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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금요일, - 사랑하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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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하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 번 배반한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는지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모르시고 우리 마음도 모르시기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께서 우리 사랑 고백을 듣고 싶으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자주 확인하고 싶고,
그 사랑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꼭 귀로 듣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 그런 뜻에서 질문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압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 능력과 한계까지 다 알고 계시기에
지금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 모든 질문은 당신을 위해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질문은 베드로를 위해서 던지시는 질문이고,
우리를 위해 오늘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첫째로 이 질문은 우리에게 사랑 성찰을 하게 하심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나의 사랑을 성찰해야 합니다.
사랑 성찰이란 어찌 보면 사랑 점검인데 이 점검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어느새 실종되거나 방향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이 실종되고 없는 것은 아닌지.
사랑하더라도 내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진실하고 순수한지 성찰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질문은 사랑 고백 기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재(再)고백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 고백을 듣기 원하심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의 사랑 고백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사랑을 원하지 않고 사랑 고백도 듣기 싫어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내가 사랑한다고 쫓아다니고 계속 사랑 고백을 하면
그에게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 고백은 스토커의 짓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더욱이 부족한 우리 사랑을,
수없이 배반한 우리 사랑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사랑하고 다시 고백할 기회를 주십니다.
셋째로 이 질문은 사랑 다지기입니다.
더 사랑해야지,
다시 사랑해야지 거듭 마음을 다지게 하는 것이고,
사랑의 의지를 갱신하고 거듭 쇄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질문을 왜 또 하시냐고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 추궁이라면 짜증 나고 짜증 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성찰, 사랑 고백, 사랑 다지기의 기회를 주심이라면
짜증 내서는 안 될 것이고 그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처럼 당신 양 떼를 우리에게 맡기실 때
그 양 떼를 우리도 잘 보살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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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스페인 바로셀로나에 까면 위대한 건축가의 작품을 보게 됩니다.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구엘 공원,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등등…. 맞습니다. 위대한 건축가라고 불리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입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건축에 온 힘을 쏟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우디는 하루의 건축 일을 마치면 오후 5~6시까지 긴 거리를 산책했습니다. 어느 날, 산책하던 중 전차와 부딪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이때의 나이 73세. 그런데 형색이 초라했던 그에게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꽤 긴 시간을 사고 장소에 그냥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지나가던 택시 기사 한 사람이 그를 부축해서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의 신원을 증명할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병원에서는 입원 처리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치료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고 후 3일이 지나고서야 그의 인부들이 병원에서 그를 찾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뒤라서 수술하고 3일이 지난 뒤에 하늘 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우디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웃 사랑을 강조했던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입으로는 너무 쉽게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실천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하는 내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행색이 형편없다고,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외면한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이 물음을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 베드로의 답변에 곧바로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의 이웃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고 미워하고 또 단죄한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들은 화려하고 멋진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행색이 초라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한 사람 역시 주님의 돌봄을 받아야 할 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도 제외 없이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어떻게 사랑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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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감사하다는 건 인생을 선물로 느끼는 능력이에요(존 오트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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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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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관계 회복을
어느 날 고해성사 때 신부님께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가 되신지 얼마나 되셨지요?” 저는 ‘아직도 이 모양으로 사느냐?’ 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신부님, 기도하시면서 열심히 잘사세요!” 하시며 격려하시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했습니다. 지켜지지 못할 라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을 담아 결심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약한 의지로 다짐과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선을 알면서도 오히려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철석같이 믿었는데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배신을 당하면 큰 상처를 받게 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쳐다보기도 싫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립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옛말이 있듯이 크게 놀라면 매사에 겁을 내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받고 일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5)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맺기 전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한 번만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라고 하였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던 옛 상처에서 벗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상처 입고 좌절한 마음이 회복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십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완벽한 관계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를 용서하셨고 베드로 또한 그분의 용서를 알고 믿었기에 배반하고도 제자공동체로 다시 돌아와 그들 사이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6) 하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예수님처럼 파견하신 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를 입고 자비로운 사람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제가 당신께 잘못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십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이제 당신이 판단하십시오.’ 하고 주님께 의탁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세 번이나 배반하였던 베드로를 당신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베드로뿐 아니라 그를 알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관계를 지속시켜 가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랑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용서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 간에 상처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용서는 배신당한 사람이 하는 것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처럼 품이 큰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21,19).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혹 소원해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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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란의 긴장 때문에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처음 다녀왔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 유명한 맛 집을 한 번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제가 주로 가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대박집, 금성가든, 제주도, 곱창이야기, 병천순대, 나주곰탕’을 자주 갔습니다. 자주가면 ‘단골’이 되고, 단골이 되면 특별한 서비스를 주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으면 ‘이스라엘’을 가려고 했습니다. 다른 성지도 많지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복음을 선포한 곳이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곳이고,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10번 이상은 다녀왔습니다. 저는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하였습니다. 매년 공동체는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제가 함께 했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서 일 할 때입니다. 매년, 신문사 주최로 성지순례가 있었고, 저는 함께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에 여러 성지가 있지만 저는 그 중에도 ‘갈릴래아’를 사랑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에는 베드로의 집터가 있습니다. 그곳에 배 모양의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행복선언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여라. 나도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내가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갈릴래아 호숫가에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3번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3번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는 3번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는데 예수님께서 3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저도 그 해석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 바위 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도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확신에 차서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내년에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번 넘게 ‘그리스도의 식탁’을 찾았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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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결혼식에서 우리가 듣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왜 둘이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까요? 하느님이 맺으셨으니까? 그럼 하느님이 맺으시면 아무하고 결혼하나요? 아닙니다. 왜 하나 되었다고 합니까?
아주 당연한 답이지만 둘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둘이 사랑하니까 하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사랑입니다. 우선은 사랑해야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복음을 통해 ‘너희는 서로 하나가 되어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항상 하시는 말씀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듯이, 우리가 서로 하나이듯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이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이듯이 라는 말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듯이 라는 말입니다. 일치, 그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이해도 사랑의 한 부분이고 용서도 한 부분입니다. 인내도 한 부분이고, 감사도 한 부분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 들어있고 이것이 있을 때만이 일치를 이룹니다.
좋아하는 감정만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인내도, 용서도, 이해도 없습니다. 좋은 감정이 없어지면 사랑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쉽게 헤어져 버립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시는 것을 본 일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세 번이나 하십니다. 그만큼 그 사랑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짐하고 다짐해도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언제나 도전받고 유혹받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일치할 수 있고, 일치의 모습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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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해도
어떤 해로움도 없는 일
마음껏 해도 아무런 해도 없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밥을 마음껏 먹으면 탈이 납니다.
노래를 마음껏 하면 목이 쉬고
운동도 마음껏 하면 무리가 옵니다.
마음껏 해도 어떤 해로움도 없는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일의 이름은 ‘스스로 챙기기’라고 지었습니다.
‘스스로 챙기기’는 마음껏 해도 해롭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돌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보는 눈은 중요합니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불편한지,
무엇에 기뻐하는지, 행복해하는지.....
마음껏 해도 해롭지 않을 그것.
‘스스로 챙기기’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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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삶의 좌우명>
“주님은 당신 성전에서, 하늘의 어좌에서,
세상을 굽어보시느니라,
당신 눈은 인생을 살피시느니라.”(시편11,4)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가진지 10년째 이지만 그 순례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2014년 그해 7.11일에 저는 25주년 서품은경축을 지냈고 이어 8월말부터 10월초까지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왔고 10년 흐른 내일은 제 후임 빠코미오 원장수사의 25주년 은경축 미사가 내일 오전 11시 수도원에서 있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마침 지난밤 잘 아는 열심한 자매가 보내준 아들과 며느리가 신혼여행 기념으로 산티아고 순례를 떠나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부부가 사이좋게 하나되어 활짝 웃는 표정의 사진이 참 좋았습니다.
“아들 부부 참 멋집니다. 멋진 아드님-며느리 두신 자매님, 축하드립니다. 아들 부부 위해 기도드립니다.”
축하 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후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제목이 삶의 여정입니다. 우리 삶을 하루로 압축하면, 또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있겠는가 점검할 것을 권했습니다. 일일일생 아침 6시에 시작하여 저녁 6시에 해가 진다 생각할 때, 여기에 각자 삶을 압축해보면 어느 시점인지 들어날 것이며,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역시 각자 삶의 시점이 들어날 것입니다. 물흐르듯 흐르는 세월입니다.
참 많이도 나눴던 예화입니다. 저의 경우 하루로 압축하면 오후 4:30분 정도,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현재의 시점 확인이 오늘 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기서 나온 제 좌우명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절실히 와닿은 제 좌우명입니다.
어제 지인으로부터 받은 “나이들면 인생은 비슷해 진다”라는 흥미있는 내용이 자신을 한없이 겸허하게 만든 느낌입니다. 더불어 어제 “공동체는 사랑으로 나를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이란 깨달음성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나이 들면서 이뤄지는 평준화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산은 낮아지고 계곡은 높아져 이런 일, 저런 일 모두가 비슷해 집니다. 많이 가진 자의 즐거움이, 적게 가진 자의 기쁨에 못미치고, 많이 아는 자의 만족이 못배운 사람의 감사에 못미치기도 하여, 이렇게 저렇게 빼고, 더하다 보면 마지막 계산은 비슷하게 되고 모두가 닮아가며 죽음 앞에서는 거의 평등합니다. 우리가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친절하고, 겸손하고, 서로 사랑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을 서로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저절로 이뤄지는 이런저런 평준화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부활시기도 끝납니다. 요한복음도 제1독서 사도행전도 끝납니다. 이에 걸맞는 오늘 말씀의 배치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와 사도행전에서 로마로 압송될 바오로에게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점차 가까워지는 순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문답이 베드로의 남은 생애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마도 남은 삶을 위한 좌우명으로 삼아 하루하루 힘껏 주님을 사랑하며 사목자로서 양떼 사랑이 매진했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이나 연거푸 같은 문답의 반복을 통해 베드로 마음 깊이 당신 사랑을 각인시킵니다.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추억이 있어 참 깊이 아프게 마음에 새겨졌을 문답입니다. 이에 곧장 주님은 결정적 중요한 당부를 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양들을, 형제자매들을 돌보라는, 섬기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목자는 물론이요 신자들 모두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야할 말씀입니다. 바로 형제자매들 사랑이 주님 사랑이겠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늘 되뇌며 살아야 할 공통적 좌우명입니다. 이에 필히 따라야 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요한21,19)
이제 머지 않아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바오로의 좌우명은 아마도 다음 말씀이지 싶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테살4,7)
어느 자매가 남편 선종시 들었다는 마지막 유언 세 말마디를 남은 생애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 내심 주님께 고백하며 살아간다는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제 좌우명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시중 다음 마지막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영원이,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에 담긴 영원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영원을, 하늘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하늘길이요 하늘문입니다. 끝으로 동방 4대교부중 한분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9-407)의 마지막 거룩하고 신비로운 죽음의 실화를 소개합니다. 결코 우연한 죽음은 없고 자비로운 주님의 섭리하에 이뤄지는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요한은 3개월 동안의 아주 혹독한 여행 끝에 순교자 경당, 바실리스쿠스에 도착합니다. 요한이 도착하기 전 순교자 경당의 주보 성인인 바실리쿠스가 나타나 요한에게 말합니다.
‘형제여! 용기를 내십시오. 내일 우리는 함께 있을 것입니다.’
성인은 순교자 경당의 사제 루키아누스를 불러 당부합니다.
‘요한이 올 것이니, 그를 위해 장소를 준비하시오.’
순교자 경당에 도착한 요한은 하얀 의복을 가져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입던 옷을 조용히 벗고 신발만 빼고 모두 바꿔입습니다. 다음 요한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성체를 모시고, 평소 사용하던 형태로 마지막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찬미받으소서.’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으로 아멘이라고 말하며 성호를 긋습니다. 경주에서 승리한 선수 요한, 그의 비천한 시신은 바실리쿠스 경당으로 옮겨 바실리쿠스 무덤 옆에 안장됩니다.”-
아, 살아서보다 죽어서 영원히 사는 성인, 요한 크리스토무스요 사후 1600년쯤 지나 이렇게 동아시아 한국에서 프란치스코 수도사제 강론에 인용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지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식사 습관도 소개합니다.
-“그는 우아한 삶과는 달리 지나치게 검소했고, 그런 것에 돈을 쓰는 행위를 하느님 모독으로 여겼습니다. 요한은 혼자 먹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이유는 술의 열기가 그의 머리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더운 날씨에 그는 약간의 장미수를 마셨습니다.
때로 요한은 먹는 일을 잊어버리고 저녁까지 식사를 미루기도 했습니다. 교회문제에 휘말리거나, 성경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영적 주제에 관한 묵상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공부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거나 아주 적게 먹는 것이 적절합니다.”(그리스도교 신앙 원천14권; 강선남 역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생애에 관한 대화279-282쪽)-
여러분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좌우명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며, 환상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 역시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영원한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의로우신 주님이기, 정의를 즐기시나니,
올바른 자, 당신 얼굴을 뵈옵게 되리라.”(시편1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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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
당신이 믿고
당신이 바라며
당신이 사랑하는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나의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며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돌보는
당신의 사람이
있을 뿐
당신이 믿고
당신이 바라며
당신이 사랑하는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나의 일은
없습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며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이루는
당신의 일이
있을 뿐
당신이 믿고
당신이 바라며
당신이 사랑하는
나
당신의
사람이기에
나의 길은
없습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바라며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걷는
당신의 길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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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
왜 예수님께서는 “네가 젊었을 때”라고 하신 다음 “그러나 늙어서는”이라고 덧붙이셨을까요?
당시 베드로가 아직 늙지는 않았지만 젊지도 않으며 인생의 한창때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분은 그에게 예전 생활을 떠올려 주셨을까요? 베드로에게 가치관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의 눈에 젊은이는 쓸모 있고 늙은이는 쓸모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하는 삶은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늙으면 젊음의 정념에 방해받지 않아 고귀함은 더 밝게 빛나고 용기도 더욱 탁월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를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의 사랑과 그가 이 축복을 오래 갈망해 왔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지도 알려 주십니다. 베드로는 늘 그분을 위하여 위험에 처하기를 바랐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을 내어라. 내 네 소망을 들어주겠다. 너는 젊었을 때 당하지 않은 고통을 늙어서 겪게 될 것이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요 지금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현존합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전에 일어난 사건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항상 지금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영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영원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입니다. 이것을 언제나 지금 봄으로써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엑카르트는 이와 동일한 주제, 곧 실현된 종말론과 충만한 시간을 다른 자리에서 길게 전개한다. 먼저, 그는 영원이라는 말을 뜻매김 한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영원은 한결같은 젊음을 의미한다. 영원이 다시 새로워질 수 있고, 같은 상태로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이 아닐 것이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영원은 젊음, 신선함, 새로움, 생명력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상태다. 영원은 하느님의 전유물이지만, 우리도 하느님의 은사에 의해 이 세상에서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 “하느님이 주는 것은 무엇이나 항상 마련되어 있다. 그것은 늘 새롭고 신선하며, 영원한 현재 속에서 계속 된다." 이는 “새로움과 생명이 하느님의 고유한 특성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현재가 존재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느님의 시간 개념이자 창조 개념이기 때문이다.(171)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생활 자세를 취해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이해했습니까?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은 성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을 나서면 나쁜 일을 저지를 모임에 가지 말아야 하고, 어리석음과 잡담들로만 가득 찬 집회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교회, 기도의 집들 그리고 영적 대화를 나누는 모임에 가야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예절을 갖추어야 하고 좋은 풍습에 적합해야 합니다. 성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옷차림과 웃는 모습 그리고 걸음걸이는 그의 인품을 나타낸다(집회 19,30).
영혼의 내적 상태는 외적 행위로 드러나고, 육체의 행동과 자세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시장에 갈 경우에, 우리는 행동을 진지하고 차분하게 하여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지 말고 차분하게 해야 하고, 이리저리 마구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걸음걸이를 침착하게 해야 하며, 말은 조용하고 품위 있게 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외적인 행동들은 영혼의 좋은 내적 상태를 보여주어야 합니다.(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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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 (21,17)
예전 어르신들은 가끔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문제를 잘 봐야 한다. 문제 속에 답이 들어 있다’고. 살다 보니 수긍이 가는 말씀이라 생각하고 저 또한 그래서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는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 깨어 살아가기 위해 거듭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향해 던져야 할 질문들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지금 어디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혹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21,16.17)라는 질문들 말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를 자주 흔들어 깨우는 무겁고 진지한 삶의 질문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붙들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보이기 시작하고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삶의 질문과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찾아야만 하고요.
사도 요한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요4,16)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뽑아 당신에게 보낸 사람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을 듣고 살려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진리인 말씀 안에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시고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맹세를 다짐하듯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베드로라는 존재를 몰라서, 혹은 베드로에게서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하시기 이전보다 베드로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고 더 주고 싶어서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가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베드로의 단순하고 주님께 향한 사랑의 강도에 있어서는 어떤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더욱 베드로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고 싶고 더 이상 스승을 떠나서는 존재 의미도 이유도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알고 계십니다.” (21,17)하고 주님의 사랑에 온전히 내어 맡기지 않습니까?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표현처럼 사랑도 사랑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잘하게 되고, 그 사랑의 소중함을 잘 안다고 봅니다. 베드로에게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단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주신 사랑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치 하느님 사랑의 저수지로 베드로에게 준 사랑이 흘러넘쳐 세상에 사랑을 목말라하는 모든 사람, 곧 베드로에게 맡겨질 양들에게 전달되리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을 겁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고,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21,15.16.17)하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느낍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께서 저에게 향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제 서품 때의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했듯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 것이며, 사랑이신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그 자체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응답이라고 봅니다. ‘네. 여기 있습니다.’라고 응답한 서품식의 제 대답은 제 사제직 전체를 좌우하는 실존적인 응답이었으며, 이 결심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러기에 오늘의 질문과 응답이 제 삶의 해답을 찾는 질문이며 응답이라고 동감하며 공감합니다.
“주님은, 제가 당신에게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저의 응답을 들으시기 전부터 제가 당신을 사랑함을 알고 계십니다. 굳이 이 대답을 다시 듣고자 하신 까닭은 오늘도 주님은 저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너에게 맡긴 양 떼를 잘 돌보아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살라는 당신의 바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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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을 마무리하시면서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 떼를 맡기십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시고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과 함께 주어집니다.
그리스 말에는 ‘사랑’을 뜻하는 낱말이 세 개가 있습니다.
격정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 호의적 감정과 끌림을 뜻하는 ‘필로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를 배려하는 ‘아가페’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는 ‘아가파오’(‘아가페’의 동사형)가 쓰이는데, 이 동사를 통하여 ‘너를 희생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지’를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필레오’(‘필로스’의 동사형)를 통하여, 예수님을 좋아하고 기쁜 마음으로 따르지만, 아직 자신을 희생할 만큼의 사랑은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목숨을 바칠 만큼 큰 사랑인지를 묻는 예수님의 물음과,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는 베드로의 대답이 두 번 되풀이되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물음의 내용을 바꾸십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 라고 옮긴 문장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에는 ‘나를 사랑하느냐?’(‘필레오’) 하고 물으시므로”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서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는지(‘아가파오’) 물으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사랑할(‘필레오’) 뿐임을 고백하자,
세 번째로 당신을 인간적으로는 사랑하는지(‘필레오’) 고쳐 물으신 것인데, 이 상황이 슬픈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필레오’)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필로스’)에서 참된 사랑(‘아가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독서에서 묘사된 바오로처럼, 베드로 또한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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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유혹의 정의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근친혼으로 이복동생과 혼인했지만 로마 제국을 점령한 카이사르와 연을 맺었습니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를 물리치고 이집트에서의 정권과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자신이 그저 노리갯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정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기는 편이 이집트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했지만, 전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장군직을 내려놓고 평민으로
클레오파트라와 내 가족을 살아가게 해 달라.”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처형될 것이란 옥타비아누스의 회신에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합니다.
죽어가던 중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단 소식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 만났지만 결국 그녀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에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란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기 위해 로마의 두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목숨을 목숨으로 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투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 대상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하느님은 본래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에 베드로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 베드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공부를 목숨 걸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유혹이 끼어듭니다.
나의 목숨을 나에게 생명으로 되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내어놓는 일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고 아담은 하와에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마치고 중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시험은 그저 형식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마지막 시험인데 자신도 점수를 잘 맞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러면 지우개에 해답을 적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걸려버린 것입니다.
손짓이나 뭐 그런 것으로 했다면 증거가 없었겠지만, 지우게에 답을 다 써 놓았으니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딴청만 피우고 있던 선생님은 시험지를 찢고는 저의 따귀를 수십 차례 때렸습니다.
저는 좀 지나치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고 그런 부정한 행위는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저에게 매우 미안해하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등록금을 대주고 고생해서 공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우개에 정답을 적어준 친구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돌려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나의 목숨은 해답이 적힌 지우개였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살면서 자기 목숨을 어디엔가는 투자합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결혼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생명으로
되돌려 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더라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고 그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내어놓는 삶이 가장 합당한 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 삽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이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유혹에 빠져 의미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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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을 부르는 사랑의 부르심 ♥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막중한 책임을 맡기기 전에 사랑을 그의 마음에 심어주시고자 하십니다. 사랑만이 박해와 수난을 겪어내고 교회공동체를 이끌어갈 가장 확실한 원동력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님, 사랑합니다' 하고 답하지 못하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21,17)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차마 자기 입으로 사랑을 한다고 답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우리는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하여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간다면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할지가 우리의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가 되어야겠지요.
사랑을 위해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불린 우리는 모든 순간에 사랑을 실천해야 하며, 모든 것에 사랑이 배어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생각, 말, 행동, 기도, 받아들임, 기쁨, 고통 등, 생활 전체가 사랑에 젖어들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소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삶이 힘들고 세상의 도전과 유혹이 거셀수록 우리가 찾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며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누구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핵심인 사랑을 중요시 여기며 살아가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앞에 있는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지닌 사랑에 만족함 없이 늘 지금보다 더 사랑하도록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성실한 분이시며,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계명을 지키기만 한다면 한없는 사랑을 주십니다. 이렇게 주어지는 사랑은 사랑을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고, 그 사랑에 불타 우리는 약속한 바를 지켜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처지에 관계없이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해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연약하고 자주 잘못에 떨어지기도 하는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겨드리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기쁘게 봉헌해야겠습니다.
사랑을 체험하도록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사랑을 거듭 확인하신 다음 양떼를 돌볼 소명을 주시며, 다시 ‘나를 따라라’ 하고 초대하십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베드로를 부르신 주님께서 오늘도 나를 사랑을 위해 고통과 시련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소명은 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일상의 수고로움과 아픔과 시련을 견뎌내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가 아니라면 무의미함을 깨닫고,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도록 힘쓰는 복된 변화의 순간을 이어가길 기도합니다.
출처: https://cafe.daum.net/apostlesofpeace/JO4U/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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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7.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이어지는 말씀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양들을 이제 베드로에게 맡기실 것인데
그것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베드로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관계 확인이라기보다는
관계 회복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입니다.
세 번의 부인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부인을
결코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스스로 그 사실이 부담으로 다가와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세 번 사랑 고백을 하면서
멀어졌던 관계는 회복됩니다.
오늘의 대화는 아침 식사가 있은 다음
이어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보니
그곳에는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와 빵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사가는 숯불을 언급하면서
숯불 옆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이제 숯불 옆에서 예수님께 사랑 고백을 할 것을
복선으로 깔고 있습니다.
부인의 사실을 직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욱이 숯불을 바라보면서
베드로도 부인의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고
피하고 싶은 마음과
다시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이
섞여있는 자신을 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예수님께서 물어보십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인간으로서 저지르는 실수들이
중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다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약함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믿으며
우리의 부족함에도
하느님께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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