받지 못했으나 이제는 자비를 받았느니라.
베드로전서 2장 1절 ~ 10절
위 말씀의 대상은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너입니다. 유대인들이나 다른 사람 모든 민족을 포함한 대상이지만 결국은
위 말씀을 보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한국교회에 팽배해 있는 목사가 대신 무엇인가를 해주는 사람으로 오해하지말고 각자가 말씀앞에서 같은 사람들로써 각자의 분량에 따른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내가 받았는데 목사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목사의 믿음 대리주의로 인하여 연약하고 어린 성도들을 양산되어 뱀같은 이단들이 창궐하는 환경이 만들어져 세상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가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잊지말고 영적인 제물인 우리의 순종을 하나님앞에 드리는 제사장의 직분을 잘 수행하여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단들은 유치한 초등학문일뿐입니다.
믿음에는 대리기사같은 목사를 쓰면 안됩니다. 영적인 목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행위로 사람의 불완전성으로 그 어떤 누구라도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믿고 맡겨서는 안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흠없이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